동망봉, 그 깊은 이야기에 빠져들다
동망봉, 그 깊은 이야기에 빠져들다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09.03.3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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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정순왕후 ‘애사’가 스토리텔링으로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동망봉(東望峰)은 참 애닯은 곳이다. 5백년 가까이 그곳 주민들이 땅이름으로 기억해 온 사연은 애달프고도 깊다. ‘동쪽을 바라 보다’라는 뜻을 지닌 이곳은 조선 전기 단종(端宗) 임금의 왕후였던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연이 깊은 곳이다.

▲ 권대섭 대기자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이 1457년 10월 유배지 영월에서 1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자, 그 날 이후 60년 동안 왕후가 이곳 봉우리에서 동쪽인 영월을 바라보며 남편인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는 곳이다. 때문에 이 일대에는 단종비 정순왕후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있다. 동망봉 동쪽 기슭 성북구 보문동 산마루엔 왕후가 동쪽을 바라 보며 눈물지었다는 자리에 왕후를 신으로 모시는 ‘산신각’이 있다. 보문동 주민들이 매년 제를 올리는 곳이다. 동망봉 북쪽 기슭 청룡사와 정업원 옛터는 남편을 잃고 비구니 스님이 된 왕후가 지내던 곳이다. 청룡사 북쪽 원각사는 왕후가 단종의 명복을 빌며, 삼년상을 치른 곳이다. 그곳 산신각에 1970년대까지 정순왕후의 영정과 유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원각사 옆 자주동천(紫芝洞泉)은 왕후가 시녀들과 함께 동대문 상인들로부터 받은 옷감에 자줏물을 들여 생계를 이었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부근에 자지초(紫芝草)가 아주 많아 우물 물빛이 자줏빛이었다고 한다. 이 우물 물로 옷감에 물들여 널었음직한 바위에 ‘紫芝洞泉’이라고 선명히 새겨져 있다. 동망봉 남쪽 동묘 건너편 숭신초교 앞은 ‘여인시장터’다. 정순왕후를 동정한 인근의 여인들이 왕후를 돕기 위해 남자들의 출입을 금한 여인들만의 채소시장 터다. 이곳에서 시녀들을 통해 왕후에게 먹을거리를 공급했다. 당시 사람들의 민심과 여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밖에 정업원 옛터 비각에는 왕후의 사연을 들은 조선후기 영조대왕이 정업원 옛터임을 알리는 친필 명문을 남겨 놓았다. 영조대왕은 동망봉 봉우리 바위벽에 친필로 ‘東望峰’이라 새겨 넣기도 했으나, 이 글씨는 일제시대 때 동망봉 일대 바위절벽이 채석장으로 뜯기면서 사라졌다. 또 청계천에도 왕후의 유적이 남아 있다.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놓여진 다리 ‘영도교’는 영월로 유배가던 단종이 왕후와 마지막으로 헤어지며 이별했던 곳이다. 

오는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동망봉 일대에서 열릴 ‘정순왕후 추모문화제’는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런 비극적 애사(哀史)를 기억하며, 스토리텔링으로 엮을 문화제다. 정순왕후는1440년(세종 22) 여산 송씨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태어나 검소하고 공손한 성품과 효우로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불과 3년 정도 남편인 단종과 함께 했을 뿐, 비극적 정치사에 비애넘친 인생을 살게 된다. 단종 임금을 잃은 뒤 81세인 1521(중종 16)년까지 살며 동망봉에서 오직 남편의 명복을 빈다.

종로구와 종로 문화관광협의회는 지난해부터 정순왕후의 이런 비애를 ‘문화제’로 발굴, 문화관광 상품으로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있다. 당사자들에겐 더할 수 없는 비애지만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상품화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영월에서 40년째 열고 있는 ‘영월 단종제’와도 연결, 단종이 숨진 유배지 청령포를 찾아 단종과 정순왕후의 ‘영혼 해후’를 주선하기도 한다.

문화제 행사를 계기로 일반인들의 역사의식이 함양되고, 자기 고장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와 전래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들이 일어났으면 한다. 자기 역사와 이야기와 문화를 기억하고 전승하며 가꿀 줄 아는 국민만이 세계화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