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회(下)문화예술 동호회를 찾아서 40년 역사
민학회(下)문화예술 동호회를 찾아서 40년 역사
  • 최홍순 민학회장
  • 승인 2010.12.2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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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축제·한옥 등 민족문화의 모태를 찾는 보통 사람들

민학회 조직
‘민학 제1집’ 간행(1972. 4) 후 제1차 총회, ‘제2집’ 간행(1973. 5) 후 제2차 총회를 개최한 뒤 3년 동안 민학회는 두드러진 활동을 멈춘 채 쉬고 있었다.
동호인들의 모임이며 순수한 의도밖에 없고 아직 아무런 조직도 없어 막연하게 그냥 세월만 지나갔다. 한동안 실무를 맡아봤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각각 자기일에 몰두하게 되고, 아무런 구속력이 없으니 회(會)는 이름만 남아있는 형편이 됐다.
실무자들의 좌절을 자극시키는 힘, 그것은 회우(會友)들의 독려와 촉구였다. 다시 회(會)의 정상활동을 준비하게 됐다. 3년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우선 회보(會報) 간행을 서두르기로 하고, 몇몇 회원은 그 일에 착수했다. 비록 ‘민학 제3집’의 간행은 좌절되었지만, 그 규모의 막내쯤 되는 회보 창간호가 1976년 4월 30일자로 세상에 탄생했다.
그러나 회보 간행에 회의적인 일부 회우도 있었다. ‘민학 제3집’이 우선이라는 의견이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무진으로서는 무엇보다 활동이 재개되었다는 신호가 필요했다. 또한 ‘제3집’ 간행 전에 회(會)의 구성과 조직의 정비도 시급했다.
1976년 6월 12일~13일, 최초의 공동답사를 실시했고, 전국에서 50여명의 회우들이 경주의 작은 여관방으로 모였다. 제3차 총회가 자연스럽게 개최되었다. 임시 의장에 진주의 김상조(金相朝) 회우가 선임되고, 그의 사회로 임원의 선출과 회칙 제정이 진행됐다. 일부 세부적인 일은 임시의장이 지명한 소위원회에서 재빨리 정리했다.
그 결과 임원과 운영위원이 선임되고, 향후 2년간의 실무 멍에를 그들이 짊어지게 됐다. 지역별로 회(會)가 구성되고 회장이 선출됐다.
전체 회장은 당시 통문관 대표이던 이겸로(李謙魯) 옹이 맡고, 부산민학회는 김위상(金渭祥), 진주민학회는 박종한(朴鐘漢), 대구민학회는 이세준(李世俊), 경주민학회는 우병익(禹炳益)이 각각 회장에 선출됐다. 운영위원은 강덕인(姜德仁), 조자용(趙子庸), 최규진(崔圭珍), 최순희(崔淳嬉), 총무에는 신영훈(申榮勳)님이 각각 뽑혔다.
50명 내외로 출발한 회우는 어느새 200여 명으로 비약했고, 기층문화 탐색에 동조하는 회원은 더욱 늘어날 기세였다. 전체 8항으로 제정된 ‘민학회 회칙’ 제1항은 ‘한국 기층문화의 공동연구’에 참여하는 동호인들로 민학회(民學會,Folkist Society)를 구성하며, 회지「민학(民學,Folkism)」과 「민학회보(民學會報)」등을 간행하고 제반사업을 운영한다‘로 정했다.
제각기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들일지라도 민학회에 오면 아마추어가 된다. 새로운 분야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민학회의 매력이 있었다.
분명히 있었는데 잊어버렸거나 버려졌던 선조들의 지혜와 마음을 찾아내 참다운 내 모습을 알아내겠다는 사람들의 모임인 민학회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
서울민학회, 광주민학회, 대구민학회, 금강(공주,부여)민학회, 부산민학회가 있으며 회원수는 서울이 150여명이며, 지방 민학회의 회원수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동서문학 발행인 전숙희(우측)여사가 백승길(좌측)선생과 조자용(중앙) 선생을 동이에 초청 민학회에 관한 좌담회를 하고있다. 

 

 민학회 회원들 소개
서울민학회 회원 중심으로 그 면면을 살필 수밖에 없다. 또한 회원의 면면도 대외활동이 두드러진 회원 중심으로 소개됨을 양지해 주기 바란다.
1976년 4월 30일에「민학회보(民學會報)」제1호(창간호) ‘회원동정’에 나타난 회원들의 소식이다.
강우방:1975년부터 일본 교토박물관에 연구수업차 체류 중
고하수:《한국꽃꽂이의 역사》출판기념회 개최
김규태:《국제신문》문화부장으로 ‘한국의 美’를 100회에 걸쳐 기획ㆍ연재했는데, 큰 호응   받음.회원으로 이 시리즈에 참여한 이는 건축의 신영훈, 장승의, 이종석, 민화의 허영환이다.
김상조:문화재관리국 상임전문위원에 위촉
조자용:미국 하와이에서 민화 전시차 체류 중
이종석:호암미술관 개관 앞두고 동분서주
이우형:경주․제주도의 고적․ 천연기념물․ 민속자료 등을 포함한 지도 완성
신영훈:《한복의 역사》펴냄
한상수:《이조의 자수》펴냄
1976년 6월 30일에 간행된 민학회보 제2호에는 불화제작가 이만봉(李萬奉) 스님, 한국 문화재의 1세대 지킴이 3인방 최순우(崔淳雨), 황수영(黃壽永), 진홍섭(秦弘燮) 선생을 위시해 정양모(鄭良模), 이구열(李龜烈) 선생들의 동정이 실려 있다. 한마디로 당시 문화예술계의 거물들이 거의 망라된 모습이다.순서없이 소개해 본다. 존칭도 생략한다.
우선 현재 민학회의 좌장으로,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이자, 박물관협회명예회장,삼성출판박물관장으로, 1인다역의 김종규 회장이 있다.
화가 권옥연(예술원 회원), 송수남(수묵화), 송영방(수묵화), 김종학(서양화), 송규태(민화)가 있고, 정신과 의사로 이시형(전 삼성강북병원장), 정동철 박사, 대목장 신응수, 한국자수박물관장 허동화 등은 든든한 후견인들이었다. 안동 세계탈박물관장 김동표, 목아박물관장 박찬수, 가회박물관장 윤열수, 한국옹기박물관장 최영자 등도 부동의 민학회 회원이다.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리던 윤경렬(작고), 공간사랑 설립자인 김수근(작고), 구수한 목소리의 성우 신원균(작고)님도 열정적인 민학회 회원이었다. 사물놀이패의 김덕수, 마당놀이패의 손진책, 김성녀 부부도 열정적인 민학꾼들이었는데 요즘은 워낙 바빠서인지 뜸하다.
전 문화재청장으로 미술사 전공의 유홍준 교수는 민학회를 친정집으로 여긴다. 수학자 김용운 교수, 미술평론가인 경원대의 윤범모 교수, 초대 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을 지낸 김병모 교수, 2대 총장을 지낸 이종철 교수, 3대 총장을 지낸 배기동 교수가 몽땅 민학회 회원 출신이다.
(사)궁중음식연구원의 한복려 원장, 안숙선 명창, 매듭연구가 성낙윤, 고부자(전통복식연구가), 짚풀생활사박물관 인병선 관장,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 최성자 기자, 선무용가 이선옥 교수, 박여숙 화랑의 박여숙 대표, 《행복이 가득한 집》발행인 이영혜 대표도 민학회를 매우 사랑하던 사람들이다. 시인 신경림, 시인 민영, 소설가 김주영도 빼놓을 수 없는 민학인이었고, 작고한 사진작가 김대벽도 잊을 수 없는 회원이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의 따님 고병복, 그와 가까운 김기수, 이두영 등은 원로회원들이다. 성우 고은정도 오래된 회원이고, 왕터수련원 노길자 원장, 국악인 진선화, KBS-1TV 진품명품에서 감정위원으로 활동하는 양의숙 예나르 대표, 김영복 옥션 단 대표도 진국 회원들이다.
박주환 동산방화랑 대표, 장현석 청주문화원장, 박태광 강화문화원 부원장, 이재순 전통문화재조각회장, 타이포그래픽의 안상수 홍익대 교수, 조계사 성보박물관장 범하 스님, 이석 조선황실보존회장,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 등은 매우 농익은 회원들이다.
한국문화재보존기술진흥협회 상임이사 유문용, 이사 황의수 등은 민학회 초기 회보 제작에 애썼던 회원들이고, 강순형 문화재청 보존과학실장은 민학회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회원이다.
의정부 예술의전당 최진용 사장,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발행인 등은 뉴페이스로 민학회의 미래를 바꿀 인물들이다. 법조인으로 참여한 박경재 변호사, 류경환 변호사 등도 다크호스 같은 존재들이다.
한국산악회 청소년지도위원인 정계조 회원,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윤재환 사무국장, 답사 때마다 개근하는 성균관대학교 백금남 교수, 서문경자, 최영숙, 심상희, 박양기, 김경숙, 남경숙, 최남경, 조영옥, 이민주, 정혜수, 엄미금들은 보배 같은 회원들이다.
남원의 류성우, 동국대의 오출세 교수, 거창의 한대수, 김인식. 이익배, 홍성두, 이기홍, 박옥성, 신소윤, 박경숙, 이호, 김정희, 이미옥, 이정래, 이정규, 천희영, 김윤규, 구본춘, 이복연, 강정헌, 김경배 등도 민학회의 기둥 같은 회원들이다.
이름을 올리지 못한 회원들께는 거듭 사과드린다. 지면의 여유도 없고, 시간에 쫒겼기 때문이다.

2011년은 민학회 출범 40주년의 해
2011년은 민학회가 창립된 지 40주년이 되는 해다. 출범 초기의 민학회 중점 사업은 ‘민학’회지 출간이었다. 그것은 민학회의 목표이자 생명이었다. 그러나 자금 부족에 의해 제2집까지만 출간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민학회보’ 출간으로 그 목적을 대신해 왔는데, 그마저 지난 10여년 동안 단 한번(제41호)만 출간하고 중단된 상태다. 현재 42호 민학회보를 ‘조자용 선생 10주기’를 맞아 특집으로 편집 중에 있다. 답사는 지금까지 꾸준히 진행해 243차까지 왔다. 내년 2월부터 11월까지 또 진행할 예정이다.
지금 각계 각층에서 벌이고 있는 역사문화 프로그램의 아이디어 은행 같은 역할을 해온 민학회는 정작 자체 활동은 매우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출범 당시와 비교해서 지금은 최첨단, 초스피드로 모든 문화정보 활동이 급변하고 있다. 이를 따라잡아야 한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변신을 느낀 순간 재출발하면 된다.
따라서 2011년의 민학회는 4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보다 ‘전환의 해’ ‘변화의 해’ ‘개혁의 해’로 삼아 그 지혜를 모아야 한다.
‘민학회보’ 43호, 44호를 계속 발간해야 하고, 차별화된 ‘민학강좌’도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두어 차례 기층문화와 관련된 세미나도 열 계획이다.
선조들이 남기고 간 민족의 유산은 대체 얼마나 남아 있는 걸까? 작고 보잘 것 없는 나라 같지만 막상 돌아다녀보면 그렇게 넓고 끝없을 수가 없다. 가도가도 볼 것이 수두룩하다. 그걸 다 보았다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못 만났다. 골짜기마다 산등성이마다 선조들이 남기고 간 유물이나 유지(遺志)는 엄청 남아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놓치고 다닌다. 못 보고 다닌다. 못 느끼고 다닌다.
요즘은 바다 속에서도 그것이 나온다. 전국 방방곡곡에 얼마나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지 예측할 수조차 없다. 그만큼 넉넉하고 풍부한데, 우리는 그것을 찾는 동기를 부여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바로 민학회는 그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모임이다. 이미 많은 선배들이 코치를 해주고 갔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가 그 훈련을 외면해 왔다. 이제라도 다시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삶에 필요한 모든 생활용구나 용품이 우리의 연구대상이 된다고 한다면 그 자료의 끝없음은 가히 무량수(無量數)에 이를 것 같다. 무엇이 있을까, 어떤 것이 남았을까의 탐색은 우리를 흥분시킨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도 더 많은 자료의 출현이 있을 듯하다는 호기심에서 우리들은 또 다시 줄달음질쳐 그것들을 찾으러 산야(山野)를 헤매야 한다. 그것이 40주년을 맞이하는 민학회의 기본정신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설립자 조자용 선생을 더욱 그리워하는 것 같다.

조자용은 누구인가

신경정신 의학계의 거두 이시형 박사는 조자용을 일러 ‘민속의 대부’라고 했다. 선생은 우리 겨레의 ‘모태문화(母胎文化)’ 연구자이자 ‘민문화’ 연구가였다. 서예 그림, 사진에도 남다른 재능을 가졌었고 ‘멋과 흥’을 으뜸으로 여긴 금세기의 풍류객의이었다. 1926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47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밴더필트 공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대학원에서 구조공학을 연구했다.
6ㆍ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 1954년에 돌아온 선생은 새로운 건축재료와 새로운 공법으로 건축 현장에 뛰어든다. 당시로서는 가장 현대식인 종로2가 YMCA빌딩도, 부산의 구세군 본영빌딩도, 정동의 미대사관저 한옥 하비브하우스도 모두 선생의 설계감리로 탄생했다. 그런가 하면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뒤 일지암(一枝菴) 복원도 선생의 솜씨이다.
선생의 주변에는 항상 주한 외국인들이 있었다. 선생이 주장하는 한국의 모태문화 전반에 걸친 해박한 해석에 외국인들은 매료됐던 것이다. 이미 1955년에 취미와 흥미로 수집한 ‘까치호랑이’ 그림, 즉 민화(民畵)를 들고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전시를 했다. 민화를 세계에 알린 최초의 전도사였으며 이로부터 유럽 쪽 특히 프랑스나 독일의 각 대학 박물관에 소장된 우리의 풍속화가 서서히 그들의 연구 주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국내의 회화사에서는 천덕꾸러기요, 그 가치조차 인정받지 못했는데, 외국의 미술가들은 한국의 진짜 그림은 민화라고 할 만큼 관심을 끌게 한 사람이 조자용 선생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선생은 기리 기려야 할 인물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선생은 민학회를 창립해, 초기에는 건강상의 문제로 앞장을 못 서다가 건강회복 후 최일선에서 전국의 사라져가는 마을 축제 부활을 위해 사재 쓰기를 물쓰듯했다. 오늘날 지자체마다 넘쳐나는 축제는 조 선생의 진정성 있는 축제의 의미를 음미해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축제에 진정성이 깃들면 그 축제를 보기 위해 관광객이 스스로 찾아간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지난 2010년 11월 14일 오전 10시 보은군 대목리 속리산 천황봉 서쪽 기슭에 잠들어 있는 선생의 묘소 앞에서, 선생을 따르던 후학들이 150여명 모여 선생 서거 10주기를 기념한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민학회(회장 최홍순) 회원과 한국민화학회(회장 윤열수) 회원이 주축을 이룬 이날 제막식에는 국내 각지는 물론 멀리 해외에서 모여든 팬(Fan)들로 걸판진 한판의 잔치가 벌어졌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