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릴 때마다 바다를 닮아가는, 이한우 화백
그림을 그릴 때마다 바다를 닮아가는, 이한우 화백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 ㆍ정리 이상정 인턴기자
  • 승인 2011.01.2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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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큰 인물이 된 건지 모르겠네요. 이제야 그림을 그린 것 같은데”

[서울문화투데이=이상정 인턴기자] 본지는 미술가들과 인연이 많다. 지금은 돌아가신 故 전혁림 화백, 미술계의 거목 이종상 화백 등 기라성 같은 화백들을 거치면서 본지의 미술 내공(?)도 ㆍ꽤나 깊어진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아직도 멀었더라. 이번에 본지가 만난 이한우 화백은 이전과는 또 다른 미술의 매력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서울 홍은동 작업실에서 만난 눈이 빛나는 노(老)화백, 이한우의 60년 화적(畵跡)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이한우 화백

어렸을 적 이 화백님은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합니다.

“놀기 좋아하는 장난꾸러기였죠.(웃음)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께서 천자문을 가르치셨는데 ‘하늘 천 따 지’ 이러다가 할아버지 눈을 피해서 항상 글씨 안에다가 그림을 그리곤 했어요. 보통 우리가 어렸을 때 화분이나 나무 그림으로 낙서를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계속해서 낙서를 했었어요.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그림을 그릴 씨앗이 (저에게)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성장하면서는 조금 달라졌지만, 어렸을 적에는 학교 선생님의 말을 따라서 그저 큰 인물이 되고 싶었어요. 딱히 어떤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가지지 않았어요. 다만 ‘boys be ambitious’라는 선생님의 말을 가슴에 담고 큰 인물이 되겠다고 다짐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미술의 세계로 입문하시게 된 건가요?

“저는 원래 교사로 12년간 근무를 했었어요. 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미술 실력 때문에 시 미술교육연구위원으로 추천을 받아서, 미술 공부를 그때부터 제대로 하게 된 거죠. 그때 처음으로 동양미술사라든지, 서양미술이라든지 라는 학문적인 측면에서 미술에 접근을 하게 됐지요.”    

통영 출신이신데, 통영출신 예술가들이 많으시잖아요? 지난해 저희 신문사 주최로 전시회를 열었던 故 전혁림 화백도 통영 출신이신데요.

“맞아요.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굉장히 많지요. 제가 어렸을 때 큰 인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주변에서 큰 예술가들을 자주 뵜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통영 출신 예술가들은 하나 같이 바다와 같은 넓고 큰 예술세계를 지니고 계셨는데, 저도 그래서인지 몰라도 바다가 들어간 그림을 지금까지 많이 그렸어요.(웃음) 근데 아직 큰 인물이 된건지는 모르겠네요. 이제야 겨우 제 한 몸 건사하게 된 것 같은데...”

▲ 이한우 화백 작업실 풍경

이한우 화백은 그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소박하고 소탈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소박함이 싫지 않다. 그의 소박함에는 87년이라는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어, 무게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의 화려한 비상을 이야기 해보자.

73의 나이에 유학 차 프랑스로 떠나셨는데요? 그 쪽에서 인정받기 위해 가신 건가요?

“글쎄요. 딱히 프랑스에 가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그런 강박관념은 지니지 않았어요. 다만, 프랑스 파리가 세계 표현주의의 시작점이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배울 것이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죠. 그리고 가서 그 쪽 스타일에 맞춰 내 성향을 버리지 않고 제가 그리고 싶은 것, 제가 마음 속으로 그리고 있던 것을 서양적 시선과 잘 조화시켜 그리니까 사람들이 인정해 준 것 같아요. 사실, 제 나이에 공명심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저 항상 새롭게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화가의 마음으로 프랑스로 떠난 것이지, 내 그림 정도면 해외에서도 알아 줄 거란 거만한 마음은 지니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한우 화백께서는 2007년에 프랑스에서 수여하는 앙드레 말로 공로상을 받으셨는데 감회가 어떠셨는지요?.

“기쁘지요.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럽고 제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는 것 때문에 굉장히 큰 영광이 될 것 같아요. 사실 저 같은 표현주의 화가로서는 표현주의의 고향인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회를 여는 게 크나큰 영광입니다. 그런데 제가 인정을 받는 길이 순탄치는 않았어요. 현재 저랑 친분이 있는 프랑스 사람 중에 프랑스의 풍경 화가이자,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 카미유 피사로의 손자가 있어요. 크로드 피사로라는 사람인데, 프랑스 표현주의 화가의 정통을 잇고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80년대 초반에 프랑스에 미술 관련 연수를 갔을 때,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지금 당신의 그림은 본래 표현주의 작가들이 추구하던 그림이 아니라 일제 시대에 일본을 통해서 한번 변형된 채 한국으로 넘어 온 왜곡된 그림이다. 제대로 그림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색깔을 통해 자신 만의, 한국 특유의 표현주의를 형성해 내야 한다. 그래야 프랑스 파리에서도 눈길을 끌수 있지 않겠나’하는. 제가 그 말을 듣고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더 이상 그림을 배운대로 그려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지요. 그리고 계속 ‘민족’이나 ‘국가’ ‘역사’ 등 대 서사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그런 대 서사들이 제 그림을 풍족하게 만들어 줄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아 떨어진 것 같아요. 나중에 한국일보사의 초청으로 크로드 피사로와 같이 2인전을 열었는데, 그 때 그가 칭찬을 해주더군요.(웃음)”

▲ 아름다운 우리 강산

지난 2007년에 프랑스 파리 룩상부르 공원에 위치한 *오랑쥬리 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가지셨는데, 외국인으로서 쉽지않은 기회를 가지게 되셨는데요.

“2001년에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인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파리 부시장이 초청을 해서 프랑스 MB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어요. 그 화랑이 아주 크고 유명한 화랑인데 아마 제가 한국인으로는 처음 전시회를 초청받아서 열었을 거에요. 그때, 아주 호평을 들었어요. 그게 아마 프랑스에서 계속 얘기가 되가지고 그랬던 거 같아요. 2007년 오랑쥬리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는 프랑스 상원의장이 직접 초청을 했는데 그게 초청한다고 다 전시회를 가지는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실적을 지니고 있어야지 전시회를 열 수 있어요. 근데 제가 여기저기 국제적으로 전시회를 많이 가져왔고, 또 상을 여러 번 받아 자격 요건이 맞아 떨어져 전시회를 열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상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규모 전시회로 성격이 변했어요. 제가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프랑스 사람들이 대우가 달라졌어요.”
*오랑쥬리 미술관 : 모네, 르누아르와 같은 대 화가들이 전시한 박물관으로, 프랑스 상원의장의 추천 없이는 전시가 불가능하다. 추천 후에도 경력과 실적을 조사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작가들만 전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시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대단했지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깜짝 놀랐어요. 당시 유럽에 소재한 평론가들이 대부분 참석했어요. 부끄러울 것은 없었지만, 욕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래도 욕하는 사람은 없습디다.(웃음) 당시 전시회의 평론을 파트리쓰 드라 뻬리에르라는 미술 평론가가 했는데 그 사람이 ‘이한우와 같은 예술가의 그림에 대한 평을 쓴다는 것은 평론가에게는 언제나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자신만의 기교에 의해서 한층 가치가 돋보이는 강렬한 독창성을 느끼게 한다’고 말했어요. 원래 유럽 평론가들은 가차 없이 (예술가들을)깎아내리는데 그러지 않고 오히려 칭찬을 받았으니. 정말 기분 좋았지요. 그리고 당시 참석한 귀빈들 중에서 크리스티앙 뽕슬레 상원의원이 있었는데 ‘파리 시민들과 함께 한국의 산수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는 이한우 화백의 작품을 발견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라고 했고, 당시 관광공사 파리지사장이었던 진수남 씨는 ‘우리가 파리에서 1년이 걸려도 해내지 못한 관광 진흥에 큰 몫을 해냈으니 표창장이나 감사장을 드려야 겠다’고 했는데 물론 큰 기쁨이자, 영광이었지만 그것보다는 저 개인적으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것 같아서 뿌듯했어요.”

▲ 이한우 화백 개인전 표제작

사실, 이 화백의 인기는 전 세계적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어느새 유명세를 타고 있으며 예술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도 계속해서 구매 문의가 들어올 정도다. 인도 국립미술관 초대전, UN세계평화미술대전 초대작가전, 프랑스 유네스코 미로미술관 초청 등, 그의 쟁쟁한 이력에 비하면 당연한 일일 테지만, 이 화백은 언제나 소탈하고 청빈하다. 낡은 집에서, 추운 작업실에서 노구를 이끌고 언제나처럼 그림을 그리는 이 화백은 아직도 열정이 살아있다.

▲ 작업 중인 이한우 화백

이렇게 프랑스에서 국위선양을 하시고, 국내·외에서 인기를 끄셨으니 작품도 상당히 많이 팔리셨겠네요.

“에이, 그건 저도 잘 몰라요. 그림을 사고파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거든요. 항상 그림을 그리니까 나름 다작하는 편인데, 그림의 판매는 화랑에 일임하고 있어서 얼마나 팔렸는지, 얼마에 팔렸는 지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다만, ‘옥션’이나 인터넷 경매에는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습니다. 뭐, 제 그림도 옥션으로 팔리기도 한다니까 할 말이 없지만, 옥션은 화랑 뿐 아니라 화가의 생명도 위태롭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옥션에서는 이름 있는 화가의 그림에 인플레가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반면에 신인작가들이 성공하기는 너무 어렵거든요. 때문에 신인 작가들의 성장을 저해한다는 면에서 옥션이 우려됩니다.”

▲ 나의 고향

60년 간 그림과 전시회를 해오셨는데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을 법도 한데요.

“프랑스에서 2년 간 있을 때 한 화랑에서 전시를 했어요. 그런데 제 그림이 하루에 열 댓 점이 팔려나간 거에요. 근데 그림이 너무 잘 팔리니까 화랑에서 욕심을 품어가지고 그림 값을 올려 적어 놓고 아무도 못 사게 한 거죠. 자신들이 그림을 모두 매입해 가지고 더 비싸게 팔려고 한거죠. 나중에 알고 엄청 화를 냈어요. 그림 값이야 제 값만 받으면 되는 건데, 제 그림을 가지고 터무니없는 폭리를 누리려고 하는 건 더할 나위 없이 불쾌했습니다. 뭐 화랑 측에서는 그림이 잘 팔리니까 잔 머리를 쓴 거겠지만 그림을 구매해 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것은 도리가 아니죠.”

이 화백님 말고도 다른 화가들이 세계에 나가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한국의 많은 화가들이 몬드리안이나, 샤갈, 피카소와 같은 세계의 여러 화법을 익혀가고 있습니다. 그 수준도 상당히 높아서 세계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수준이지요. 하지만, 서양이 주류인 세계 미술계에 한국 화가들이 족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서양의 주류화가들)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참신함을 화풍에 접목시킬 필요가 있어요. 이 말인즉슨 우리(한국)만의 고유한 색깔을 지녀야 세계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술과 함께 자신의 미술적 정신이 어디에 속해있는지 알고 그림을 통해 실천해야 합니다.”

현재 이 화백께서는 고향인 통영이 아닌 천안에 미술관을 짓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특별한 연고나 이유가 있으신가요? 

“고향인 통영을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너무 멀고 관리가 힘들것 같아, 아들이 사업을 하고 있는 천안에 두기로 마음 먹었어요. 그리고 미술관 모양새 그런 거는 잘 알지 못해요. 다 자식들이 알아서 하고 있는 데요 뭘.(웃음) ‘100년, 200년 후에 우리 것을 어디에서 찾아낼 것인가? 시대는 흘러가기 마련이지만 자기가 보고 자기가 느낀 것이야말로 우리의 역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에 나 만의 역사를, 내가 보고 느낀 역사를 그림으로 남기고자 해서 미술관을 만들고자하는 거지요.  현재 주어진 일정이 다 끝나면 그때 한꺼번에 전시회 겸 개관식을 할 생각입니다. 거기다가 땅이 그리 넓지는 않지만, 현재 제가 살고 있는 집을 신축해서 서울에도 미술관을 개관할 생각입니다. 아마도 천안에 건설될 미술관과 서울의 미술관을 함께 개관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 어촌의 봄

끝으로 이한우 화백께선 그림이란, 또 화가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시나요?

“아이고! 그렇게 어려운 것은 묻지 말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웃음) 제가 어디 그런 걸 함부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저 그리고 또 그려보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뭐라고 얘기할 것이 있겠지. 지금은 다른 어떤 말로 정의를 내리고 싶지 않아요. 저는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릴 생각이기 때문에 그림이 뭔지는 죽은 후에야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네요.(웃음)”

“화가는, 화가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또 그게 좋은 화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은 모사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그림 속의 담겨진 화가의 인생을 모사할 수 없는 법이에요. 좋은 작품일수록 인생과 함께 깊어져 가는데, 그것은 화가가 전심전력으로 자신의 마음을 그림 속에 투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제가 그린 ‘아름다운 우리 강산’이라는 작품은 모두 우리 강산, 우리 바다,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이것은 그저 계획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그림을 전시했던 제가 마지막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곳이 우리의 고향, 우리 강산이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을 찍으려는데,  노(老) 화백은 “화실이 지저분해서 부끄럽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화실, 그 사이 사이에 빼곡하게 들어 찬 그림들. 오래된 화가의 역사가 금방이라도 필름처럼 나타날 것 같다. 그  작업실에서 이 한우 화백은 ‘이렇게 한 번 왔다 가면 다음 번에 내 그림만 보고 가겠다’며  농을 던진 뒤 손을 들어 한 번 씽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의 굽은 등마다 햇살이 부서지고 채 녹지 않은 눈들은 창가 밖에서 물감처럼 굳었다가 번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