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근의 호패와 명판, 등록문화재로 등록 추진
고영근의 호패와 명판, 등록문화재로 등록 추진
  • 주영빈 기자
  • 승인 2011.01.2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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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시 문화재위원회 조사 및 심의 거쳐 지난 27일 문화재청에 등록 신청

[서울문화투데이=주영빈 기자]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인 우범선(禹範善)을 암살한 前 독립협회 회장 또 우리나라 근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고영근, 그가 남긴 유물에 대해 문화재 등록이 추진된다.

서울시는 고영근의 증손자가 소장하고 있던 고영근의 호패(號牌) 2점과 명판(名板) 2점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을 지난 27일 문화재청에 신청했다고 밝혔다.

▲ 고영근 호패

이 유물들의 주인공인 고영근은 종2품의 무관(武官) 출신으로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회장을 지내며 윤치호 등과 함께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민회(民會) 도입을 추진하고, 대한제국의 비자주적 외교와 친러정권을 통한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비판하며 국정개혁안인 <헌의6조>를 고종에게 제출하기도 한 인물이다.

1899년 고종의 명에 의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강제 해산된 후 동 단체 재건을 위한 경성 지역 내 일련의 폭발사건에 연루되어 교형(絞刑)을 받게 되자 일본에 망명하였는데, 여기에서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모를 알게 되어 동 사건의 주범으로 일본에 망명중이던 우범선을 1903년 11월24일 암살했다. 이 일로 그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의 공을 높이 산 고종 황제의 특별사면 노력에 따라 1909년 국내로 송환되었다.

▲ 고영근 명판

그 후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도입된 조선총독부의 문화통치 하에서 대한제국의 존재를 모두가 잊어가고 있던 때, 고종황제의 능인 홍릉(洪陵)의 능참봉으로 근무하면서 이왕직(李王職)과 조선총독부가 일본 궁내성의 눈치를 보며 세우기를 꺼려하던 석비(石碑)에 1922년 12월‘高宗太皇帝(고종태황제)’라는 명문을 새겨 건립해 당시 식민지 조선과 일본 양국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일본은 탄압할 경우 민족감정을 격화시킬까 두려워해 고영근이 새긴 석비는 그대로 두고 비의 뒷면에 다이쇼〔大正〕라는 일본의 연호를 새겨넣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러나 고영근은 동 사건으로 인한 심신쇠약과 천식으로 1923년 사망해 홍릉 인근에 묻혔다.

이처럼 한 시대를 불꽃처럼 살다간 우국지사 고영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물은 오늘날에도 홍릉 비각 안에 보존되고 있는 <고종 태황제와 명성황후의 석비> 외에 이번에 등록 신청되는 <호패와 명판>이 현재까지 유일하다. 또 이 유물들은 조선시대 호패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에서는 <고영근 호패와 명판>이 근대시기에 제작돼 현시점에서 지정문화재로까지 지정하기는 어렵지만 “대한제국이 재평가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고영근이라는 인물 자체가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고,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을 암살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홍능의 능참봉으로서 ‘고종태황제’라고 하는 비명을 새긴 고종황제의 석비를 세워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근대의 역사적 인물임을 적극 감안해 그와 관련된 유물을 등록문화재로 등록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의결했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1월, 고영근의 역사적 활동에 대한 보강 사료조사를 거쳐 이번에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로 등록 신청하게 된 것이다.

시는 고영근 호패와 명판이 등록문화재로 등록됨으로써 국민들이 조선 후기~대한제국~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격동의 근대사와 이 시기를 살아나간 역사적 인물들의 사상·활동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