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소리,세계에 전파한다!국립창극단 유영대 예술감독
한국의 소리,세계에 전파한다!국립창극단 유영대 예술감독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 이상정 인턴기자
  • 승인 2011.02.0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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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대중성, 거기에 미래까지 아우를 수 있는 힘이 소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문화투데이=이상정 인턴기자] ‘마지막으로 판소리를 들어 본게 언제인가요?’라는 질문에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통해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판소리의 슬픈 몰락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역마다 아파트가 올라가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판소리를 구경할만한 공터는 사라진지 오래. 그래도 “판소리는 죽지 않았다. 우리 소리는 여전히 힘을 내고 있다.” 국립창극단의 유영대 예술감독은 정부의 관심이 뜸한 판소리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판소리는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우리 것이자, 또 우리의 후손이 가지고 가야할 유산이라고 당당히 외치는, 열정이 흘러넘치는 반(半)소리꾼 유영대 감독의 소리 세계로 떠나보자.

▲ 유영대 예술감독

“제가 국문과 출신인데, 고전문학을 전공으로 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탈춤 동아리에서 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때문에 석사학위논문은 설화로, 그리고 박사학위는 판소리를 주제로 했지요. 모두 민속의, 혹은 민중적인 전통 문화연구잖아요? 아무래도 자주 민중적인 것을 접하고 또 생각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판소리, 창극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또한, 제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 80년대는 독재에 저항하는 민중적인, 민주적인 생각들이 대학을 휩쓸 때였어요. 자연스럽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형성됐고, 그런 물음에 답을 할 수 있는 게, 저 나름대로 민중의 전통적인 소리인 판소리였던 거지요.”

어떻게 판소리의 세계에 빠져들게 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유영대 감독은 막힘 없이 대답을 꺼낸다. 오히려 우리의 소리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있느냐는 반문에 할 말이 없어진다. 언제나 곧은 직관과 성실함으로 무장한 유 감독. 일반인들이 접하지 못했던 판소리와 국립창극단의 내력을 그의 청명한 설명으로 들어보기로 했다.

“사실, 판소리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민중의 사랑으로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거리의 소리였던 판소리가 양반층과 임금 앞에서 시연이 될만큼 폭넓은 인기를 누렸어요. 때문에 오늘날에 있어서는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적인 노래 장르가 될 수 있었던 거죠. 실제로 명창들의 후손들, 예를 들어 심수봉, 조관우 등이 현재 가요계에서 가수로 활동하는 것을 보면 판소리전통을 그저 옛날에 인기를 끌었던 죽어가는 노래로 치부하는 것은 잘못된 행태라고 생각해요.”

“1902년에 원각사라는 극장이 들어서고, 판소리가 무대로 올라가게 되면서 연극적인 요소를 지니게 됐지요. 그러면서 판소리의 무대적 변용이 이뤄져서 창극이 되었는데, 일본에서 들어온 신파적인 성격의 연극들과 비교해서 구파(舊派) 연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일제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창극 공연들이 인기를 끌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 거의 명맥이 끊기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전통 예술인 판소리와 창극 공연의 명맥을 되살려야 한다는 국악계의 염원을 담아 1962년에 국립창극단이 설립됩니다. 그러면서 다양한 창극과 판소리 공연들이 국립창극단 주최로 열리게 됐고, 끊어질 뻔 했던 창극과 판소리의 계보도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죠.”

과연, 유영대 감독은 해박한 지식으로 판소리와 창극에 대한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런데, 국문과를 나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문사(文士)였던 유영대 감독이 이렇게 국립창극단에서 감독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저는 원래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요. 제가 국립창극단에 취임하기 몇 년 전에 ‘지금과 같은 방식의 판소리 공연으로는 판소리가 살아남을 수 없다’라는 내용의 논문이나 평론을 학회지에 게재하는 등 여러자리에서 쓴 소리를 좀 하고 다녔었죠. 거기에 이전부터 공연에서 판소리 해설 등 여러 활동을 해왔었는데, 신선희 전임 국립극장장님께서 저를 눈여겨 보셨나 봐요. 그러다가 어느 날 저를 불러 ‘그렇다면 당신 방식대로 한 번 국립창극단을 변화시켜보라’고 저에게 예술감독 자리를 권유하셨어요. 그게 제 창극단 인생의 시작입니다. ”

▲ 유영대 감독이 국립창극단에서 감독한 작품 책자들

국문과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하던 유영대 감독. 그가 취임한 이후에 국립창극단의 공연들이 많은 혁신을 겪었다. 유감독은 그러한 변화를 우리만의 색깔 찾기라고 정의한다.

“이전의 국립창극단 공연은 수성반주를 기본으로 해서 공연됐어요. 그러다보니까 남자와 여자 소리꾼의 각각의 소리, 보통 ‘청’이라고 하는데요. 이 청의 기본음이 하나로 구성돼 있었어요. 그런데 이 기본음이 남자를 기준으로 하면 높은 음이고, 여자를 기준으로 하면 낮은 음이었는데, 그러다보니 남자 청은 높은 소리를 내기가 매우 어려웠고, 여자 청은 낮아져서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없었죠. 악기의 기본음이 고정된 상태에서 반주가 구성되기 때문에 그런 배려가 없었던 거죠. 거기다가 악기를 더 많이 배치해 확대시킨 정도에 지나지 않는 수성반주적인 편곡이 이뤄져서 판소리 감상에 도움이 되지 않았죠.”

수성 반주란 판소리, 민요를 할 때 악사들이 피리, 대금, 가야금, 해금, 아쟁 등의 악기로 명창의 소리 선율을 따라서 반주하는 것을 말한다.

“저는 작곡자에게 각 소리꾼들의 음역에 맞는 기본음으로 작곡과 편곡을 해달라고 주문을 했어요. 이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이 이용탁씨에요. 그렇게 해봤더니, 각 소리꾼들에게 호응이 대단했어요. 제 실력을 발휘하게 했으니까요.(웃음) 그러니까 이 작업을 서양식 가수의 영역에 맞춰보면 베이스부터 테너까지 모두 한 사람이 소리를 내던 걸, 베이스 부분, 테너 부분으로 나눠서 특화시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주 반발이 심했어요. 이전에는 곡의 흐름에 있어서 악기가 사람을 따라갔는데, 지금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악기가 각 소리꾼들에게 맞는 음역대의 소리를 조율해가면서 곡을 진행하기 때문에 소리꾼에 의해서 음악이 좌우되지 않아요. 게다가 지휘자를 보는 것이 판소리 배우에게 익숙하지 못한 부분이기 때문에 초기에는 트러블이 날 수 밖에 없었죠. 그렇게 만들어진 게 제가 부임한 이후 첫 작품이었던 <15세나 16세 처녀>입니다.”

▲ 창극 <십오세나 십육세 처녀> 공연 장면

우리 시대의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는 ‘우리 시대의 창극’을 만들겠다는 각오가 유영대 감독이 창극에 쏟아 붓는 지극한 정성의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의 처녀작 <15세나 16세 처녀>의 흥행은 국립창극단에 있어서 새로운 의미로서의 탄생을 가능케 했다. 그는 창극이 한국적 특성을 지닌 음악극이면서 보편적 음악극이라는 사실을 특히 강조했다.

국립창극단은 현재 세종류의 특화된 관객을 향한 공연을 제작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세 단계의 공연 형식으로 분류해서 공연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하나는 가장 대중적 취향을 지향하는 프로그램으로 <정오의 판소리> 공연이 있습니다. 다양한 판소리를 소개하고 설명하고, 다함께 같이 판소리 한 소절을 불러보기도 하면서 판소리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판소리를 완전한 형태로 공연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된 <완창 판소리> 공연이 있습니다.  <완창 판소리>는 최상의 무대에서 최고의 명창을 초빙하여 공연전판을 감상하려는 매니아층을 겨냥한 명품공연입니다. 인간 문화재나, 지방 문화재, 수상 경력이 화려한 문화재 등 완벽하게 인증을 받은 명창들을 모셔서 판소리의 고급화를 꾀하는 겁니다. 이 <완창 판소리>의 경우, 26년 간 진행됐던 시리즈이기 때문에 이 전통을 깰 수가 없어요.

다음으로는 국가브랜드로서의 창극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청>, <춘향2010>, <적벽> 같은 전통창극입니다. 국립창극단은 우리시대의 고전을 창극으로 제작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시집가는 날>, <산불> 등과 같은 주제의식이 분명하고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지닌 작품을 창극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재구성해 보았지요. 차범석 선생님의 연극 <산불>은 뮤지컬의 형식을 빌렸던 <댄싱 새도우>로 제작됐고, 우리 창극단에서는 창극 <산불>을 공연했습니다.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작품을 통해서 현대에 걸맞는 창극의 방향을 모색하는 거죠. 즉, 이전부터 내려오는 전통성을 유지하면서, 판소리 본연에 맞는 대중성을 획득하고, 거기에 신(新)시대에 맞는 판소리, 창극 공연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국립창극단의 목표입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창극과 판소리의 발전을 꾀하는 국립창극단과 유영대 감독. 한편, 유영대 감독의 처녀작인 <15세나 16세 처녀>를 바탕으로 한 국립창극단의 국가 브랜드 <청(淸)>이 있는데, 야심과 함께 실천적인 계획으로 무장한 국립창극단의 국가브랜드는 외국으로 얼마나 진출했을까? 

▲창극 <청> 무대 인사 장면

“여러 번 해외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음에도 안타깝게 그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공연의 덩치가 큰 탓도 있지만, 문화부의 관심과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어요. 이러한 미비한 지원의 근저에는 문화부의 무관심 탓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감독을 맡고 있는 5년 동안 문화부 장관이 국립창극단의 공연을 본 경우는 단 한번이에요. 문화부에서 우리 전통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아, 많이 아쉽고 한탄스럽습니다.  개인 자격으로, 개인의 능력으로 판소리가 세계에 나간 경우는 상당히 많아요. 그런데 창극이나, 대형 공연 규모의 판소리 공연이 외국에 나간 사례가 드물지요. 제가 답답해서 국가브랜드 위원회에 직접 찾아가서 말씀을 드리기도 했는데 전혀 효과가 없네요.(웃음)”

그의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기자인 나뿐일까? 사실, 작년에 유영대 감독이 충무아트홀에서 기획연출한 공연 <산대희>나 남산국악당에서 올려졌던 <허생전>같은 소규모 공연을 해외로 진출시켜본다면 참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크기가 작기 때문에 일단 비용 면에서 부담이 적고, 공연 당시 호응이 좋았다는 실적이 함께한다면 충분히 외국에서도 한국적인 소리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 감독의 안타까움이 실린 목소리를 들으며 대학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극과 뮤지컬에 대한 지원은 그리도 많으면서, 창극과 판소리라는 우리 고유의 공연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야 어떻게 한국만의 특색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유감독은 사방이 어두워진 밤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가 최근에 기획해 한국의집 무대에 올린 가무악극 공연 <몽유도원도>의 경우, 유 감독이 국립창극단에서 시도한 많은 변화들이 집대성한 최신의 창극 공연으로, 외국 관객을 겨냥한 작품이다.

“제가 가무악극 <몽유도원도>를 기획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그동안 국립창극단이 성격을 새롭게 변화시켜오면서 거쳤던 시행착오를 거울로 삼아 제대로된 가무악극을 만들어보자는 거였어요. <몽유도원도>는 오페라 형식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으로만 작품을 구성하였고, 일본의 음악극인 가부키의 양식도 참고하여 제작했습니다. 대단히 실험적으로 한 작업인데 관람해 주신 많은 분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궁정의 아름다운 색채를 속속들이 살펴보시고 칭찬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외국인 관객들 또한 ‘한국에 이런 멋진 무대 공연이 존재하는구나’라고 평가해 주셔서  우리의 판소리, 우리의 창극이 세계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칭찬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요. <몽유도원도>를 하면서 우리의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실험적인 부분을 많이 도입했는데, 외국 관객들에게 이 부분이 한국의 오랜 전통음악극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했다는 비판도 있었고, 극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는 비판도 있어서 아직도 수정하여 무대화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창극에 대한 소신을 밝히고 있는 유영대 감독

 열악한 상황에서도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이뤄내는 유영대 예술감독은 우리의 판소리, 창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창극을 제대로 공연할 수 있는 극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양의 무대와는 다른 한국의 소리에 맞는 무대가 형성돼야 판소리나 창극이 제대로 공연을 해나갈 수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더하여국립극장에서는 뮤지컬이나 외국작품을 무대에 올려서는 안되고, 한국의 민족극, 전통음악극을 일년내내 공연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 나쁘지 않다. 유영대 감독의 불평은 누군가 해야 하는 뼈아프지만, 즐거운 충고다. 그의 말처럼 국립극장은 우리나라의 민족극,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공연을 해야 한다.

“국립극장은 말 그대로 우리나라의 극장이잖아요. 그렇다면 당연히 나라를 상징하는 공연을 해야지요. 국립극단에서 공연한 <오이디푸스>같은 작품도 좋은 작품이지만, 국립극단이 제2의 창단을 기념하는 작품으로 선정한 것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있어야 했다고 봅니다. 명동 국립극장의 무대에서 제대로 된 한국의 창극을 공연한다면, 제가 앞에서 말한 해외진출은 대단히 쉽게 이뤄낼 수 있을 겁니다. 국립극장의 역할은 한국의 공연을 살려내는 거니까요.”

유영대 감독의 거침없는 말을 들으니, 문득 그에게 한국 전통음악의 생로(生路)를 묻고 싶어진다. 유영대 감독이 생각하는 앞으로 한국음악과 전통음악극이 나아가야 할 길은 어떤 것일까?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는 국악을 대표할 수 있는 스타들을 육성해서 국악의 인지도를 다시 끌어올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기교에서 그치지 않는, 자질이 있는 국악인을 육성한 다음, 그 배우에 걸맞는 무대를 구성하고, 거기에 제대로 된 지원이 선행적으로 이뤄져야지 국악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예술로서 국악에는 위대한 선인들의 예술에 대한 대단한 폭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이 지금까지 5,000 년 동안 쌓아 온 예술들이 총 집대성 됐다고 생각하니까요.

때문에 저는 이전까지 행해졌던 개인차원의 후원이 아니라 정부가 거시적 안목으로 정책적으로 후원을 통해서 국악이라는 예술의 향유층을 두텁게 쌓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기본적으로 정부차원의 진정성있는 정책에 기반한 프로젝트가 선행돼야 합니다. 그러한 지원이 몇 년에 걸쳐서 프로젝트로 펼쳐지고 난 후에는 다시 국악의 발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명동예술극장이 영국과 같이 유서깊은 나라의 왕립극장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민족음악극을 공연하는 전문극장이 됐으면 한다는 겁니다. 영국은 왕실극장에서 세익스피어를 공연하지요. 일본의 국립극장에서는 가부키를 공연하고, 중국의 국립극장에서는 경극을 공연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우리 민족극, 우리 판소리와 창극을 위한 전용극장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일본은 1960년대에 세계로 진출하면서 토요타 차의 광고에  ‘노’ 가면을 이미지로 들고 나왔다. 우리는 2000년 자동차 광고에 블록버스터 영화 패러디로 세계 시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첨단, 혹은 최신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첨단의 이미지도 좋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문화의 굳건함을 내세우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만약 우리가 우리의 판소리와 같은 전통 문화를 앞세워 세계로 나아갔다면 지금과는 확실히 차별화 된 한국의 이미지가 형성됐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 감독의 안타까움 섞인 말들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유 감독은 이날 어느덧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돼 버린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이것이 나의 한국음악극 발전을 위한 각오다’라는 든든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의 목소리는 단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의 목소리가 아니라, 국악계 모든 이들의 목소리를 모은 것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해외에서 한국 하면 ‘아 판소리’라고 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할 것”이라는 그의 다짐을 보면서 낡은 대문인줄 알았던 국악이라는 장르가 여전히 튼튼하고, 또 언젠가는 번쩍번쩍 빛을 내며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일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