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화재 3년, 그 참사와 새로운 시작
숭례문 화재 3년, 그 참사와 새로운 시작
  • 서울문화투데이 특별취재팀
  • 승인 2011.02.21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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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은 국가의 보물 중 첫째 아닌, 한국인 마음 속 보물 중 첫째

[서울문화투데이=특별취재팀] 2008년 2월 10일, 대한민국은 ‘국가의 보물’ 그 첫 번째를 잃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숭례문의 소실을 안타까워했고, 3년이 지난 지금도 숭례문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씁쓸해하고 있다. 숭례문의 소실은 단순히 문화재의 상실이 아니라, 서울을 대표하고, 한국의 역사를 대표하는 상징물을 잃은 것과 같았다. 때문에 서울시와 정부가 숭례문 복원작업을 행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민심 이전에 나라의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이다. 

▲ 화재 이전 숭례문의 당당한 모습

그런 의미에서 지난 2월 10일 3년 만에 공개된 숭례문 복원공사의 현장을 보면서 장인들이 석재·목재며 부재들을 전통 방식대로 정성스레 다듬고 나르는 모습을 본 국민은 나름대로 위안을 받았을 듯 싶다. 시뻘건 불기둥 속에 국보1호가 순식간에 숯더미로 변한 참화의 순간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내년 말 제 모습을 되찾을 숭례문 복원 작업은 40%의 공정을 마쳤다. 선대의 혼과 숨결을 담아 600년간 이어지다 어이없이 소실된 수도 서울의 대표 아이콘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한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할 것이다.

문화재의 복원은 단순한 외양만의 되살림이 아닌 정신의 부활이다. 돌아보면 숭례문 소실 이후 정부·당국의 대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시민들의 반발에 아랑곳없이 서둘러 가림막을 치더니 굴착기로 현장을 파헤치고 심지어 불탄 부재들을 폐기물처럼 내다버렸다. 가리고 치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소중한 것들을 눈곱만큼도 여기지 않은 행태들이다.

▲ 숭례문 화재 당시의 현장 모습

조상의 혼이 담긴 문화재는 당대의 소유물에 국한하지 않는다. 잘 지키고 챙겨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중대한 자산이다. 국보1호를 지키지 못한 수치도 모자라 2차 훼손을 저지르고 방치한 죗값이 크다 할 것이다.

지난해 터진 광화문 현판 균열과 엉터리 국새 파문은 국민의 자존심을 구기고 멍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팽개친 졸속 복원과 무리한 제작이 남긴 앙금과 후유증은 막대하고 진행 중이다. 그래서 국민은 숭례문의 온전한 복원에 더 큰 정성과 기대를 쏟는 것이다. 남은 60%의 공정은 훨씬 더 세심한 공을 들여야 하는 것들이다. 복원 3개월 만에 금이 간 광화문 현판의 부끄러운 답습은 돌이킬 수 없는 원망과 망신을 살 것이다. 무리한 되살리기가 아니라 한 부분 한 부분을 완벽하게 되살린다는 마음부터 다시 다잡아야 할 것이다.

왜 숭례문이 불타야만 했을까?

숭례문 화재를 진압하는 데 5시간 이상이 소요되면서 화재 초기 소방 당국과 문화재청의 대처가 문제가 있었다는 논란이 있다. 또한, 숭례문 내에 배치된 소화기가 1,2층에 나눠 배치되고 상수도 소화전이 설치된 것과 사설 경비 업체의 무인 경보 시스템에 의존하였으며, 화재 감지기, 경보 설비 등은 전혀 없었다는 점도 화재 예방의 취약점으로 드러났다. 소방당국은 초기 진화 과정에서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점을 고려해서 신중한 진압작업을 펼쳤으나 정확한 발화지점을 찾지 못하고 소화 약재를 뿌리는 등 결국 초기 진압에 실패했다. 또한 숭례문의 문화재 보험금이 9500만 원밖에 되지 않아, 개방을 했음에도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숭례문을 개방한 서울시청과 중구청에 대한 이 사건의 책임 비판이 있다. 2004년 5월 27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숭례문 개방을 공약했으며 문화재청의 부정적 견해를 무시하고 공사를 해 2006년 6월 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했다. 이러한 숭례문 개방 사업이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중요 치적으로 선전됐다. 2008년 초부터는 무선용역경비 업체인 KT텔레캅이 경비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방화범의 접근이 용이했던 이유라고 비판을 받고 있다. 2005년부터는 삼성 에스원에게 유료로 맡겨오다가, 예산절감을 이유로 2008년 1월 문화재 지킴이 캠페인으로 무료경비를 자처한 KT텔레캅측으로 경비를 넘기며 경비인원과 경비재 및 경비횟수가 대폭 감소했다.

▲ 화재로 넝마가 된 처마 모습

한편, 화재 진압 중이던 오후 11시 5분쯤 숭례문에 걸려있던 현판은 소방관들이 톱으로 현판을 떼어내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뜨거운 열기로 현판은 뒤틀렸다. 뿐만 아니라, 현판을 절단하면서 지면으로 떨어뜨려 현판 전체에 크고작은 금이 가고 일부 파편이 유실되는 등 심하게 손상됐다.

이에 대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그 해 2월 12일 국무회의를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 "파괴돼도 좋으니까 진화하라"고 소방방재청에 위임했었음을 밝혔다. 현재 문화재 관리책임은 지자체 즉 이 사건에서는 서울시청에 있지만 지도 감독 및 지원은 문화재청의 책임임을 인정했다. 결국 유홍준 전 청장은 은 2월 1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숭례문 화재 사건을 책임을 지고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찾지 못한 점, 그리고 화재 진화에 필수적인 실측 도면이 화재 발생 2시간 후에야 소방당국에 전달된 것 등 총체적인 문화재 방재시스템이 전혀 구비되지 않았던 점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서울시청과 중구청이 문화재청의 부정적 견해를 무시하고 2006년 6월 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하면서도 오히려 예산절감을 이유로 경비인원과 경비재 및 경비횟수를 대폭 감소하면서 관리시스템은 제대로 구축하지 않았던 점 등에 대해서도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더 가관인 것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국민성금으로 복원하자고 제안했으며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국민 모금운동을 전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아쉬울 때마다 국민에게 손을 벌리냐"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숭례문 복원,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숭례문이 참사를 겪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던가. 화재에 의한 피해가 문루 2층의 90%정도와 1층의 10%정도에 그쳐 문화재위원회 회의결과 홍예문과 석축이 온전하고 문루 1층도 90% 이상 남아있어 국보 1호로써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여론조사에서도 국민 대부분이 숭례문의 복원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현재는 숭례문이 어느 정도 복구가 됐는지 알 수가 없다. 특히나 현재 길을 가다 보이는 숭례문은 덧집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궁금증에 대해 문화재청 숭례문 복구단 조규형 관리감독은 “현재 덧집에 싸여있는 이유는 문화재 보호 차원이다. 아무래도 목재이기 때문에 비, 바람도 피해야하고 상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지, 복원과정을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매주 주말에 관람객들을 위해 개방하는 시간도 갖고 있다.”며 덧집으로 복원 공사 현장을 가릴 의도가 없었음을 밝혔다. 한편, 문화재청은 2008년 8월부터 숭례문 복원 현장을 일반에 공개해, 공개가 얼마나 진척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화재로 붕괴한 국보 1호 숭례문의 원형 복원에는 2~3년가량이 걸리며 예산은 200억 원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숭례문의 주요 부분들이 불에 탔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재현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의 하나로 2006년 숭례문의 실측 도면을 작성해두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원형 복원은 가능한 상황이다. 복원 사업은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서울 중구청 주도로 진행될 예정이다. 숭례문은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복원하고자 지난 1961년~1963년 한차례 대규모 해체, 보수공사를 거친 바 있으며 이후에는 소규모 정비공사가 진행됐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에 숭례문 양측의 성벽이 잘라내 성곽 문루가 당당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고립됐다며 이번 복원 과정에서 숭례문에 양 날개의 성벽을 달아주는 방안과 원래보다 약 1.5m 정도 올라와 있는 지표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서울시와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복원에 쓸 수 있는 대형 국산 금강 소나무의 확보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며, 이를 안전히 사용하기 위해 건조하는 데만도 3년이 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최소기한을 5년으로 보고 있다. 잔해상태의 확인과 이의 재활용 여부, 그리고 건축에 사용된 나무의 수령과 재질, 사용연장 등의 조사에도 장기간 소요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당장의 추가붕괴와 훼손을 막기 위해 덧집을 씌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서 전통양식을 따라 숭례문이 복원 과정을 거치게 됐으며, 2월 10일 숭례문의 복원과정이 공개될 때까지 덧집을 씌우게 된 것이다.

▲ 전통기법을 통해 목재를 다듬고 있는 숭례문 복원 현장 모습

전통 양식을 따라 숭례문을 복원하기로 결정한 이후, 성벽을 쌓을 돌은 재질이나 색상이 비슷한 경기 포천석을 쓰며, 현판은 원형 보존에 이상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2009년 5월 복구 작업을 마치고 보관중이며, 복원이 마무리 된뒤 다시 내걸기로 했다. 복원공사도 중요무형문화재인 석장 이의상, 이재순, 대목장 신응수, 단청장 홍창원, 번화장 이근복, 제와장 한형준 등 장인들을 동원해 최대한 옛방식에 따르고 있다. 현장에 목공소와 대장간을 만들어 필요한 전통작업도구를 아예 새로 만들어 쓰고 있다. 거기에 아예 전통방식으로 구운 기와를 제조해, 숭례문의 본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숭례문 복원, 과연 옳은 일일까?

문화재 곧 문화유산이란 옛 선인들의 외형적 삶의 모습 뿐 아니라 그 혼이 담겨져 있는 유산이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그들의 삶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를 얻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정신적 가치와 심미적 가치를 바라보면서 문화적 자부심을 얻거나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기도 하며 미래문화 창조의 거름으로 삼는다. 문화유산을 보존해야할 의미가 여기에 있다.

그런 면에서 소실되기 전 숭례문은 매우 귀중한 문화유산이었다.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의미 이전에 당대의 건축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실물적 가치와 그 시대의 사회를 지탱하던 사상과 이념 및 조선건국의 이상을 담고 있다는 정신적 가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유산이었다. 그것을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잃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 숭례문을 복원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숭례문은 과거의 유산일 뿐이고, 그것을 복원해 낸들 14세기의 유물이 아닌 21세기의 신건축물일 뿐’이라는 지적이 그들의 논지다. 하지만, 이들은 숭례문이 지니는 상징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숭례문 복원 현장서 발견된 건축 당시의 바닥 모습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숭례문이 지니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는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지 가능한 것이다. ‘이미 전소된 것이기 때문에 복원은 의미없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화재가 지니는 상징성이 어디서 나오는 지를 까먹고 있는 부분이다. 숭례문은 14세기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에서 국가의 흥망성쇠와 민족의 영쇠(榮衰)를 지켜봤으며, 그 기간동안 사람들은 숭례문이 있던 자리에 숭례문이 존재함을 알고 개인의 고난과 사회의 혼돈을 견뎌낼 수 있었다. 때문에 한번 불타버렸던 숭례문일지라도 존재해야 한다. 새롭게 지어진 숭례문은 그 나름대로 다시 의미를 부여받고 서울과 우리의 상징으로 존재할 수 있다.

한편, 이런 태도에 대해서 다시 ‘굳이 숭례문이 아니어도 되지 않느냐’라는 의견을 내는 사람도 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 굳이 전통 운운하며 현대적인 미(美)를 버릴 필요가 있느냐는 뜻인데, 그것은 정말 옳지 않은 태도다. 숭례문은 전통이자, 우리의 역사다. 우리는 숭례문을 보면서 국가의 역사와 기원을 생각해낼 수 있다. 즉, 숭례문은 전통의 상징물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현대화, 서구화가 이뤄지고 있는 지금, 오히려 숭례문은 반드시 세워져야 할 건축물이다. 저번에 치러진 한일 친선 축구경기에서 우리나라 응원단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마찬가지로, 좀 더 좋은 것, 더 편한 것을 외치며 미래만 보며 사는 사람들에게 미래는 오지 않는 법이다. 과거와 역사를 기억하는 상징물로서 숭례문은 충분히 의미를 시민들에게 부여한다.

숭례문 복원 잘 되고 있는 걸까?

앞부분에서 지적했다시피 현재 숭례문 복원 사업은 2012년 2월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작은 공사를 진행하더라도 많은 잡음이 발생하는 법이다. 숭례문 복원 공사도 마찬가지이다. 공사를 진행하면서 다양한 부분에서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한 문제점은 복원의 기술적인 견해 차이에서부터 복원 자체에 대한 의문까지 아주 다양하다.

우선, 기술적인 부분의 경우 숭례문과 이어져 있는 담장이 복원 전에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는데 복원 과정에서는 직선으로 세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 선조들의 전통적 선(線)의 양식을 공기에 맞추느라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숭례문의 복원에 들어가는 나무의 품종이 이미 밝혔다시피 금강 소나무로 품종이 희귀해 수량을 맞추기 어렵다는 것 또한 복원에 있어서 문제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복원 이후의 관리에 관한 문제다. 현재는 ‘복원’이라는 대명제에 가려져 있어 점점 잊혀져가고 있지만, 화재가 났을 때 정부의 문화재 관리 및 대응이 얼마나 소홀했는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숭례문의 복원과 함께 선행되야 할 숭례문의 관리 및 보존 대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숭례문은 복원이 되었을 지라도 다시 불타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황평우 문화유산 정책 연구소장은 “숭례문 복원 예산이 증액됐다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항상 의문이 든다. 숭례문에 화재가 재 발생했을 때를 대비해 확보해 놓은 진입로는 여전히 2차선으로 소방차들이 들어오기 어렵다. 거기에 복원에 사용되는 금강송들은 관리부실로 갈라지고 있다. 예산이 아무리 늘어나도 보여주기 식으로 복원을 행한다면 진정한 의미로서의 숭례문 복원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황평우 소장의 지적은 숭례문 복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금석이 될 말들이다. 황평우 소장은 숭례문을 겉모습만 복원하고 사후관리에 대한 적절한 계획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애써 복원한 숭례문 또 덧없이 사라질 수 있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리에 대해서 제 2의 문화재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 숭례문 복원에 덧붙여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이 얼마전 모 매체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절대로 서두르지 말라'는 것과 '완결이라는 인식을 버리라'는 두 가지다. 김 회장은 “문화재의 복구와 관리는 1년, 2년 사이에 완성되는 문제가 아니라 수 십년에서 수 백년 동안 지속되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복구할 것은 복구하되 미래를 예측한 장기적인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숭례문의 경우 지하철의 잦은 진동과 자동차 매연, 대기 중의 먼지 등 위험한 환경에 상시 노출돼 있다. 주요 자재인 석재·목재·기와·단청·석회 등은 상당히 약한 재질이다. 때문에 변화가 예상되는 재질을 지속적으로 체크해 복구 이후의 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또한, 숭례문 복원 이후 개방에 있어서도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숭례문 화재 당시 숭례문은 민간 경비업체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는데, 그런 경비가 아닌 정부에서 직접 관리를 시행해 안전과 화재에 만반을 기해야 한다.  그러한 책임의식이 뒷받침 된 후에야 비로소 숭례문의 복원이 완료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시금 우리의 상징으로 숭례문을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숭례문을 통해 우리의 내일을 다짐하라!

숭례문 복원 현장을 둘러보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육축 가운데의 무지개 모양 통로인 홍예(虹霓) 앞 양쪽을 약 1.6m 깊이로 파놓은 것이었다. 조선 초기 숭례문 창건 당시의 지반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의 1.6m 아래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화마가 덮치고 간 숭례문을 다시 복원하기에 앞서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이미 육축 주변 800㎡를 파헤쳐 현재 지표면의 1.6m 아래에서 숭례문 창건 당시 바닥에 깐 육축 기초 지대석과 홍예의 대문이 열리고 닫히도록 문짝의 문설주를 꽂아 지지하는 바닥돌인 문지도리석을 발굴한 바 있다. 아울러 그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육축석재 1~2단을 다시 발굴해 숭례문의 본래 높이가 3년 전 화재 당시의 6.4m가 아니라 창건 당시엔 8m임을 밝혀냈다. 600여 년의 세월 속에서 자연스레 흙이 쌓이기도 하고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을 겪으면서, 또 일제가 새로 길을 내는 과정 등에서 1.6m가 높아진 것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단순히 흙의 퇴적이 아니라 우리의 본바탕마저 잊게 만든 부끄러운 내면의 퇴적이었다.

화마를 겪고 벌거벗은 숭례문이야말로 우리 마음의 ‘그라운드 제로’다. 내년 말이면 숭례문은 다시 예전의 의젓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멋지게 복원될 숭례문의 외양만이 아니라 그 숭례문이 600여 년 전 세워진 본래의 밑바닥을 잊지 말고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 바닥에 우리의 얼굴이자 국보 1호인 숭례문의 초심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바닥을 치면 강해진다. 그 바닥으로 내려가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출발할 일이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숭례문을 외적 형상으로만이 아니라 내적 진정성으로 우리 안에 복원하는 마음의 자세가 될 것이다.

2009년에 역시 불로 전소됐던 여수 향일암이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제 모습을 찾았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는지 생각해 본다면, 숭례문의 복원이 왜 중요한 일이자,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자명할 것이다. 말 그대로 ‘나라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유형문화재들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준다. 거기에 항상 사람들 눈에 보이며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던 국보인 숭례문은 오죽했으랴. 숭례문이 겪고 있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유형문화재가 잘 보존되고 있는지 알고,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