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와 학봉, 4백년만의 합의
서애와 학봉, 4백년만의 합의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09.04.13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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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와 포용의 미덕은 역시 아름다워

 ‘병호 시비’는 영남지방의 웬만한 식견있는 자들은 다 아는 유명한 시비였다. 서애 유성룡을 모시는 병산서원의 ‘병’자와 퇴계 이황을 모시는 호계서원의 ‘호’자를 따 ‘병호 시비’로 명명된 이 다툼은 무려 400년 동안이나  계속돼 왔다.

 내용인즉, 1573년 조선 선조 때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스승을 기려 안동에 세운 호계서원 사당에 퇴계 선생을 중심으로 왼쪽에 누구의 위패를 모시느냐를 놓고, 유성룡의 풍산 류씨 문중과 학봉 김성일의 의성 김씨 문중이 자존심 대결을 벌여 온 것이다.

 조정의 서열로 보아 삼정승 중 영의정 다음이 좌의정, 그 다음이 우의정이므로 위패 봉안 순서도 왼쪽을 더 높게 봤던 것이다.

▲ 권대섭 대기자
 풍산 류씨 문중과 서애(유성룡)의 제자들은 영의정을 지낸 서애를 당연히 왼쪽에 모셔야 한다며 벼슬 서열로 따졌다. 반면 의성 김씨 문중과 학봉(김성일)의 제자들은 나이와 학문으로 따졌다. 벼슬은 서애가 더 높았지만 학봉이 나이가 많았고, 학문으로 보아 그를 왼쪽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동 유림의 대표적 세를 이룬 두 거물 문중의 신경전은 1800년대 초까지 결론을 못 본 채 계속됐다고 한다. 이후 서애의 위패가 병산서원으로 옮겨가면서 시비는 일단락 됐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 후로도 200년 동안이나 영남 유림계와 안동 사회에서 화제거리로 회자되며 오늘날까지 숙제로 남아 있었다. 필자도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은 바 있어 흥미있게 생각해 왔다. 그러던 것이 최근 마침내 문제가 해결됐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안동시가 대원군 때 철폐한 호계서원의 사당을 복원키로 하면서 퇴계 주손이 서애와 학봉 두 가문의 종손과 함께 극적인 합의를 이루어 냈다는 것이다. 복원될 호계서원의 위패봉안 순서를 당시 벼슬 서열에 따라 서애 유성룡을 퇴계 왼쪽에, 학봉 김성일을 퇴계 오른쪽에 모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퇴계를 중심으로 ‘좌 서애 우 학봉’의 위패 배치가 400년 만에 결론을 본 것이다.

 400년 동안 두 가문이 자존심 다툼을 벌여 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되겠지만, 발상을 바꾸어 해결책을 찾은 현대 후손들의 지혜와 포용력도 역사와 어우러져 더 서사적인 느낌을 준다. 놀랍고 재미있는 스토리로도 손색이 없으며, 우리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될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차제에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필자의 집안에 내려오는 묵은 숙제도 풀어졌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필자의 생가 집 직계 선조되시는 임란 의병대장 권응수 장군(1546~1608) 후손들의 ‘종통 시비’가 그것이다. 권장군의 세부인 중 문화 유씨 소생의 후손들과 후부인 창녕성씨 소생의 후손들이 400년 동안 큰 집이니 작은 집이니 하며 세보(世譜)상의 다툼을 벌이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지금은 잊혀져 간 사연이 되어왔지만 한 때 영남 각 가문에서 화제 거리로 회자되던 이야기 중의 하나였다. 권응수는 바로 학봉 김성일이 임란을 맞아 경상우도 초유사로 활동할 때 그 활약상을 듣고, 경상좌도 의병대장에 임명한 인물이다. 그는 경상좌도 각 군 · 현에서 일어난 소규모 의병들을 영천에서 연합하고 통솔해 전국에서 제일 먼저 영천성을 탈환했다. 두 달 뒤엔 경주성까지 되찾음으로써 나라를 구한 명장이 되었다. 이런 인물의 후손들이 수세기 동안이나 골육간 반목을 벌이는 것은 가문의 수치이며 조상을 욕보이는 것이다. 병호 시비의 극적인 합의를 보면서 느끼고, 깨달으며 부러운 바가 있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 집 문제를 들추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