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비애 왕후의 사랑...5백년 세월을 넘다
왕의 비애 왕후의 사랑...5백년 세월을 넘다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09.04.1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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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단종비(端宗 妃) 정순왕후 추모문화제

정순왕후(定順王后) 송비(宋妃)는 누구? 

1440(세종 22)∼1521(중종 16)년까지 살다간 조선 제6대왕 단종의 정비로서 비극적 인생을 살다간 여인이다.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부사 계생(繼生)의 증손녀이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복원(復元)의 손녀이며, 판돈령부사 현수(玹壽)의 딸이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며 효우(孝友)가 있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간택되어 이듬해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왕비 책봉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애초부터 실권이 없는 어린 왕의 왕비가 됐던지라 행복지수가 높지 못했다. 14세 동갑에 혼인해 불과 4년 뒤인 17세에 단종을 여의었으니, 제대로 부부생활을 했을 리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단종에겐 권빈과 김빈이라는 ‘숙의’지위의 후궁까지 있었다. 

  단종이 죽은 후엔 비구니 스님으로 정업원과 청룡사 등에서 지내게 된다. 81세가 될 때 까지 60년 동안 청룡사 동쪽 산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동망산의 전설’을 낳은 것이다. 자주동천(紫芝洞泉), 동정곡, 여인 시장 등의 유적과 사연이 지금까지도 전하고 있다. 

제2회 단종비(端宗 妃) 정순왕후 추모문화제
4월 24일~26일, 동망봉 · 청령포 일대서 진행

조선 6대왕인 단종(端宗, 1441~1457) 임금을 60여년 동안 그리며 홀로 살다 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 절개와 충절을 기리는 ‘제2회 단종비 정순왕후 추모문화제’가 오는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종로구 숭인동 동망산 일대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열린다.

 영월에서 40년째 열고 있는 단종 문화제와 연계해 종로구가 지난해부터 열기 시작한 정순왕후 추모문화제는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잃고 비운의 삶을 살다간 송씨 왕후를 기념하는 행사다. 왕후가 81세까지 살며, 남편의 명복을 빌다 떠난 1521년(중종 16년)으로부터 488년만의 일이다. 

 3일 동안 진행될 행사 첫날인 24일(금)엔 숭인동 동망산 일대에서 추모제(오후 2시)와 함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TTL무대에선 정순왕후 선발대회(오후 6시)가 열린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열리는 선발대회다. 정순왕후를 추모하는 문화제 행사 전 기간 동안 송씨 왕후 역할을 해야 할 주인공을 뽑는 대회다. 서울시내 고등학교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참가신청을 받아 정순왕후 외에 단종의 후궁인 숙의 권빈과 숙의 김빈도 함께 뽑는다. 미모와  연기력을 겸비한 여고생을 뽑는데, 정순왕후에 선발된 학생에겐 200만원, 권빈과 김빈에 선발된 학생에겐 각각 100만원의 상금이 지급된다. 또 예절맵시와 충효 · 인기상 부문 학생도 선발해 50만원의 상금을 준다. 조선시대 왕비 간택 절차를 재연해 진행될 왕후 선발대회를 축하하는 화관무 공연과 퍼포먼스도 있을 예정이다. 정순왕후에 선발된 학생은 행사기간동안 왕후 행차시 정순왕후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또 단종이 유배됐다 목숨을 잃은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서 연출할 ‘단종-정순왕후’ 해후장면에서도 연기력을 보여야 한다.

▲ 지난해 열린 제1회 정순왕후 추모제 때 단종과 왕후가 청계천 영도교에서 이별하던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둘째 날인 25일엔 정순왕후 영도교 가례행차(오후 2시, 청룡사~청계천 영도교)와 정순왕후-단종의 영도교 이별 재현(오후 3시 30분)이 청계천 영도교 일원에서 이루어진다. 영도교는 청계천에 있던 다리로서 그 옛날 단종이 영월로 유배가던 길에 송씨 왕후의 마지막 전송을 받은 곳이다. 지금은 청계천 복원에 따라 현대식 다리로 놓여져 있다.

 행사 마지막 날인 26일 오후에는 드디어 영월 청령포에서 단종과 왕후가 해후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영월 외진 곳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단종의 외로운 영혼과 남편을 잃고 고통스레 살아간 정순왕후의 영혼을 달래주려 행사 주최측에서 기획한 것이다. 이밖에 행사기간 동안 대학로와 동망산 일대에서 △정순왕후 도전골든벨 △소원 풍선날리기 △전통공연 마당 △정순왕후 자료 전시회 △정순왕후 역사유적지 문화탐방 △천연염색 체험 △왕과 왕비 포토존 △궁중음식 맛보기 및 여인시장 장터 설치 등의 이벤트들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권대섭 대기자 kds@sctoday.co.kr

동망봉이라고도 불린다. 정순왕후가 동쪽을 향해 통곡했다하여 유래됐다. 정업원 옛터와 청룡사에서 10분 정도 언덕으로 걸어 올라간다. 영조 임금이 썼다는 ‘東望峰’이라는 글자가 봉우리 바위에 있었으나, 일제시대부터 광복후까지 채석장이 되면서 바위를 깨는 바람에 흔적없이 사라졌다. 산의 양쪽 기슭에 청룡사와 정업원 옛터, 보문사, 묘각사, 밀인사 등의 사찰이 있다.

청룡사(靑龍寺)-유서 깊은 비구 스님들의 도량
옛 정업원 터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비구니 절이다. 정순왕후와 자손이 없는 왕실의 후궁들이 출가하여 비구니로 살았던 절로 유명하다. 동북쪽 고개너머에 있는 보문사 보다 43년후에 세워졌으므로 ‘새절승방’이라고도 불렀다.

정업원(淨業院)-임금의 여인들이 모여 살던 여승방

후궁들도 임금이 일찍 죽어버리면 갈 곳이 마땅찮았다. 아들이 있는 후궁은 늘그막에 아들을 따라 궁밖에 나가 살 방도가 있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은 여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이런 여인들과 왕실의 과부들을 위해 세워진 절이 바로 정업원이었다. 고려 공민왕의 후비 안씨가 정업원의 첫 번째 주지였고, 조선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목숨을 잃은 방석대군의 부인이었던 심씨가 두 번째 주지였다고 한다. 정순왕후도 이 정업원의 주지로 평생을 보냈다.

영조 임금과 동망봉(東望峰)-사라진 세 글자
조선 후기 영조 47년(1711)에 임금이 동대문 밖 연미정동의 정업원에 들렀다가 단종비 송씨 부인의 옛일을 물었다. 전 참판 정운유가 불려 와서 말하기를 세조가 송씨의 의지할 곳 없음을 측은히 여겨 성안에 집을 마련해 주고자 했으나 송씨가 동대문 밖에서 동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에 거처할 것을 원했으므로 재목을 내려 집을 꾸민 것이 정업원이라고 했다. 영조 임금은 이에 친히 청룡사 자리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게 하고, 또 동망봉(東望峰)이란 글자를 써서 정순왕후 송씨가 올랐던 바위에 새기게 했다.

자지동천(紫芝洞泉)-자줏물 옷감들여 생계를 잇다
마침 동망산 계곡 곳곳에는 자줏빛을 띠는 풀인 자초(지초, 아어초, 자단)가 많았다. 옷이 닿기만 해도 자줏물이 드는 약초였다. 왕비와 시녀들은 상인들로부터 받은 옷감을 화강암 바위 밑에 흘러나오는 샘물에 빨아 물 들인 뒤 그곳 바위들에 널어 말렸다. 예쁜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이 만들어졌다. 왕후와 시녀들은 이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하여 지금의 창신 3동과 숭인 1동을 이룬 동망산과 낙산사이 골짜기를 자줏골, 또는 자주동이라 불렀다.

여인시장-남성 출입 금하던 여인들만의 채소시장
동망봉 남쪽 동묘 건너편 숭신초등학교 앞에 ‘여인시장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곳은 정순왕후를 동정한 인근의 여인들이 ‘금남의 채소시장’을 열어 왕후에게 신성한 푸성귀와 먹을 거리를 공급하던 역할을 했다는 곳이다.

영도교(永渡橋)-단종,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
광진나루와 송파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들어오던 관문에 해당하는 다리였다. 청계천 중 · 하류에 있는 다리로서 백성들의 통행량이 많았다. 영월로 유배가던 단종이 이곳까지 전송나온 정순왕후와 최후의 이별을 한 곳이다. 다시 못 만날 줄을 몰랐던 그들의 마지막 만남을 지켜보았던 백성들이 훗날 ‘영 이별다리’ 또는 ‘영 건넌 다리’라고 불렀다.
 종로구와 종로 문화관광협의회가 발굴해 현대에 재현한 ‘정순왕후 추모문화제’에서는 특별히 이 다리위에 무대를 마련,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단종과 비애의 생을 견딘 정순왕후를 위한 진혼무를 연출하며, 그들의 마지막 이별 장면을 재현해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지금의 영도교는 청계천 복원 때 현대식으로 다시 놓아진 것이다.


잠깐만-‘동정곡’을 아시나요?
동정곡이란 문자 그대로 ‘동정하여 곡한다’라는 뜻이다. 1457년 6월 영월로 유배 간 지 4개월만인 그해 10월에 단종은 외로운 오지 ‘청령포’에서 죽임을 당한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 송씨는 아침 저녁으로 소복을 입고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 했다. 그 곡소리가 얼마나 애절하던지 인근 산 아래 동네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이에 온 마을 여인네들도 이내 정순왕후 송씨와 같은 심정이 되어 땅 한번 치고, 가슴 한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