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곳곳에서 3·1운동의 흔적을 돌아본다
서울 곳곳에서 3·1운동의 흔적을 돌아본다
  • 주영빈 기자
  • 승인 2011.02.2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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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3·1절 맞아 도심속에서 애국정신 기릴 수 있는 역사적 공간 4곳 소개

[서울문화투데이=주영빈 기자] 서울시는 제92기 3·1절을 맞아 가족과 함께 서울 도심 속에서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기릴 수 있는 역사적 공간 4곳을 추천했다.  

▲ 1962년 3월1일

먼저, 서울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위치한 탑골공원에 가면 1919년 당시 수만 군중의 3·1운동 만세시위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탑골공원은 1919년 3월1일 처음으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3·1운동의 진원지로서 유서 깊은 곳이다. 당시 아침부터 탑골공원에는 4000~5000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 소리와 함께 학생 정재용(鄭在鎔)이 공원 내의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공원을 나설 때는 수만의 군중이 호응해 함께 시위 행진을 감행해 대한문(大漢門)으로 향했다. 전국에 번진 3·1운동 만세시위는 이렇게 탑골공원에서 점화됐다.

독립만세 진원지인 탑골공원을 둘러봤다면, 만세운동의 물결이 그대로 이어졌던 한강변 마포전차 종점지로 가보자.

마포동 마포전차 종점지(마포구 마포동 140)는 서대문에서 들어오는 전차의 종착역으로서, 3·1운동 때 시위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던 곳이다.

1919년 3월1일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친 시위군중 가운데 약 2천여 명이 이곳에서 오후 8시경까지 시위를 하였던 곳으로, 마포대교 북단 끝 지점의 불교방송국이 있는 다보빌딩 앞 일대이다.  

독립만세 운동의 현장에 이어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가면, 당시 일제가 우리 독립투사들을 가뒀던 생생한 현장을 확인할 수 있으며, 역사전시관을 둘러보며 뼈아픈 역사를 되짚어 보고, 나라사랑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기회를 가져보자. 

서대문독립공원은 공원 규모가 10만 9193.8㎡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은 역사전시관, 제9~13 옥사와 중앙사, 나병사, 추모비, 사형장, 지하옥사를 포함하고 있고, 그 외에 순국선열추념탑, 3·1독립선언기념탑, 독립문, 독립관 등이 있다.

1908년에 지어진 옥사는 일제가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가두었던 곳으로 2009년 10월 새단장을 거쳐 현재는 시민들이 역사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서울시 중랑구 망우동에 위치한 서울시립 망우추모공원을 찾아가 일제시대 속에서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혼을 느껴보자.

서울시립 망우추모공원(중랑구 망우동 산57)은 독립운동가와 애국지사 등 15위가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 오세창, 오재영, 한용운, 장덕수, 조봉암 등의 독립운동가와 박인환, 오긍선, 지석영, 이중섭 등의 화가, 시인, 의학자 등의 유명인사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산책로를 따라 연보기록비가 자리해 있다.

망우추모공원에 안장된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19년 승려 백용성(白龍城) 등과 불교계를 대표해 독립선언 발기인 33인 중의 한 명으로 참가해 <3·1독립선언문>의 공약 삼장을 집필했으며,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6년『님의 침묵』을 내놓고 문학활동을 전개했으며, 1937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됐다.

또한 1919년 신한청년회 조직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가인 "송업 서병호" 선생과 1919년 맹산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 및 1920년 일본 황태자 암살 기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복역하기도 한  "지기 문명훤" 선생의 묘역이 각각 대전국립현충원(2008.11.8)과 국립묘지(2006.11.15)로 이장되기 전에는 망우리추모공원에 안장되었기도 했다.

특히나 2011년 1월20일 대법원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던 조봉암 선생의 묘역도 추모공원내에 안장되어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