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회 대한민국 한산대첩기념축제
"학익진을 펼쳐라" 오락과 교육이 합쳐진 에듀테인먼트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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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대첩기념축제는 올해로 419주년을 맞은 한산해전을 기념하는 축제로 오는 8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의 일정으로 통제영지와 강구안 문화마당, 망일봉 이순신 공원 등을 비롯한 통영시 일원에서 펼쳐진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한산대첩기념축제는 4년 연속으로 문화관광부 지정 유망축제로 인정받은, 임진왜란 관련 축제 중 가장 명망 있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한산대첩과 이충무공의 호국정신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욕심에,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한산대첩기념축제 준비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류태수 집행위원장을 찾아가 인터뷰를 가졌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당시 왜의 정세와 임진왜란의 전세를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막부들을 통일해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거점으로 명나라를 치겠다는 대륙진출의 야욕을 품고 1592년 일으킨 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개인의 야심과, 자신의 휘하로 편입된 대명들에게 녹봉으로 줄 영지의 고갈, 나라 안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을 막기 위해 대륙진출을 꾀했다.
임진왜란 발발 후 이십여 일만에 한양까지 함락시킨 왜군은 서해를 거점으로 명으로 진출할 계획이었다. 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해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왜는 육상에서의 승리에 도취해있었다. 그러나 안중에도 없던 이충무공의 조선수군에 그 발목을 잡힌다.
임진왜란 발발 이틀째인 4월 15일, 원균의 공문으로 전쟁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된 이충무공은 선조에 장계를 올려 경상도 해역으로 출장을 허락받는다. 전라우수영 이억기와 함께 5월 7일부터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2척을 격침시키고, 5월 29일부터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67척을 격침시켜 승승장구해 의기양양해 있던 왜군의 사기를 꺾어 놓는다.
서해를 얻지 못하면 명으로의 진출은 불가능하다 판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부대를 재편성하고, 한강유역까지 진출해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불러내려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 등 최정예 수군 1만여 명과 전선 73척의 연합함대를 편성해 이충무공의 조선수군함대를 섬멸하라 명한다. 당시 육상에서의 전황은 5월 2일에 한성, 27일에 개성, 6월 13일에 평양이 차례로 함락돼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 전역이 왜군의 손에 떨어진 사면초가의 국면에서. 민초들은 왜군의 치하에서 고통 받고 있었다.
이충무공은 1592년 7월 5일 전라 좌·우도와 경상도 수군을 통합하여 56척의 전선을 합동함대로 편성해 7월 7일 당포항에 정박해 적정을 살피던 중, 견내량에서 왜선 70여척이 활동 중임을 확인한다. 7월 8일 함대를 이끌고 출장한 이충무공은 “견내량은 수로가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으로 싸우기 어려워 전투할 곳이 못되니, 한산도 앞 큰 바다로 유인하여 깨뜨려야한다”며 “학익진을 펼쳐 적의 선봉을 지자·현자·승자총통으로 일시에 공격해 깨뜨려라” 지시한다.
6척의 판옥선을 내보내 도망치는 왜의 척후선을 추격하자 왜군 전선들이 일시에 돛을 달고 쫓아왔다. 사전명령에 따라 조선수군의 전선들이 일제히 후퇴하자 기세가 오른 왜군은 맹렬히 추격해 한바다에 이른다. 바로 그때 근처 방화도와 화도에 매복해있던 조선수군의 주력함대가 나타나 쫓기고 있던 전선을 엄호함과 동시에 일제히 선수를 왜군함대로 돌리고 합죽선을 펼치듯 학익진을 전개하며 역진해갔다.
이어 일제히 지자·현자·승자총통을 쏘기 시작해 선두에 있던 두세 척의 전선이 격침당하자 왜군은 주춤하며 도망칠 기미를 보인다. 이를 놓치지 않고 기세가 오른 조선수군함대는 맹렬히 돌진해 왜군의 전선을 격파하고 적병을 포획하거나 사살한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4백여 명의 왜군들은 배를 버리고 한산도로 상륙한다. 하지만 이충무공은 적병들이 도주하더라고 상륙할 곳이 한산도와 거제도뿐이라, 설사 달아나더라도 식량이 없어 아사할 것을 염두에 두고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해 전투를 펼쳤다.
이 한 번의 승리로 왜군 9천여 명을 수장시키고 59척의 전선을 격파하거나 나포하는 전과를 거둔다.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구사일생으로 김해방면으로 도주한다. 7월 9일 적선을 찾아 가덕도로 향하던 중 부산 가덕도에서 안골포로 향하던 구키 요시다카와 가토 요시아키의 잔당을 포착, 7월 10일 안골포까지 쫓아가 그곳에 정박해있던 42척의 전선을 격파한다. 사흘간의 전투에서 총 101척의 왜군전선을 격파해 숨통을 끊어 놓는다.
한산대첩에 패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순신과 맞붙어 싸우지 말라” 명하고, 이에 부산포에 정박 중이던 500여 척의 전선들이 조선수군에 하루 종일 포격을 당해 그중 1백여 척이 파괴당하면서도 방파제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해전 사에 유례없는 치욕을 감내한다.
한산대첩이 세계4대 해전으로 평가받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산대첩은 조선의 합동함대와 왜의 주력함대였던 연합함대간의 총력전이었다. 조선은 국가의 존망이, 왜는 전쟁의 승리와 대륙으로의 진출이 걸린 승부였다. 만약 한산대첩에서 왜가 승리해 남·서해 우회로를 확보해 수륙 병진이 가능했다면, 내우외환으로 극도로 혼란했던 명나라는 왜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한산대첩의 승리로 이충무공과 조선수군을 꺾고 수륙 병진해, 평양을 점령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카’ 부대와 합류해 명나라로 진출하려던 왜는 안중에도 없던 조선수군에 그 발목을 잡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무참히 저지된다.
혹자들은 한산대첩을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들 중 하나로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한산대첩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 풍전등화 같던 전세를 역전시키고,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의기양양하던 왜군의 기세를 꺾어 놓음으로써 임진왜란을 막아내는 분수령이 됐다.
무엇보다 중요한 의의는 한산대첩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물밀 듯 일어났고, 왜적을 쳐부숴야 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민초들을 중심이로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막아내는데 큰 역할을 한 의병들이 모이는 전기를 마련한 승첩이었다.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성웅 이충무공에 고증과 평가는 정당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한산대첩 조선수군의 승리의 중심에 이충무공이 있었다. 한산대첩을 비롯한 임진왜란 당시 벌어진 해상에서의 전투에서 불과 여덟 척이던 거북선의 활약만으로 이루어냈다는 맹목적인 믿음은 사그라진데 안도한다.
한산대첩의 승리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 지지 않는다”던 이충무공이 왜군의 전술을 철저히 분석해 이루어낸 전략적, 전술적인 승리였다. 왜군의 약점과 전술을 철저히 연구해 파악하고, 지형을 적극 활용해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고, 판옥선과 왜군전선에 비해 월등히 앞선 원거리 화력을 바탕으로 학익진을 위시한 전술적인 승리를 이루어냈다.
크고 작은 전투들에서 이충무공은 지형을 최대한 활용해 아군의 피해를 최소로 하는 전술들로 연전연승을 달린다. 임진왜란 당시 이충무공에 패한 왜의 후손인 일본이 도리어 우리보다 더 이충무공에 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우리에게 이충무공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은 있지만, 과연 이충무공의 업적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자문해보자. 성웅이라 부르짖기에 앞서, 아직도 맹목적으로 거북선 신화에 휘둘리고 있진 않은지, 이충무공이 이루어낸 승리들이 단연 앞선 화력을 바탕으로 한 당연한 승리였다 믿고 있진 않은지
1905년 대마도해전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괴멸시키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전쟁영웅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이순신의 학익진을 본 딴 ‘丁(고무래 정)’자 전법으로 승리를 거두고, 전승기념 축하연에서 “나를 넬슨과 견주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 비교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다”며 “나는 이순신에 비하면 하사관 정도에 불과하다”는 말로 이충무공에 대한 존경심을 밝혔다.
또 일본의 해전사 전문가 ‘가와다 이사오’는 ‘포탄 잠재우기’라는 저서를 통해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 개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만큼의 풍부한 무기와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아침에 점령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 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며 뼈있는 지적을 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한산대첩 기념축제 행사 내용이 궁금하다.
2011년 50주년을 맞은 한산대첩기념축제는 임진왜란 중 조선수군과 이충무공의 승전신화의 효시가 된 한산대첩 419주년을 기념하는 축제로, 한산대첩이 가지는 역사성과 이충무공의 업적, 호국정신을 “학익진을 펼쳐라”를 주제로, 이전까지 보는 것에 만족하던 축제에서 벗어나, 체험활동을 주로 한 역사적이고 교육적인 체험형 축제로 자리 잡아 나가고자 한다.
이전까지는 고유제와 퍼레이드, 군점을 이틀로 나눠 진행했는데, 올해부터는 체험행사를 늘리자는 취지에서 오후에 진행했던 고유제를 행사 첫날 오전으로 옮겨, 이를 시작으로 퍼레이드와 군점을 행사 첫날에 함께 진행한다. 또 지난 행사까지 세병관에서 진행했던 군점을 올해부터는 관객의 자연스러운 참여를 유도하고자 접근이 용이한 강구안 문화마당으로 옮겨 진행할 예정이다.
통구미 노 젓기와 거북보트 노 젓기 체험, 국궁과 전통무예 24반의 무예를 직접 배워볼 수 있고, 이전의 거북선과 이번에 건조된 판옥선도 한산대첩기념축제를 기해 관람객에게 개방할 예정이다.
또 체험행사들은 단순히 즐기는 체험에 머물지 않고 ‘평화와 화합’을 주제로 전쟁의 폐해를 알리고, 과거의 일을 교훈삼아 앙금을 털고 미래의 화합을 향해 가자는 메시지를 널리 알리고자한다.
이충무공과 참전했던 조선수군의 호국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에서 여름에 진행한다. 그 무더운 여름에 노를 저었을 격꾼(노꾼)들과, 무거운 갑옷을 입고 지휘를 했을 이충무공, 화포의 열기를 견디며 왜군과 싸웠을 수군들의 노고를 조금이나마 알게 해주고 싶었다.
또한, 국내의 크고 작은 축제들 대부분이 봄과 가을에 편중되어 있다. 바다와 함께하는 축제인 만큼 차별화도 꾀할 수 있다. 노 젓기 체험이나, 해상에서의 한산대첩재현 등 여름축제에 어울릴 콘텐츠들이 많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만약 한산대첩기념축제를 봄이나 가을로 옮겨 진행한다면 이도저도 아닌, 말 그대로 지방축제로 전락할 것이다. 또 그저 축제란 명목으로 흥청망청 즐기는 행사가 된다면 한산대첩 승전과 이충무공의 호국정신마저 퇴색될 것이다.
비록 무더운 여름에 진행되지만, 역사의 장소에서 몸으로 체험하며 선조들의 노고와 전쟁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한다.
간단한 친절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축제기간 중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성의껏 설명하고 안내해줄 필요가 있다. 이것이 통영의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앞으로 살 길이다. 업소들도 손님을 친절하게 맞아야 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현실적인 사안이지만 아직 부족한 면이 많다.
중앙시장, 서호시장, 거북시장 등에서 수산물을 파는 사람이라도 방문객이 한산대첩 일정을 물으면 그냥 “잘 모른다”고 답할게 아니라, “강구안 거북선 앞에 안내소가 있습니다”라고 말 몇 마디만 덧붙여도 관광객들에게는 큰 인상을 남긴다.
대다수의 통영시민들은 친절하다. 근데 옥에 티라고할까. 극소수의 시민들의 무관심이나, 관광객의 물음에 짜증이나 불쾌감을 드러낸다. 반드시 고쳐야 관광통영으로의 이미지를 재고할 수 있다.
그렇게 작은 친절을 베풀면 이미지가 개선되고,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보상은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작게는 시장의 영세 상인들의 소득부터도 증가할 것이다.
한산대첩 419주년과 한산대첩기념축제 50주년을 즈음해, 단순한 승첩기념축제에 머무르지 않고, 올바른 역사인식과 역사교육, ‘평화와 화합’의 반전이 함께하는 축제로 거듭나려 한다. 적과 아군을 떠나 그 옛날 조상들의 희생에 대한 감사와, 명복을 비는 숙연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한산대첩기념축제는 오는 8월 10일~14일 5일간 통영시 강구안 문화마당과 통제영 일원, 이순신 공원 등 통영시 일원에서 열린다. 행사는 첫날 오전 고유제를 시작으로 퍼레이드와 군점 재현, 한산대첩재현 등 5일 동안 크고 작은 행사들로 관람객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