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5주년 기념 특별인터뷰-안숙선 명창] “국악 큰 밭 일구기 위해 작은 씨앗 뿌리는 단계”

국립국악원 예술감독으로 국악 발전·대중화 위한 큰 책임 맡아

2013-11-25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

 

지난 2008년 문화예술계를 바른 시각으로 대하는 정론지가 필요하다는 사명을 안고 창간한 서울문화투데이는 문화예술·역사·관광 등을 다루는 국내 유일의 문화예술 전문지로서 소명을 다하기 위해 그 창간 이념을 기리며 이듬해부터 매년 문화대상을 시상하고 있다.

문화대상은 대한민국 문화예술계의 저변 확대와 발전을 위해 열정을 다하고 있는 예술가와 문화예술계 인사를 비롯, 이들을 뒤에서 후원하고 지원하는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과 격려의 뜻을 표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세계적인 소리꾼인 안 명창은 1회 전통문화대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국의 소리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국내 판소리계의 부흥을 위해 힘쓴 공로를 인정받았다. 수상자로 본지와 첫 인연을 맺은 안 명창은 지난해 문화대상 심사위원을 맡으며 또 한번 창간 이념에 힘을 실었다.

이렇듯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안 명창은 매체와 국악인, 언론과 인터뷰이, 뉴스생산자와 뉴스메이커의 관계를 넘어서 동반자적 관계로 발전하는 중이다. 이번 본지 창간 5주년을 맞아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안 명창을 다시 모셨다.

60년 가까운 세월동안 판소리 외길인생을 걷고 있는 안 명창은, 최근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을 맡으며 더욱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국악 그리고 판소리를 중심에 두고 폭넓은 행보를 보이고 있는 그의 삶을 되짚어 보며, 앞으로 국악계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심도 있는 얘기를 나눈 자리였다. 

안 명창과 본지와의 첫 인연은 2009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연을 세 시간 앞두고 자택에서부터 시작해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공연장 근처 야외에서, 공연장으로 장소를 이동하며 촉박하게 인터뷰가 진행됐다. 당시 조근조근 말씀하시던 모습이 풋풋한 감성을 지닌 18세 소녀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안 명창은 따뜻한 감성의 소유자다. 그는 찾아오는 이들을 그냥 보내지 않는다. 공연장에서건 사무실에서건 그는 늘 찾아오는 이들에게 먹을거리를 내놓는다. 처음 인터뷰 때나 최근 만났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사람에게 따스한 정을 건넨다. 첫 인연 이후 4년이나 지났지만 여린 감성과 지치지 않는 에너지, 사람을 향한 인간적인 면모는 여전했다. 안 명창도 서울문화투데이와의  첫 만남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갑자기 공연시간이 앞당겨졌지요. 원래 공연을 앞두고는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손녀들과도 시간을 잘 보내지 않는데, 그날은 특별한 기억이었어요. 시간에 쫓겨 행사장 가는 길에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대표가 차 안에서, 또 차에서 내려서까지 ‘집요’하게 인터뷰했던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지요. 나도 저렇게 집요하게 소리를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으로 계속 눈여겨봤죠.”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소리 외길 인생을 걸어온 안 명창의 가슴 한구석에는 본지의 좋은 인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제1회 문화대상 수상자로, 그리고 지난해 4회 문화대상 선정위원으로 위촉된 그는 문화대상의 제정 취지에 대해 언급하며, 국악계 더 나아가 문화예술계 전반에 그 뜻이 널리 퍼지길 기원했다.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은 문화예술계가 주목하고 있는 상입니다. 서울문화투데이가 일간지가 아님에도 문화계 소식을 가장 밀도 있게 다루는 신문이라 저 역시도 늘 열독하고 있는 매체입니다. 문화예술인들이 자신의 일에 바빠서 정책적인 사항이나 현안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부분은 물론 문제점을 짚어주고 해법과 대책을 제시해주는 신문으로서 의미가 크죠. 개인적으로는 이런 매체에서 상을 받아서 더 의미가 컸습니다.

하지만 상을 받을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책임감과 부담감이 생겨요. 제 스스로 ‘이 상을 받을 만한 인물인가’라고 저를 되돌아보게 되고, 또 어깨가 무거워지는 걸 느낍니다. 앞으로도 상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겠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죠. 더구나 문화대상같은 경우 자타가 공인하는 분들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해 객관성을 갖춘 상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경우라, 더 자신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가 됐죠.”

수많은 상을 받아온 안 명창이지만, 그의 말처럼 상은 그에게 현재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요, 미래를 밝히는 등대같은 역할을 한다. 최근 '방일영 국악상'을 받는 자리에서는 눈시울을 붉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무래도 선생님들 생각이 많이 나서 그랬죠. 선생님들을 떠올려 보니까  그분들은 진정성 있는 예인을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나이가 어릴 때라 그런지 건성으로 들으면서 세월이 지났죠. 그분들이 살아계셔서 큰 상을 받는 걸 보시면 기뻐하실텐데 생각도 들고, 생전에 잘해드리지 못하고 제자로서 후회가 많이 돼요.”

인터뷰 중 스승들의 얘기를 꺼내는 안 명창의 눈시울이 다시 붉어졌다.

“제가 아플 때면 만정(김소희 명창) 선생님께서 약을 지어놓고 왜 안 오냐고 하실 정도로 많이 챙겨주셨어요. 제가 그래도 못 찾아뵈니까 상당히 서운해하시던 모습이 기억이 나요. 오죽하면 박귀희 선생님께서는 ‘거짓말이라도 선생님 이건 참 좋습니다' 하면 참 기분이 좋다잉’ 이런 식으로도 말씀하셨어요. 무뚝뚝한 제자한테 정말 인생에 좋은 말씀을 해주신 거죠. 그런 말씀들 그때는 못 새기고 있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가슴을 치게 되네요. 철없이 살았던 것 같은데 나이가 좀 드니까 진정성을 가지고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어요.”

“스스로 미래 일굴 줄 아는 국악인 돼야”

안 명창은 한국 최고의 소리꾼이라 불리고 있음에도 여전히 옛 스승들을 여전히 그리워했다. 현재 국악계에서 높은 연배에 있고 그가 가르친 제자들이 대성해 국악계를 이끌고 있지만, 여전히 초심을 유지하며 스승과 제자의 끈끈한 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진을 위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올해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가르치며 현장에서 몸소 느껴던 바들에 대한 고찰의 시간이었다.

“후진들이 너무 수동적인 경향이 있죠. 후진들이 선생님만 의지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모습들요. 이젠 본인들이 스스로 국악계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미래를 위해 방향을 제시해야 하겠죠. 제자들이 저희들보다 더 많은 가능성이 있고, 좋은 정보를 접할 기회도 많으니까 스스로 목표를 세워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준비된 사람들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거니까요.”

 

안 명창은 후학, 후진들에게 대한 조언에 인터뷰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며 그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의 쓴소리에는 국악이란 전통문화를 향한 애정이 담겨 있었고, 한국의 대표 소리꾼으로서 안 명창이 지닌 책임감이 담겨 있었다.

“음악은 평생 가는 길이기 때문에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인데 국악계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제는 리더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 가장 중요한 게 화합이죠. 남하고 견줘봐서  뭐가 부족한가  되돌아봐야 되고 화합해야 하고 서로 이해하고 아껴줘야 합니다. 누구의 밑에서 배웠다 이런 생각을 벗어나서 서로가 인정하고 모자라는 것은 돕고 모르는 것은 알려줘야 국악이 더 발전할 수 있을 거에요. 열린 마음으로 다른 장르와도 엮어서 지속적인 교류를 해야 국악의 대중화가 앞당겨질 거라 생각합니다.”

“무분별한 퓨전국악 경계…원형이 살아있어야”

국악의 대중화는 국악계를 대표하는 인물인 안 명창에게 지워진 의무이자 책임이다. 안 명창 스스로도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힘써왔다. 한예종 교수로서 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으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책무를 만들며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 있다. 그런 그가 가장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은 다른 장르와의 교류를 통한 퓨전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퓨전은 경계하고, 원류의 것을 살리길 바라며 그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최근 국악계를 놓고 위기인지 기회인지를 묻는 질문들이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위기라고 생각해요. 그 위기의 원인으로 ‘무분별한 퓨전’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판소리라는 음악이 쉬운 길이 아니라, 제대로 소리를 내려면 몇십년을 갈고 닦아야 하는데, 최근 쉽게만 가려고 하는 경향이 좀 있죠. 소리꾼들이 쉽게 가려고 하면, 결국 대중들도 쉬운 소리만 듣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 결과는 원형적인 것들이 사라지는 현상으로 귀결될 거에요. 전 이런 점을 경계하는 거에요.”

안 명창은 국악을 퓨전화하는 사람들의 기본 정신에 국악의 대중화를 향한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퓨전을 통한 대중화가 관객을 손쉽게 끌어들일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원형을 생각하지 않고 무분별한 변주로 국악을 소개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관현악이나 오케스트라, 서양악기와 협연은 좋지만, 우리의 것을 훼손시키지 않고 녹아들게 하려는 올바른 정신이 바탕이 돼야 해요. 우리가 가진 소리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전통 국악은 세계 어느 음악에 비해도 뒤질 게 없죠. 또 전통 문화 전체가 기능적인 면보다 정서적인, 정신적인 면이 돋보이는 것이라 세계 어느나라에 가도 우리 음악에 흠뻑 빠지는 걸 알 수 있죠. 우리 음악성과 그 구조적인 모습들은 세계인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원형의 국악으로 잘 이끌어줄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퓨전 국악은 전통 국악의 정체성을 지키고 원형을 알릴 수 있는 도우미 역할을 해야 하는 거죠.”

그는 무분별한 퓨전화에 대해 염려함과 동시에, 문화예술계가 처한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배출되는 인재들에 비해 그들이 설 무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었다. ‘예술인 복지’ 차원에 대한 문제도 빼놓지 않았다.

“쉬운 음악을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라고 생각해요. 각 대학교 국악과에서 쏟아져 나오는 인재들의 수는 엄청난데 기존 단체들이 수용할 수 없는 숫자거든요. 또 그들이 스스로 설 무대도 마땅찮구요. 그러다보니 새로운 팀을 만들 수밖에 없고 악순환이 이어지는 거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전통 문화가 설 무대를 많이 만들어줘야 한다는 거에요. 자기 예술행위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죠. 또 문화예술이라는 게 직업적으로는 열악한 상황인 현실이니까 기본적으로 생활을 영위해줄 수 있을 정도로 제도가 뒷받침돼야 하죠. 공연을 펼칠 기회를 많이 만들어주는 게 예술인을 위한 최고의 복지라고 생각해요.”

소리꾼으로서 개인적인 역할을 넘어, 안 명창은 국악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가 가진 고민은 소리에 대한 수준을 넘어서, 행정 혹은 제도 전반에 대한 문제에까지 닿고 있다. 최근 국립국악원에 적을 두게 된 것도 이런 고민의 결과였다.

“한예종에서 정년을 맞이하면서 개인적인 것들을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공부를 좀 더 해서 적벽가와 수궁가 두바탕 밖에 못한 걸 더 나아가 나머지 세바탕을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자유롭게 있으려고 했죠. 또 다른 분들처럼 저도 팀을 만들어서 여러 활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국악원에 오면서 일단 개인적인 일들은 잠시 제쳐두게 됐어요.”

 

 

방일영 음악상 상금  쾌척…국악 발전 위해 국악원에 기금 1000만원 내놔

앞으로 예정된 수많은 계획에 안 명창은 요즘 ‘숨돌릴 틈’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국악원에 들어와 실태를 파악하는 한편 새로운 사업들에 대한 구상과 인선, 세부계획까지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최우선시 하는 일은 국악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악원이 했던 작품 중에 제가 아는 게 별로 없었어요. 큰 음악회나 공연이나 브랜드가 각인되지 못한 거죠.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곳인 만큼 좋은 작품들을 무대 위에서 잘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것들이 하루 아침에 금방 되는 건 아니니까 꾸준히 노력해야 하겠죠. 여러 공연을 활성화하고 예술성을 높여서 대한민국이 국악원을 좋아할 수 있게 만드는 걸 기본 가닥으로 삼고 있어요.”

그는 국립국악원에 쓴소리를 전하면서도,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안 명창은 말 뿐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며 자신의 진정성을 보였다. 방일영 음악상 상금 중 1000만원을 국립국악원에 기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지난 8월 만해대상문예부문을 수상하며 받은 상금도 국악계 전체를 위한 활용방안을 고심중이다.

“국립국악원이 워낙 많은 활동들을 하고 있는데 예산의 부족함이 절실하게 느껴지더라구요. 상황이 열악한 부분이 많아요. 홍보적인 면이나 무대를 만드는 일이나 모두 비용이 드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배정된 예산이 풍족하지 못해서 얼마전 받은 '방일영 국악상'상금의 일부를 발전기금으로 기탁하기로 했죠.  그런데 고맙게도 국악원은 여기에 예산을 더 붙여서 여러 일들을 진행하기로 했어요.”

그는 앞으로 국악계의 중추로서, 국립국악원 내에서는 중앙과 지역의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할 계획이다. 또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가지 사업들이 방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국악인으로서 또 전통문화예술인으로서 그가 풀어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국악의 대중화’가 놓여 있다.

“현재 중앙의 민속악단만으로는 브랜드화가 수월하지 않아요. 여러 훈련이 돼 있는 남원이나 부산, 진도와 협력할 수 있게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상하고 있지요. 또 스타 배출이 절실합니다. 곳곳에 보면 소리도 잘 하고 느낌도 잘 살리고 얼굴도 이쁜 사람들이 꽤 있어요. 그럴 듯한 외면 말고 내면적인 성숙도도 중요하지요. 소리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음악적인 완성도까지 갖춘 스타가 필요해요. 이렇게 잘 놀 줄 아는 ‘스타 광대’들을 발굴해야 하죠.”

“어린이집부터 국악 교육 의무화해야”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힘쓰는 안 명창은 최근 발표된 ‘문화융성 8대 정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가는 길 또한 문화융성을 향한 길이기에, 고되고 험한 그의 항로에 힘을 실어줄 정책이 뒷받침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리랑을 국민통합의 구심점으로 활용한다’는 내용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아리랑은 우리 국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깊은 정서가 담겨 있는 것이에요. 기쁨과 아름다움, 슬픔과 한 등 여러가지 정서가 담긴 거죠. 그렇기에 모두들 아리랑을 통해서 한도 풀고 화합도 하고 행복도 누리고, 그 어느 때건 다 쓰일 수 있는 희로애락이 담긴 것이죠. 올바른 정책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대통령께서 어렸을 때부터 판소리나 국악 공연을 많이 접한 것도 고무적인 일이구요. 많이 접했다는 것은 이해도도 높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정신이 깃든 아리랑이 강조되면, 전통 음악이나 전통문화로도 그 관심이 연결될 거라고 생각해요.”

 

안 명창은 문화융성으로 아리랑이 힘을 받고 나아가 국악에 대한 관심도 늘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어렸을 때부터 국악을 접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교육 기관을 통한 배움이 그가 제시한 해답이다.

“학교 수업시간에 우리 전통 악기나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잖아요.  제 손녀들한테도 어렸을 적에는 판소리나 우리 민요를 가르쳐줬어요. 그때는 곧잘 따라했다가, 유치원 들어간 다음부터는 우리 소리를 안 하려고 해요. 유치원 같은 데서 배우는 곳이 없으니까 그렇겠죠. 어릴 때 많이 접하면 어려워 하지 않고 관심 가질 사람이 많을 텐데 그게 안타깝죠. 요즘 어린이들이 제일 먼저 사회를 알아가는 곳인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부터 우리 국악을 의무 교육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습소를 따로 찾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게요. 한번이라도 전통음악을 들으면 후에라도 계속 가슴에 남게 될테니까요. 또 국악전공자들이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진로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히는 좋은 기회가 되겠죠.”

“알면 알수록 괴로워…좋은 소리 위해 끝없는 정진”

그는 소리에 대해 ‘알아갈수록 더 무서워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에 서면 설수록, 소리를 내면 낼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실력과 한계를 깨닫게 됐고, 스스로 낸 소리를 다시 듣기가 힘들다 했다. 실수한 부분만 들려 낯뜨거워졌다는 고백이었다.

“어릴 때는 뭔지 모르고 가르치는 대로 흉내내는 것에 불과했어요. 단순한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판소리 속에 숨어있는 조상의 얼과 전통, 역사와 문화, 예술성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때부터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국립창극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워낙 쟁쟁한 선생님들이 많으셨고, 내로라하는 동료들도 부지기수였어요. 처음으로 맡은 역할이 향단이었나 그랬는데 그래도 나름 소리 좀 한다고 어설프게 자부했었는데, 무대에 오르니까 동선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구요. 발조차 안 떨어졌죠. 자연스럽게 놀지도 못하고 무대에 설때마다 걱정이 대단했죠.”

남들보다 욕심이 많다는 그는 ‘연습벌레’라 불릴 정도로 판소리의 한 음을 위해 끝없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판소리 인생 60년을 바라보는 지금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체력과 건강관리다.

“소리는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언젠가 성대의 모세혈관이 터져 출혈이 생겨서 소리는 물론이고 한달 이상 말도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어요. 체력과 건강이 소리에 직결되는 거죠. 내 몸에 맞는 음식을 먹고, 적당한 운동을 꾸준히 해 온 것이 저를 여기까지 끌고 오게 한 것 같네요.”

그가 처음 소리를 내고, 소리꾼으로 무대에 설 때만 해도 상황은 지금보다 더 열악했다. 설 수 있는 무대도 적었고, 정책적인 지원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소리꾼들 스스로의 노력과 정부의 지원 모두가 서로 받쳐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악 대중화를 위한 그의 앞길엔 ‘빨간 날’이 없다.

“2015년에 브랜드 사업을 계획중인데 내년에는 그걸 준비해야죠. 작품도 정하고 대본작업도 해야하고 인선도 중요하죠. 또 작은 창극을 통해서 창극의 원형을 정리해보려고 해요. 또 장르를 넘나들면서 우리 소리와 다른 음악들을 결합해서 대중과 가까이 호흡할 수 있게 만들어야겠죠. 큰 그림을 그리면서 나아갈 계획이에요. 내년에도 서울문화투데이에서 국악계와 전통예술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언론 매체로서 힘써주셨으면 좋겠네요. 이제 국악으로 큰 밭을 일구기 위해 작은 씨앗을 심는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숙선 명창
 
◆ 약력
1949년 전북 남원 출생
1957년 강순영에게 가야금 산조 사사
1970년 김소희 문하 입문(흥보가, 춘향가 사사)
1973년 박귀희에게 가야금 산조 및 병창 사사
1979년 국립창극단 입단
1986년 판소리 완창, 다섯마당 공연
(박봉술-적벽가, 정광수-수궁가, 성우향-심청가 사사)
198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예능 준보유자, 1997년 보유자
1997~2000년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 역임
1998년 용인대 국악과 대우교수
2000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성악과 교수
2004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회 위원장
2007년 여수엑스포 홍보대사
2012년 제82회 춘향제전위원회 공동위원장
2013년 한영수교 130주년 및 정전 60주년 기념 K-뮤직페스티벌
              10월~ 현재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 
          
◆ 수상경력
19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 대통령상
1987년 KBS 국악대상
1993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98년 프랑스문화부 예술문화훈장
1999년 옥관문화훈장
2009년 서울문화투데이 전통문화대상
2013년 만해대상 문예대상
              방일영국악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