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는 능욕당했다”(2)

일본의 양심 야마베 겐타로와 암살지휘자 미우라 고로의 수기 속의 숨겨진 역사적 진실을 밝힌다

2009-10-06     이수경(일본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살해당한 사건이 ‘을미사변’이다. 이를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시해’사건이 아니라 ‘살해’사건이 정확한 표현이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시해’라는 단어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사건을 모의하고 현장을 지휘했던 인물은 당시 조선 주재 일본공사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1846∼1926)로 돼 있다. 하지만 미우라 고로의 수기를 보면 당시 일본 내각의 핵심 인물들이 이 만행을 기획하고 책임자를 조선에 파견했던 과정이 드러나 있다.
또한 당시 살해 현장에 있었던 20대의 젊은 낭인이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는 ‘명성황후 살해사건’ 후 보고서를 그의 직속상관인 미우라 고로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일본에 있는 이전 상관에게 보냈다.
바로 이 점이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주모자가 당시 일본 정부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케 하는 사실인데, 이 〈에이조 보고서〉는 70여 년 동안 철저히 숨겨져 있다가 마침내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郎, 1905∼1977)에 의해 파헤쳐졌다.
그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를 이와나미(岩波書店)에서 발간했다. 여기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가 됐다.
‘명성황후 살해사건’의 진정한 주모자를 밝히는 데 큰 몫을 한 두 사람의 글을 이수경 교수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내용을 1편과 2편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왼쪽 이토ㆍ이노우에ㆍ야마가타가 일본 정계 최고의 세 거물(三尊)임을 나타낸 보수성향의 잡지 <일본인> 27호, 1896년, 8쪽. 오른쪽은 ‘한국의 경성’이란 약어로 ‘한경사변’에 대해서 명성황후와 대원군과 고종의 상황을 글로 적어놓은 <일본인> 11호, 1895년 12월, 9-10, 40-42쪽.

▲하기 시 아부가와 강변의 미우라 고로 집터

미우라 고로 집 옆에 있는 류죠지 절에는 송병준이 양잠을 배웠던 나카무라의 묘 옆에 대한국 농상공부 송병준이 보낸 석등이 세워져 있다.

일본제국주의를 휘잡고 있던 정계 최고의 우두머리와 육군성 장성들이 관련하였고, 그들의 앞잡이로 <한성신보사>가 이용당했다.

구마모토 국권당의 아다치나 사사 등을 포함한 일본인 기자들(사건 당시 사이온지 외상대리에게 미우라가 보낸 전보에는 ‘외국인 목격자에게 영어로 황후가 어디 있냐고 묻는 자가 있었다’고 기록)과, 행동부대로 투입된 영웅심과 허세로 날뛰었던 장사 낭인패, 그리고 수비군들과 훈련대 등에 의해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지옥 같은 아비규환 속에서 피바다가 되었고, 정치적 능력을 지녔던 45세의 명성황후를 포함해 숱한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다.

야마베는 우치다 영사의 말을 빌려, 명성황후가 관자놀이에 자그마한 버짐 자리(머리에 벗겨진 흉터)가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흥선대원군에게 들은 살해범들은 미모의 부인 3명을 벤 뒤 흉터로 명성황후를 확인했고, 더불어 근본적으로 미우라 고로처럼 육군 중장과 육군 대신을 지낸 구스노세 유키히코가 살해사건을 지휘했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흑막은 결코 그들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건이 일제 육군성만의 막무가내 행위였다면 열강 운운하며 제국주의 내각제를 표방하던 일본의 부패성도 심각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당시 이토가 최고의 권력을 쥐어잡고 있을 때였고, 군부도 내각의 힘에 미치지 못할 때였다.

게다가 엄연히 미우라 고로는 이토ㆍ야마가타ㆍ이노우에 등 세 지기(知己)를 의식한 듯 그들의 고유명사를 솔직하게 명기하고 있다. 또, 당시의 일본 궁궐에서도 이미 조선 궁중 상황을 알고 있는 듯하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명성황후가 비명횡사한 뒤, 억울한 영혼은 114년이 되어도 잊혀질 수 없는 역사로 늘 기억되고 있다. 그동안 필자를 비롯해 수많은 학술적 연구나 드라마ㆍ뮤지컬ㆍ영화 등이 끊임없이 그녀의 삶을 다양하게 조명해왔고, 그녀의 사진이나 초상화가 화제를 모아왔다. 지난 9월 24일에는 한 여인으로서의 ‘민자영’의 고독함과 처절했던 당시 상황을 그린 영화가 개봉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재일 문학가 김희명이 일본에서 일찍이 소설 <흥선대원군과 민비>(1967)를 발표했고, 일본인 츠노다 후사코가 야마베의 자료 제시를 주로 활용하여 <민비 암살>을 내면서 화제를 모았고, 한국 연구자들도 그 소설 속에 내포된 자료들을 참고로 여러 사람들이 접근을 하며 그녀의 죽음에 대해 여러모로 조명을 하게 되었다.

 1922년에 조선총독부가 기증하여 일본 궁내 서릉부에 소장돼 있는, 빨간 표지의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 네 권의 반환운동도 전개되고 있다. 필자가 2006년 가을, 서릉부에 신청하여 출입 허가를 받고, 귀중한 자료라 해서 손을 씻고 만졌던 의궤의 무게는 바로 가슴속에 무겁게 남아 있는 우리 근대사의 설움의 무게였다.

비인간적 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날조와 모략을 동원해 조작을 해온 당시 육군성을 포함한 관계자들의 행위를 야마베는 물론, 현대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 이리에 아키라조차 ‘당시 일본 외교의 크나큰 실패’라고 지적하듯이, 한ㆍ일 근대사의 불행을 상징하는 참으로 악랄한 범죄행위였다.

 

이미1960년에 야마모토 시로는 미우라 고로가 소장하고 있던 관계 문서를 손수 베껴 갖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사건 직후의 전보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사건 직후인 10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외상대리인 사이온지에게 보낸 전보에는 어디까지나 조선훈련대가 반기를 들어서 사건을 일으킨 것이고, 일본인 가운데 가세한 자가 있다는 소리도 듣었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

이런 모략은 잡지 <일본인>에 게재된 내용을 보아도 그렇고, 스기무라ㆍ아다치를 포함한 관계자들의 자료들, 그리고 사건 직후의 신문들도 모두 조선군에 책임전가를 하고 있는 기록이 많다. 외상대리 사이온지가 1895년 10월 10일 오전에 미우라에게 보낸 전보에는 “이번 사건은 정부에게 중대한 일이므로 상세히 밝혀서 급히 전보를 보내라”는 내용이 있다. 이로써 쵸슈파벌이 아닌 사이온지에게는 털어놓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만큼 큰 거사였던 만큼 아군부터 속이는 전략으로 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야마베는 미우라가 연막을 친 문장을 야마모토가 순진하게 그대로 받아들여 자료를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왜냐면 그들이 만든 메이지 정부에 치명타를 가져다주는 외교문제였기 때문에 그들도 그 부분의 기록만큼은 솔직히 털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운데는 야마구치 출신의 데라우치 초대 조선총독의 사진이 실려있는 <일본의 조선> 책 표지(데라우치문고 소장) ▲오른쪽은 당시 조선훈련대가 일으킨 소동이라는 엉터리 내용이 게재된 1895년 10월 9일자 <요미우리> 신문.

 
  ▲왼쪽은 한ㆍ일 합방 기념으로 출간된 내각 각료들의 축사가 많이 게재된 <그래픽 특별 증간 일본의 조선(Chosen of Japan)> 1911년판. 여기에도 미우라의 범죄 행위는 일절 게재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서 범한 죄악 속에서 가장 엄청난 행위”의 야만성을 비판한 야마베는 “일본에서 지금(1966년)까지 적혀진 조선사는 거짓말과 속설 위에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민비 사건도 지금까지 적혀진 것은 전부 거짓말투성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단언하며, 일본인이 자신들의 비행과 과오를 숨기기 위해 거짓 역사를 적는 것이라고 양심적 표명을 하고 있다(<일본의 한국 병합> 207쪽). 1977년에 타계한 야마베가 남기고 간 역사학자의 ‘양심’이야말로 진정한 한ㆍ일 관계의 엉킨 역사를 풀어나갈 수 있는 내일을 위한 희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사회가 왜 이다지도 명성황후에 집착하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외세 침략으로 한을 삼켜온 한국적 정서는 물론, 속된 표현으로 ‘무전유죄, 유전무죄’란 힘의 논리 속에서 무력하여 수많은 침탈행위에 피눈물로 억울한 가슴앓이를 해온 민족이기에, 불행한 근대사의 도화선이 된 이 사건에 대한 집착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조선의 정신적 지주였고, 절대 사수를 했어야 할 황궁이 습격당해 나라를 대표하는 왕비가 살해당했다는 엄청난 사실, 그리고 어릴 때 형제도 없이 고독한 궁궐 내의 삶에서 힘들게 살다가 내부 갈등과 외부의 힘에 의해 암살당한 민자영이란 사람의 억울한 아픔에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직도 찾지 못한 그녀의 사진이나 미스테리와 같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접근 역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어떻게 그 높은 벽을 뚫고 황궁 침입이 가능했고, 황후가 살해당하는 일이 있을 수 있었냐고.

그 배경으로는 일본이 근대식 군비로 무장을 했으며, 철저히 사전 계획하에 조직되어 움직였고, 하다 못해 광화문 벽을 넘기 위해 훈련받은 병사 14명이 신속하게 사다리 이동을 전담하였다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궁궐 내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라고 경성 수비대에 지시를 했었고, 훈련받은 일본 군대가 주변 제압을 한 뒤, 일본측 부랑배 낭인들을 날뛰게 했던 것이다. 그런 수라장 속에서 훈련대로 움직인 것이다.

즉, 철저히 궁궐 습격을 준비한 일본에 비해, 조선 측은 그런 어마어마한 일에 대한 예측도 예방도 없었고, 일부 실학의 움직임은 있었지만 그만큼 국력도 무력했었다.

하지만, 힘의 논리로 지구촌이 움직인다면, 초강대국인 미국만 추종하며 사대주의란 미명하에 지구촌의 많은 나라들은 눈치를 보며 속국처럼 살아야만 한다. 그것은 인류의 이동이 급증하고, 다문화ㆍ다언어 사회로 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국제사회의 균형을 잃게 되는 것이고, 지구촌 사회의 기능을 잃게 되는 지름길이자 국제관계의 파멸을 초래하는 일이 된다.


필자는 그동안 조수미 씨가 부른 ‘명성황후’ OST <나 가거든>이란 노래를 백 번 넘게 들으며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가는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명성황후의 존재와 한ㆍ일 관계 비극사의 시작, 하지만 헤어질 수도 끊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이웃 일본. 그들의 야욕으로 시작된 1875년의 강화도 사건, 그 이후로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좌우당하던 70년 세월… 당파 싸움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쇄국주의 정책으로 근대화의 물결을 거부해왔던 것이 수많은 민중의 희생이란 운명을 자초했었음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자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력한 국가라고 해서 침략당하는 것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명성황후는 바로 그러했던 험난한 근대사의 여명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으며, 이 민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미래의 등불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부동산과 주식투자, 교육투자로 사회가 물질만능주의의 화려한 형식주의 거품에 부풀어 아픈 내 이웃을 도외시하고 소외시킨다면, 그 거품의 경제 차이가 결국 인간성을 소중히 여기며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사회 기능이 위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는 것은 아닐까?

명성황후, 그녀의 존재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후 역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며, 한국 사회의 아픔이 두 번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애절한 메시지를 사회 전체에 전하고 있다고 본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숱한 역사문제는 남의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그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 수 있을까? 역사란 삶의 흔적이다. 그 흔적의 추구란 바로 내일의 불행을 막으려는 인간의 지혜이다.

우리는 명성황후를 통해 근대사를 올바르게 알고, 향후의 한ㆍ일 관계를 포함한 아시아 질서를 미래지향적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전후 역사 인식을 바로 잡는 작업을 해야 한다.

편협적인 내셔널리즘으로 국수주의만 앞세우면 한국은 오히려 고립되는 불행을 맞이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일본의 자성이 일도록 역사를 제대로 알고, 그 과거를 통해 불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일본과의 신뢰 구축에 노력해야 하며, 청소년들의 문화적 교류를 포함한 풀뿌리 교류를 적극적으로 하면서, 역사 청산과 화해를 위한 다가서기를 현명하게 해야 한다.

또한, 국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민족을 초월한 지구촌의 수많은 양심적 시민들과 연대를 돈독히 하면서, 무력적 움직임을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주시하고 제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지배받아온 우리의 역사를 잊는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역사가 인류사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전 지구촌 시민들에게 침략의 아픔을 전하며, 평화 구축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선진 시민으로서의 ‘사명’ 의식이다.

100여 년 넘도록 계속된 한ㆍ일 근대사의 불행한 관계가 얼마나 아픈 미래로 남는지를 가르쳐주는 산 역사이자 증인인 명성황후는 전후 세대들인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며, 결코 불행을 초래하는 국제관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시공을 초월하여 전하고 있는 것이다.

 114년째 맞는 올 가을도 스산한 바람과 더불어 그녀의 아픔이 다시 가슴을 헤집겠지만, 우리는 명성황후가 인류사를 위해 전하려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 야마베와 같은 이웃의 양심도 되새겨보는 사색의 계절을 가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