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두 번째 태국에서 만난 나와 엄마

2020-09-07     윤영채 밀레니엄키즈

 

윤영채(2000년

갓 스무 살이 되어 학교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는 2019년 2월, 겨울이었다. 나는 추위를 싫어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이면 침대 밖으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우울하거나 무기력할 때는 활동을 하라던데, 추운 건 싫어서 그냥 온종일 만화영화나 보며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가끔 사람이 많은 종각의 한 카페에 홀로 앉아 또 똑같이 노트북으로 만화를 봤다. 집에 가봤자 할 일도 없으니 한참을 서성이며 걸어 다니다가 결국 추위에 못 이겨 동네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그 당시에 부모님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다. 글쎄, 두 분이 계셨다면 스무 살을 떠올렸을 때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게다가 전화기에는 왜 이리도 어쭙잖은 위로 문자들이 쌓여있는지. 불쾌함과 좌절감 그리고 창백한 마음이 한데 섞여 나를 괴롭혔다. 당시의 나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정말 노력해야 했다. 이런 생활을 하다 보면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피폐해져서 밤마다 그렇게 동네를 뛰어다녔다.

겨울의 냉기가 조금 가시고 서서히 봄이 신호를 보낼 때 즈음,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태국에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우리는 ‘인천국제공항’ 제2 여객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3개월 만인가. 그 사이 수척해진 엄마를 보았을 때, 뭐랄까 사실 좀 화가 났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빵을 나눠 먹으며 이륙을 준비하는 거대한 기체를 바라봤다. 비행기에 올라타서 함께 기내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한 지 약 6시간 만에 방콕에 도착할 수 있었다. 1년 만의 태국이라.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엄마를 데리고 다니기 위해 이런저런 검색을 하고 난 뒤라 큰 어려움이 없는 여행이었다.

우리는 ‘인천국제공항’ 제2 여객 터미널에서 만나기로 했다. 3개월 만인가. 그 사이 수척해진 엄마를 보았을 때, 뭐랄까 사실 좀 화가 났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빵을 나눠 먹으며 이륙을 준비하는 거대한 기체를 바라봤다. 비행기에 올라타서 함께 기내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한 지 약 6시간 만에 방콕에 도착할 수 있었다. 1년 만의 태국이라. 이곳에 대해 잘 모르는 엄마를 데리고 다니기 위해 이런저런 검색을 하고 난 뒤라 큰 어려움이 없는 여행이었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좀 더 좋은 숙소에서 묵고 수영을 했다. 향신료를 싫어하는 엄마 때문에 그 맛있는 풋팟퐁커리(튀긴 소프트 셸 크랩에 채소, 카레 가루, 달걀, 코코넛 우유 등을 넣어 끓인 부드럽고 고소한 맛의 카레 요리) 와 그린커리(타이에서 녹색 고추, 코코넛 우유, 고기, 채소, 향신료 등을 첨가하여 만든 연녹색의 카레 요리)를 먹지는 못했지만. 매일 마사지도 받고, 호텔 조식으로 오믈렛을 먹었다. 씨암 파라곤(Siam Paragon 태국의 대규모 쇼핑센터)을 쇼핑하며 시원한 4박 5일을 보냈다. 사실 여행 내내 나는 푹 꺼진 엄마의 얼굴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 언제나 독특하고 예쁜 옷을 입고 다녔던 엄마가 이제는 그냥 시장에 팔 것 같은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도. 의미를 잃은 표정을 하고서 초라한 행색을 한 엄마가 낮 설었다. 입은 웃지만, 눈은 슬픈. 그래서 20살의 태국은 가슴 아픈 여행으로 기억하고 있다. 물론 여행 내내 엄마의 투정에 짜증이 나고, 현지의 맛있는 음식 대신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빵과 시리얼을 먹어야 하는 게 싫었지만.

짧았던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향하는 길. 엄마는 김해 공항으로, 나는 인천 공항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의 비행기를 예약했다. 나는 새벽 1시 30분. 엄마는 새벽 2시 45분 비행이었다. 어느덧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가까운 물체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어버린 엄마가 더듬더듬 자신의 게이트를 찾아갈 때가 생각난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고 목적지로 안내했을 때, 엄마는 힘이 빠진 듯 웃으며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말투로 괜찮으니 어서 가라고 했다. 새벽 1시 5분. 뛰어서 인천행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뛰어가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혹시라도 엄마가 졸다가 비행기를 놓치면, 그래서 국제 미아가 되면 어쩌지.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해서 지금이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이면 어떡하지.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무기력한 생활을 해야 하는 걸까. 엄마는 부산에서 과연 어떤 생활을 하게 될까. 뭐 이런 생각들.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리고 아빠로부터 엄마가 부산에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정확히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도 엄마는 부산의 좁은 카페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챙기지도 못한 채 손님에게 거짓된 웃음을 지으며 숨을 쉬었을 것이다. 나는 내 옆을 맴도는 지독한 서울의 추위로부터 몸을 꽁꽁 감싼 채, 타인의 삶과 나의 인생을 끝없이 비교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그 의미 없는 일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각자의 삶을 이어나갔다. 여행의 끝에서 많은 것을 느꼈던 두 번째 태국. 희망, 용기 그리고 도전을 배웠던 지난 여정과는 분명 달랐다. 눈에 고인 슬픔을 말할 수 없어서 그저 웃었던. 두 번째 태국에서 만난 나 그리고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