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영도에의 귀환 ㅡ고기범 선생을 추모하며

타블라 라사-회화와 조각의 경계

2022-04-13     윤진섭(미술평론가)
▲윤진섭

일년 전, 몹씨 추웠던 겨울 어느 날 두주불사하는 술친구인 김진두가 고기범의 부음을 전했을 때, 나는 잠시 멍했다. 그 몇 달 전에 그가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소식을 진두에게서 전해들었을 때만 해도 잠시 그러다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겠지 했다. 그만큼 기범은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진두와 둘도없는 사이였는데, 둘을 이어주는 강력한 끈은 바로 술이었다.

술에 있어서는 천하에 이 둘을 따를 자가 없었다. 기범이 세상을 떠나기 10년도 훨씬 더 전에 진두가 위암 판정을 받았다. 진두는 잠시 얼굴이 노랬는데, 그것도 잠깐,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언제 암이었냐는듯 부어라 마셔라 지금도 전설로 생존해 있다.

기범과 진두는 나와 나이 차이도 많이 안 나는 거의 동년배인데 언제부턴지 이 두 사람은 나를 형, 또는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럴 때면 늘 술이 거나해 있었고 음습한 밤거리의 누아르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기범은 술, 담배, 사람, 문학, 잡학에 달통했다. 술에 취하면 눈을 가늘게 뜨고 씽끗 웃으며 구성지게 유행가를 부르거나 시를 읊조렸는데, 그럴 때면 묘한 매력이 전신에 흘렀다. 더 주흥이 도도해지면 맥주 병마개를 한쪽 눈에 낀 채, 혁대를 풀어 입에 물고 섹스폰 부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익살스러울 수가 없었다. 쵝오! 그럴 때 마다 나는 기범을 바라보며 엄지척을 보냈는데, 그것은 그에 대한 나의 무한한 사랑과 인간적 신뢰의 표시였다.

자주는 아니지만 기범은 술에 취하면 아무 때나 전화를 했다. 제주도에서, 강릉에서, 부평에서, 그때마다 거의 진두가 옆에 있었다. 진두는 술에 취하면 밤 늦게 전화를 하는데 요즘 뜸한 걸 보니 아무래도 기가 달리나 보다.

▲고기범

이십 여 년 전,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기범과 진두는 충청도 천안까지 먼 길 마다 않고 문상을 와 술친구의 의리를 지켰다.

"형, 나야. 나. 기범이!" 기범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이렇게 말하며 씩 웃어 넘겼다. 그에게 세속적인 일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성격이 호방하고 소탈하며 인간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곁에는 늘 그를 좋아하는 선후배들이 모여들었다. 미협 부천지부장을 맡아 부천미술의 진흥에 한 몫을 했다.

기록에 의하면 기범이 미술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70년대부터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작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직접 접한 2천년대 이후의 책 작업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고인에 대한 예를 표하고자 한다.

고기범의 책 작업의 특징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에 있다. 회화인가 하면 부조 형태의 오브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책이라고 하는, 어찌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소재를 통해 이 시대의 문제에 대해 발언하고자 했는 지도 모른다.

고기범,

알다시피 책은 정보전달의 매개이자 지식의 저장소이다. 그런데 고기범의 책은 하얗게 비어있다. 건축자재인 스틸로폼으로 펼쳐진 책의 형상을 만든 뒤, 그 표면을 핸디코트나 석고로 덮고 흰 색의 칠을 하는 것이 작업의 과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기범은 기존의 책의 기능을 폐기하고 그것을 자신의 표현의 장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책의 프레임은 더 이상 책이 아니라, 캔버스의 역할로 그 기능이 전환되는 것이다.

고기범의 작품이 지닌 이 중의적 의미는 고대의 죽간에서 시작하여 중세의 수제 제책을 거쳐 현대의 자동화 시스템에 의한 책의 대량생산에 이르는 과정이 압축돼 있다. 현대를 살다 간 고기범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문명적 패러다임의 변천을 몸소 겪은 사람이다. 소위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포스트 모던 문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SNS 매체를 경험하고, e-book의 등장에 갈등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인터넷 상에 떠도는 많은 정보들이 조작돼 진위가 의심되는 현실도 익히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오브제화된 자신의 책을 하얗게 칠하는 행위는 정보의 매개물로서의 책의 개념을 부정함과 동시에 자신의 예술 행위를 수행하기 위한 영도(zero)의 지점을 설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의 다양한 변화는 이 영도의 상태에서 벌어진다. 투각을 비롯하여 부조형태의 등장,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는 화려한 스펙트럼이 이곳에서 펼쳐진다. 책 속의 책들, 곧 화려한 장정의 책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겹쳐 포개진 책들이 켜켜이 쌓인 모습이 부조로 표현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