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의 거인 <김동호 위원장> 인터뷰

서글서글한 미소로 세계 영화계를 사로잡다.

2011-01-15     이은영 편집국장

[서울문화투데이=이은영 편집국장]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PIFF) 집행위원장‘이하 위원장’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신화와 더불어 우리나라 지역 영화제의 붐을 일으킨 사람이다.
부산영화제를 15년간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공 반열에 올려놓고 지난해72세의 나이로‘아름다운 퇴장’을 한 김동호 위원장. 

하지만 그는 위압적이거나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는다.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미‘무릎 팍 도사(황금어장, MBC)’에 출연해 일반인들에게도 권위적이기 보다는 인간적 면모를 아낌없이 내보인 전력(前歷)이 있다.
그래서일까? 인터뷰를 하기도 전에‘말 줄임 유머’로 본 기자의 긴장을 풀어주는 모습에 친근함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든 내 편으로 만들지 않으면 못 배기는 사람, 그래서 무적(無敵)인 김 위원장에게 신년을 맞아 세상을 잘살아온 인생 선배로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현재‘화백(화려한 백수)’인 그가 직전에 몸담았던 명동에 위치한 부산국제영화제 서울사무소를 찾았다.

소설을 좋아한, 평범했던 문학소년
1937년생으로서 김동호 위원장의 시작은 6·25 전쟁에 대한 기억부터 였다. 
“전후에는 삶이 다 전쟁과 관련한 거였어요. 계동과 제동으로 왔다, 갔다하면서 전쟁놀이를 많이 하고 그랬죠.”골목대장이셨을 것 같은데라고 묻자“대장 까지는 못하고(웃음)”라고 사람 좋은 웃음을 내 보였다.
혼란한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김동호 위원장은 당시 명문으로 알려진 경기중학교를 거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모범생일 것만 같은 학창시절 속에 어떤 끼가 숨어있었을까?

“특출하지도 않고 명석하지도 않은 평범한 소년이었어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때는 소설을 많이 읽었어요. 월북한 홍명희가 쓴‘임꺽정’이라든가‘상록수’라든가 정비석의‘마도의 등불’같은 에로틱한 소설도 있었죠.(웃음) 오히려 문학 지망생이었던 것 같아요. 수학이나 지리에 관심이 많아서 지질학과나 해양 천문학과나 국문학과를 선호했죠.”
학창시절, 그는 문학 지망생이었지만 관료를 지향한 선친 때문에 법과대학을 가게 됐다. 당시엔‘면서기’하나만 해도 엄청난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런 부분들이 그를 행정가로 만드는 데 한 몫 했다. 그렇게 법대를 갔다.


하지만 법관조차 사는 것이 궁핍하던 시절이었고, 결국 공무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의 목표는‘공무원들의 일반적인 승진’이었다. 당시 그의 관심은 문화나 영화가 아니었다.
“저는 문화보다는 언론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문화공보부는 언론과 문화 두 가지를 대표하는 곳이에요. 첨엔 언론에 관심이 많아서 언론으로 박사학위를 받고자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 논문까지 갔어요. 결국 통과는 못했지만.”

전형적인 공무원 코스를 밟았던 그가 갑자기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발령받게 되면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공부를 하고 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했던가? 그에게 영화는 빠져나올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존재였다. 그는 영화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영화란 도식적으로 얘기하면 종합예술이고, 영향력으로 보면 현대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매체 중에 하나지요. 그리고 또 아주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빨려 들어가는 마력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설득의 미학
그러나 큰 일에 어찌 시련이 없으랴? 당연하게도 김동호 위원장은 영화제를 창설할 무렵에 많은 반대와 회의에 부딪쳤다. 그런 거센 맞바람 속에서도 그는 꿋꿋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면서 그 당시 자신을 믿지 못하던 사람들을 믿게 만들었고, 결국 그의 진심이‘부산국제영화제’가 됐다. 그런데, 그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특별히 설득을 못한 사람은 없지만 몇 번을 반복해서 설득하고 양해가 됐다가 다시 또… 그렇게 몇 번의 과정을 거친 분은 계시죠. 그래도 끝내는 설득을 했죠. 예를 들면 베를린 영화제에 20년 이상을 집행위원장으로 근무했던‘모리츠 데 하델른’이라는 분이 있어요. 또 인터내셔널 영 포럼을 71년부터 창설해서 베를린 영화제를 만들어 운영해 온‘울리히 그레고르’라는 분도 계세요.    

  
이 두 분이 대표적인 앙숙이에요. 우리는( PIFF )  원래‘울리히 그레고르’씨 하고 친했어요. 그래서 1회 때 이분께 한국영화공로상을 드렸는데, 그 후로‘모리츠 데 하델른’씨가 맡고 있는 경제·파노라마 분야 쪽 한국진출이 잘 안됐어요. 그래서 몇 년 후에 이 분께 다시 공로상을 줬어요. 그랬더니 다시 또 다른 분이… 그렇게 진행된 걸 푸는데 3년 걸렸어요.”

그는 사람을 대하는 데는 정도(正道)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그는 정도(正道)로 사람을 대할 수 있었다. 오히려 앙숙관계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상태에서도 끝내는 두 사람과 다 잘 지내게 됐다고 했다. 비결은 계속 설득하고 이야기하고 선물주고 점심도 사주고… 그런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었다.
영화제를 위한 집념과 사람을 향하는 그의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다르게 추진력 있었다. 한번 추진한 일에 대해선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 그 힘은 결코 강하고 억지스러운 게 아니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진심이었다. 그 밑바탕에는‘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난관에 봉착된 적도 여러 번 이었지만, 그는 꼭 해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 나갔다. 개인적으로는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베스트 부산! 베스트 인연!
하지만 왜 꼭‘부산’국제영화제여야 했을까? 영화의 본산인 충무로에서의 타당성은 없었던 것일까?
“물론, 영화진흥공사에 있을 때 서울에서 창설해 보고 싶은 생각을 가졌었죠. 그래서 종합 촬영소 건립이 완공된다면, 영화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소집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또 문공부에서도 시도를 했었어요. 부산에서 시도하게 된 건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보단, 그런 제의가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그의 말대로 서울에서 그런 제안이 들어왔었다면 서울국제영화제가 생길 뻔도 했을 텐데. 하지만 그는 오히려‘부산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서울이라면 절대 성공할 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서울 같이 천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갖고 있는 넒은 곳은 관심을 집중시킬 수 없어요.”
“혹여 하더라도 하는지 안 하는지 잘 모르죠. 도쿄 영화제도 도쿄 시민들은 있는지 없는지 잘 몰라요. 전 세계 영화제를 보더라도 베를린을 빼놓고는 많은 영화제가 작은 도시에서 개최되고 있어요. 특히 바다가 있는 경관이 좋은 데서요. 그런 점에서 부산은 인구 4백만이 안되면서 산과 바다가 있기에 최적의 도시라고 할 수 있죠.”

부산이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그 영화제를 위해서 퀵 오토바이를 타는 위험도 감수했던 그였으나, 모든 고난을 그렇게 해서라도 꼭 이뤄내야 하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이뤄낸 영화제의 삶에서 얻은 최고의 수확이 있다면 바로‘사람’이었다. 그 중에서도 그의‘베스트 인연’은 바로 임권택 감독이었다.


“88년에 임감독하고 배우 신혜수씨하고 같이 몬트리올 영화제에 가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어요. 그 다음에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아제아제 바라아제>에 배우 강수연씨가 여우주연상을 받았고요. 그 두 영화제를 계기로 임감독하고 처음으로 가까워 졌고  강수연씨와 친하게 지내게 됐습니다.”

김 위원장은‘그때의 수확은 수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다. 그만큼 사람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 같은 아파트에서 31년 째 살고 있는 것부터 사람에 대한 질긴 진심을 주는 것, 거기에 한번도 자신의 일에 대해 반대한 적 없었다는 김 위원장의 아내까지. 그의 삶은 묵묵한 진심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영화계에 좌파는 없다.
영화제를 운영하는데 가장 힘든 점은 역시‘예산’이었다. 지금도 부산국제영화제의 예산지원은 정부에서 15%를 해주는 것이 고작이다. 부산시에서 59%, 나머지는 스폰서를 구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그가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얻은 가장 큰 보람은 ‘부산이라는 지역이미지, 브랜드를 높이고 경제적인 효과를 안겨주며, 동시에 한국영화 발전과 해외진출에 크게 기여한 점’이라 했다.


충무로를 기반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영화제의 꿈은 참담하게 무너졌다. 폐허나 마찬가지인 세계에서 다시 일어설 기반을 마련해 준 김동호 위원장은, 우리나라 영화제의 현실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갖고 있을까?
“우리나라 영화제가 많은 것엔 다 장·단이 있다고 봅니다. 그 영화제가 있음으로 인해 지역 주민들은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좋은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죠. 곧 지역 사회 주민들에게 이바지 하는 바도 상당히 크다고 생각해요. 단점이라면 색깔이나 정체성이 없으면 단순히 예산 낭비나 지방 자치단체장들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에요. 하지만 전 장점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장점과 단점을 모두 끌어안고 시작했던 한국영화의 본산 충무로 영화제. 그 영화제가 올해로 4회를 맞이했다. 하지만 시작에 이어 삐걱삐걱하더니 홍보수단으로 전락을 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었다.
“(충무로 영화제의 경우) 1회 때 창설 목표가 고전영화를 중심으로 한다고 했어요. 그 장점을 살려 나가면 성공할 수 있다고 봐요. 고전 영화 중심으로 시작을 했지만 다른 목표를 정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다만 특색 있는 영화제로 가는 게 좋아요.”
지금 정부에서는 독립영화 쪽으로는 지원을 완전히 끊은 상태다. 그런 부분에서 저예산 영화들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 역시  정부의 지원이 없는 것에 아쉬움을 표했다.

“독립영화 예산을 강화하면서 그런 영화들(저예산 영화)이 전국에 배포되고 일정기간 상영되도록 하는‘배급상영체제’를 개선시켜야 합니다. 정부에서 이런 영화관을 전국화하는데 많은 지원을 해줘야 해요.”
최근 독립영화전용관의 운영문제를 두고 시끄러웠다. 그들을‘좌파’로 내몰면서 정부는 냉랭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영화계에 좌파는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며,‘젊은 감독들이 사회비판적이거나 정부 비판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추세’라고 단언했다.  이어, ‘당연한 추세를 갖고 이데올로기적으로 몰고 가는 것은 난센스’라며 정부의 정책에 일침을 가했다.

“하고 싶은 일 보단, 해야 할 일을 먼저 하세요”
사람이 살다보면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두 가지가 상충될 때 사람들은 어떤 걸 우위에 둬야 할지 고민될 때가 많다. 영화를 몰랐지만 우연히 영화를 접하게 되고 그로 인해‘영화인’으로 거듭나는 삶을 살게 된 김동호 위원장. 그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먼저하고 다음에 재미있는 일을 해야 한다”며,“공적이든 사적이든 해야 될 일을 놔두고 재미있는 것부터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해야 할 일’을 선택했지만, 그 일을 결국‘하고 싶은 일’,‘재미있는 일’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올바른 신념과 집념, 또 해야 할 일에 대한 책임감은 세계적인 영화제를 탄생할 수 있게 했다.
오늘날 하고 싶은 일만을 하면서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직장을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젊은이들에게‘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면 그거 자체가 해야 할 일이 된다.’는 그의 말은 새삼 책임감과 집념에 대해 일깨우게 해준다.

영화제 후속감동,‘영화제 기행’
김동호 위원장은 아직 창창한 젊은이 같은 열정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할 일들이 무궁무진하고, 또 하고 싶은 일들도 많다. 내년에는 서울에 있는 일간지에 영화제를 소개하는 칼럼을 연재한다.
그러면서 세계영화제 기행에 관한 두 번째 책을 낼 예정이다. 70개 영화제 중에 38개를 수용한 책을 1권에서 선보이고 이제 그 두 번째인 셈이다.
그는 지난 15년 동안 70군데 정도 영화제를 다녔다. 전 세계 영화인들을 통틀어 그처럼 많은 영화제를 간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해서‘영화제 기행’을 책으로 출간하게 됐다. 또 사진을 따로 배우진 않았지만‘영화제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기 위해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많은 감독들이나 배우의 사진으로 사진전을 열게 됐다.


또한 김동호 위원장은 영화 만드는 작업에도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가 만드는 다큐멘터리가 어떤 감동으로 또 다시 우리에게 다가올지 사뭇 기대된다.
“2011년에는 서울문화투데이 독자들에게 행운과 행복과 기쁨과 큰 성취가 함께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또 젊은 사람들은 항상 도전 의식과 개척정신을 갖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신년 인사를 들으며 영화인으로 살아온 세월 동안 본 수 많은 영화들 중에 손에 꼽는 영화는 뭐가 있을지 궁금해 졌다.
그는 임 감독의‘절친’답게‘항상 임권택의 만다라가 가장 잘된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덧붙여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천국의 아이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인생은 아름다워’를 언급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김동호 위원장에게는 공무원에서 영화인이 되기까지의 삶의 주축에 항상 부산국제영화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태어난다면 부산국제영화제위원장을 안 한다고 했다. 그만큼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뜻일 터.
‘한번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창설했던 영화젠데 그걸 다시 반복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며, 오히려‘미술관 같은 것을 하나 지어서 후세에 남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느냐고 했다.

미술관장 김동호. 꽤‘잘’어울리겠다 싶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미술관이 하나 건립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에 친근한 미술제가 하나 나타났을지도 모르고.  마지막까지 자신은‘과대포장’된 거라며, 세간의 칭송에 대해 손을 내젓는 김동호 위원장.
영화제를 창설하고 운영하기까지의 노고를 이제 세상이 알아주기 시작했는데, 그는 망설임 없이 영광의 자리를 벗어나 등이 아름다운’사람이 되길 선택했다.
그의 아름다운 노년의 씩씩한 행보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