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재발견
길의 재발견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09.09.2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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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친화 · 관광 생태국가로 가야

몇 년 전 추석을 맞아 어린 시절 뛰어놀던 외갓집 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경북 군위군 고로면 인곡동인 그곳은 일찍이 일연스님(1206~1289)이 삼국유사를 저술했던 인각사(麟角寺)가 있는 고장으로 산이 깊고 경치가 좋다. 골짜기마다 흰 암반에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며, 개울 따라 펼쳐지는 버드나무 군락, 산기슭 바위마다 노송들의 자태가 일품인 곳이다. 개울바닥 돌틈엔 가재, 다슬기, 피라미 등 온갖 생물들이 살고 있다. 개울가엔 언제 누가 쌓았는지 모를 돌 축대가 이어지며, 산기슭 사면 따라 논밭들을 일궈냈다. 논밭 가운데엔 듬성듬성 바위들이 자리 잡고, 그곳 언저리마다 심어진 오래 된 감나무들도 철 따라 독특한 풍광을 이룬다. 

그런 산골에 속칭 ‘대의’, ‘분자골’, ‘핌팜’이라 불리는 세 개의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들을 하나로 묶으면 행정동 ‘인곡동’이 된다. 인곡동 사람들의 삶은 한마디로 골짜기 개울을 따라 쌓아 올린 돌 축대와 그 돌 축대 위 산기슭에 가꾸어진 논밭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언제 누가 어떤 방식으로 이런 산골 개울가에 이리 튼튼한 축대를 쌓고 논밭을 만들며 삶을 일구어 갔는지 놀라울 뿐이다.

아마도 오랜 세월에 걸쳐 화전민에서부터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산골로 숨어든 선비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많은 이들이 피와 땀으로 이 산골 마을을 개척해 갔을 터이다. 흔히 말하는 민초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삶의 의지가 골짜기 돌을 모아 축대를 쌓고, 개울을 다스리며, 길을 내고, 바위와 싸워 논밭을 가꾸었을 것이다. 또한 돌담을 쌓아 담장을 내며 집도 지었을 것이다.

‘핌팜’이라는 마을 이름은 그런 사람들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원래 ‘편파암’(片破巖)이란 한자 이름에서 유래된 ‘핌팜’이란 동네 이름은 문자 그대로 ‘깨어진 바위조각’이란 뜻이다. 즉 바위를 깨어 논밭을 일구며 마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실제 이 동네를 보면 논밭들이 온통 바위들로 차 있다. 논밭 가운데 바위들이 있다기보다 바위를 뚫고 깨서 바위 가운데 논밭을 만든 모습이다.

그래서 ‘편파암=핌팜’이 된 것이다. 안타까운 건 고로면의 대부분이 대구시민의 식수용 댐에 잠기면서 ‘대의’ 마을 아래까지 수몰될 처지인데, ‘대의’ 마을에서 ‘분자골’과 ‘핌팜’으로 이어지던 아름다운 오솔길과 돌 축대길, 그 논밭 길들이 콘크리트 시멘트 길로 덮여버린 것이다. 댐 건설을 반대하던 현지 주민들을 무마할 겸 생활상의 편의를 위해 자동차 길을 닦아준 것이다.

하지만 오랜만에 아름다운 외갓집 고장을 떠올리며 찾았던 필자는 옛 사람들의 피땀 어린 삶의 흔적들이 흉물스런 시멘트더미에 묻혀버린 현장을 보면서 가슴을 치다 돌아왔다. 꼭 길을 내야 했다면 옛길을 살리고, 산허리를 깎아 새 길을 만들 수도 있었겠건만, 현대인의 무개념ㆍ무지와 안목 없음에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경복궁이나 불국사나 종묘처럼 꼭 이름난 유산만 문화가 아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골골마다 농촌마다 우리 민초들의 피땀 어린 흔적들도 다 문화다. 그곳에 남은 논둑길, 돌 축대, 똠방 길, 돌담 길, 오솔길, 장터 가던 옛 길, 고갯길이 다 문화요 역사이며,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왕이나 귀족이나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의 이야기와 흔적만이 역사이고 문화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살았던 수많은 민초들이 삶으로, 노동으로 남긴 흔적과 길들이 다 역사며 문화다.

최근 제주도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 각광을 받으며, 전국적으로 ‘길의 재발견’ 붐이 조성되는 분위기다. 서울에선 북한산 둘레길이 개발되며, 전북에선 ‘에움 길’, 강원도엔 ‘산소길’, 충북에선 ‘청풍명월 길’이 각 지방 역사와 문화와 정서를 대변하는 브랜드 마크로 개발된다는 소식이다.

이참에 전국 모든 시ㆍ군마다 그동안 잊혀졌던 옛 사람들, 민초들의 흔적과 옛 길의 가치를 재발견, 역사문화 관광자원으로 가꾸었으면 한다. 각 지방, 각 농촌은 제각기 역사와 문화와 관광자원의 보고다. 그런 자원들과 각 지방 특산물이 하나로 묶여질 때 우리 농촌의 살길도 열릴 것이다. 흔히 말하는 기업농의 관점, 생산성과 이윤추구의 잣대로만 농촌을 바라보는 경향은 오히려 농촌을 죽이는 것이며, 우리 문화와 역사와 관광자원과 정체성 상실이란 더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길의 재발견’ 붐을 보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는 자연친화 생태국가, 역사와 문화와 관광을 먹고사는 나라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더 갖게 된다. 아울러 그리운 나의 외갓집, 그 아름다운 ‘핌팜’ 가는 길, ‘분자골’ 가는 길도 옛 모습을 되찾기를 기대해 본다. 아래쪽에 건설되는 ‘고로 댐’과 함께 반드시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