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허영일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원장] "꿈과 희망 포기하지 마라"
[인터뷰-허영일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원장] "꿈과 희망 포기하지 마라"
  • 윤다함 기자
  • 승인 2014.11.0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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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민족무용연구소 설립과 서울국제무용콩쿠르 개최 가장 보람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요 몇 년 사이 많은 비바람에 시달렸다. 학교 안팎으로 그동안 쌓여왔던 여러 문제들이 봇물 터지 듯 줄줄이 새 나왔다. 급기야 학교 측은 총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와 함께 자정과 쇄신을 다짐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맞았다. 그 가운데 무용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허영일 원장 임기 이전 문제들이 여러 형태로 표출되면서 상당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허 원장은 꿋꿋하게 주변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원장직분은 물론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여러 일들을 대과없이 마무리해 오고 있다. 그런 그가  춤 인생 40년, 더 거슬러 올라가면 50년의 세월을 맞았다.

허영일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원장, 세계민족무용연구소 소장, 서울국제무용콩쿠르 집행위원장 /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조직위원장 등 역임 /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무용학 석사,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 학사 / 제4회 객석 예술평론상 대상 수상

그는 무용원장뿐만 아니라 교내에 세계민족무용연구소를 설립해 15년간 민속춤에 대한 연구와 공연을 이어왔으며, 민속춤 장르가 포함된 서울국제무용콩쿠르를 10년 째 감당해 오고 있다. 내년이면 정년퇴임을 하게 되는 허 원장을 만나 그간 추구해온 춤 세계와 교육자로서의 자세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동아시아 6개나라 궁중무용을 비롯해 세계 11개 민족무용을 통해 인류 문화다양성을 재발견하는 뜻 깊은 공연이 지난달 15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렸다. 허영일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이 소장으로 있는 세계민족무용연구소(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부설, 이하 연구소)가 '세계 민족 무용의 몸말 - 인류 문화다양성의 재발견'을 주제로 11개국에 이르는 다양한 민족무용을 한 자리에서 선보인 것. 또한 연구소 설립 15주년 기념무대였던 이번 공연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관심과 연구가 미진한 아시아권을 중심으로 세계의 다채로운 민족무용을 소개함으로써 인류의 문화적 다양성을 재확인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15년에 걸쳐 세계 각국의 민족무용 및 우리 궁중 정재 복원, 세계 민족 춤의 레퍼토리를 모아왔기에 이는 굉장히 방대한 축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일 무용교류 첫 수익금 1억원 쾌척 연구소 설립

90년대 후반, 한일문화 자문위원이었던 그가 전통을 중심으로 한일문화공연을 올려보자고 정부에 제안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아 그는 직접 일본을 오가며 혼자 힘으로 공연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조상신을 주제로 한 ‘세계무형문화재 초청시리즈’ 일본 전통춤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고, 이는 전통예능으로서는 한·일간의 첫 교류 자리였다. 당시 언론 등에서 큰 관심과 조명을 받은 그는 다음해에 다시 무대를 올릴 수 있었고, 공연수익금 1억 원이라는 성공적인 결실을 얻는다. 그는 이 수익금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한예종에 몸담고 있었던 그는 무언가 학생들에게 남겨줄만한 것을 만들고 싶었고, 학교 부설로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다. 주변에서 만류도 있었지만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도 학교 내에 설립하기를 너무나도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이후에도 ‘세계무형문화재 초청시리즈’는 계속 이어져오며, 2009년까지 총 12회에 걸쳐 일본, 인도, 필리핀, 중국, 방글라데시, 캄보디아, 몽골 등 각국의 무형문화재를 초청해 오고 있으며, 이를 통해 각 나라의 문화정서를 이해함과 동시에 국제교류의 중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공연에는 일본 측 초청인사인 야마모토 도지로(山本東次郞)와 도모에다 아키요(友枝昭世)는 일본의 국보급 인간문화재로 그동안 쌓아온 교류와 신뢰로 우정 출연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허 원장이 공연 1년 전부터 섭외하기 위해 힘쓴 결과이다. ‘인간국보’인 그들의 개런티 때문에 망설이던 허 원장이 지난해 용기내 말을 꺼냈더니 그들 또한 허 원장의 민족무용 발전에 대한 마음과 헌신을 알았던지라 개런티 없이 무료로 무대에 오르겠다며 흔쾌히 응해주었다는 사실. 특히 이 두 인간문화재가 동시에 한 무대에 오른 적이 없었는데 이번 공연을 통해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된 의미도 더한다 .2012년 인간국보로 선정된 야마모토 도지로는 1999년 ‘일본 전통무용 노가쿠’ 초청 공연으로 연구소와 인연을 맺은 이래 꾸준한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도모에다 아키요는 2008년 인간국보로 선정됐으며, 2011년에는 일본예술원 회원이 됐다. 그는 특히 2000년 한일고전예능제의 한국 공연 등 전통예능을 통한 한일의문화 교류에 적극 참여해오고 있다.

둘째 날은 연구소가 문화콘텐츠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해 온 결과인 '전통문화콘텐츠 재현공연'을 통해 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민족무용과 전통문화의 대표적 문화콘텐츠인 연경당 진작례를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의 40세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의식을 재현한 ‘연경당 진작례’는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황금기로 불리는 순조 재위 기간 중 열린 연회의식을 기록한 진작의궤를 4년간 복원한 끝에 선보인 공연이라 그 의미가 더욱 크다. 버들가지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를 듣고 이를 무용화한 ‘춘앵전’은 효명세자가 어머니 숙원숙황후의 4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정재로, 효명세자의 효심을 볼 수 있다.

최초극장 연경당 23가지 정재, 첫 발굴

창덕궁 후원에 사대부가의 풍모로 지어진 궁중 건물인 연경당은 기존 연구에서 1828년(순조 28)에 사대부의 생활을 알기 위해 세자가 왕께 요청해 창건됐다고 알려졌지만, 최근 밝혀진 바로는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경축의식을 맞아서 이를 거행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연경(演慶)’이라는 이름 또한 경사스러운 행사를 연행(演行)한다는 의미에서 따온 것이라고. 허 원장은 창경궁 연경당에서 문화예술공연을 최초로 시도한 바 있다.  그가 연경당을 주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으로서 23가지에 달하는 춤이 올려졌다는 사실을 발굴해 세상에 알렸다.

연구소는 세계 각국의 민족무용 연구와 교류를 통해 우리 민족 무용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아울러 세계민족무용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설립된 것으로, 동아시아 및 세계 각국의 무형문화유산을 계속적으로 국내 무대에 올리는 작업과 동시에 우리의 뛰어난 전통 예술을 세계무대에 알리고 세계 민족무용간 비교연구의 학술적 기반을 다져나가고 있다. 이외에도 순조 무자년 연경당 진작례 복원공연 등 무용의 고증 복원 작업 및 국내외 공연을 통해 우리의 문화 위상을 국내외에 알리며, 더불어 새로운 무용공연 형태를 찾고, 해외공연에서 얻을 수 있는 우리 무용과 문화의 강점 및 특성을 파악해 향후 우리 문화의 경쟁력의 토대를 쌓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비교문화의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의 전통문화를 워크숍과 공연을 통해 상호 교류한다. 국제 민족무용 심포지엄 개최 및 학술지 발간 2002년 이래로 현재까지 총 13권의 『민족무용』학술지를 발간하였다. 2009년 한국학술진흥재단 기초 연구과제지원 인문사회분야에 선정돼 한국 전통 무용원류 탐구를 위한 동아시아 원전자료 집성 및 DB 구축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국내학생 위해 SIDC 개최

지난 8월 제11회 서울국제무용콩쿠르Seoul International Dance Competition(이하 SIDC)가 5일간에 걸쳐 올려졌다.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개막해 20개국 400여 명이 참가해 역대 최대 규모 행사로 개최된 이번 콩쿠르를 통해 미래의 스타무용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자리였다.

허 원장이 첫 회부터 집행위원장을 맡아온 SIDC는 발레, 컨템포러리무용, 민족무용 등을 아우르는 유일한 콩쿠르로서, 지난 10년간 아시아에서 가장 큰 무용올림픽으로 성장해왔다. 또한 우리 춤을 세계에 널리 알림과 동시에 한국무용수의 세계적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자, 문화국가로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교량역할을 해왔다. 젊고 유망한 무용수들을 발굴해 국제적인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자는 취지 아래 지난 2004년부터 매년 거행돼왔다. 북경국제무용콩쿠르 선정 세계 주요 무용콩쿠르 등을 통해 명실상부 아시아 최고의 경연대회로 공인받으며 세계 무용계의 한류바람에 힘쓰고 있다.

SIDC의 지난 10년에 대해 묻자 그가 뜻밖의 말을 꺼낸다, ‘원래 하려고 해서 시작한 게 아니었다.’며. 처음 시작은 문체부로부터의 제의였다. 허 원장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그간의 연구소 운영을 지켜본 문체부에서는 콩쿠르를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당시 그는 국내 첫 설립되는 국제콩쿠르에 대한 큰 의미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으로 콩쿠르 한 번 나갈라치면 수 백 만 원쯤은 우습게 들어가는 우리 학생들의 현실을 보곤 재능 있는 학생들을 위해 콩쿠르 설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한다. “국내에서 개최하면 우리 학생들은 참가비만 내면 되니까. 경쟁은 두 번째였어요. 일단은 능력 있는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죠. 또한 참가자들에게 최대한 좋은 극장을 제공해주고 싶었어요. 아르코예술극장이나 토월극장 등과 같이 좋은 환경을 갖춘 유명극장에서 자신이 무대를 올렸다는 자부심을 심어주고 싶었죠. 그 뜻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오케스트라까지도 두고자 했지만 아무래도 제한된 예산으로는 힘든 부분이라 아직까지 계획으로만 생각하고 있네요.”

발레 전공도 아닌 그가 인맥도 정보도 부족한 상태로 뛰어들었지만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여러 선배님들 도움으로 첫 회를 시작할 수 있었고, 이후 한, 두 해 도움을 받았지만 점차 사람들이 날 따라와 주고 믿어주더군요.”
2회 때부터 그는 세계 최초로 민족무용을 콩쿠르 경연부문에 추가하게 된다. 그러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들고 일어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족무용은 각 국가별로 그 특성이 다르기에 평가기준이 모호하다는 점이 문제로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방법이 바로 매해 주제를 제시해 보다 구체적인 평가기준을 마련했으며, 참가국을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으로 제한했다.
“동양의 전통예술은 서양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역사가 깊고 다양합니다. 민족무용의 국제콩쿠르는 전통을 전승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시대에 맞는 전통을 재창조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었기에 필수적이었어요. 최근에는 한 심사위원이 제게 이렇게 말해주더군요. 우리 콩쿠르를 통해 민족무용에 대한 가치관이 섰고, 평가기준이 생기게 됐다면서요.”

레오니드 사라파노프, 이은원 등 스타 배출

현재 마린스키발레단 주역으로 활동 중인 레오니드 사라파노프(제1회 그랑프리 수상),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 발레단에 소속돼 있는 이상은(제2회 그랑프리 수상), 국립발레단의 이은원(제3회 그랑프리 수상), EDx2 댄스컴퍼니 대표인 이인수(제3회 현대무용 시니어 남자 2등 수상), 지동동 베이징댄스아카데미 교수(제7회 민족무용 창작무 시니어 남자 2등 수상) 등 SIDC를 거쳐간 유수의 무용가들이 세계적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우리 콩쿠르에 오고 싶어 하는 심사위원들이 많다는 소리를 자주 듣곤 합니다. 내가 심사위원분들께 꼭 부탁하는 점이 있어요. 수상자들이 세계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라고요. 우리 콩쿠르를 통해 아이들이 단순한 경쟁을 넘어서 세계무대에서의 우정을 다지고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그런 장이 되길 바라거든요.”
콩쿠르의 세미파이널에서 합격하지 못한 참가자들에게는 심사위원들이 직접 30분간 ‘원 포인트 레슨’을 해줌으로써 탈락자들에게도 보다 더 실력과 수준을 향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한다.

끝으로 그에게 민족무용의 중요성에 대해 물었다. “춤은 희로애락의 가장 강력한 호소라고 봅니다. 저는 늘 전통과 현대가 공존해야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더군다나 창작에서는 더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양한 몸짓의 은행이라고나 할까요. 공통적인 세계 언어가 바로 춤이고, 그 원형이 민족무용입니다.”

그의 무용원장 임기는 내년 2월까지로 마감된다. 그는 평생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썼으니 은퇴 후에는 자신도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젠 행정에서 벗어나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살고 싶다는 뜻이다. 한 1년 정도는 실컷 놀 거라며 웃는다. 그는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꿈과 희망을 포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단다. 하루하루 목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꿈과 희망의 에너지로 가득 찬 사람과 어떻게 같겠냐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에게 늘 강조하는 점이었고, 학교를 떠난 후에도 자신 역시 그런 삶을 살 것이라고 다짐하는 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