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행위미술가들①] 조은성, 따뜻한 감성의 교감이 온통 너울거리는 세상 꿈꾸기
[한국의 행위미술가들①] 조은성, 따뜻한 감성의 교감이 온통 너울거리는 세상 꿈꾸기
  • 이혁발 예술연구소 육감도
  • 승인 2024.04.2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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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미술은 개념(정신)과 행위(몸)의 환상적 만남(콜라보)이다.

연재에 들어가며  
행위미술가는 전통적인 매체(회화, 조각 등)로 작업하는 작가보다 순수예술 의지가 훨씬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상품화)과 명성을 쫓아가지 않고, 그저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작업에 대한 열망이 넘쳐나는 이들입니다. 순수의지의 충만에 대한 보상은 그 작품을 감상해주는 것이고 반응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 지면에서의 기록은 작가의 창작 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습니다.

행위미술은 ‘행위(몸)’가 주인 듯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개념미술 작업입니다. 행위미술은 개념과 행위가 함께 하며, 어떤 재료, 어떤 형식, 그 무엇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예술 장르도 행위미술 만큼 품이 넓지 않습니다.

간단한 개념적 행위에서부터 온갖 매체나 방법을 동원할 수 있는 이 행위미술 작품을 감상하면 온몸(정신이 포함된), 즉 총체적으로 정서적 자극을 느낍니다. 생각하게 만드는 미술입니다. 다시 말하면 온몸에 전율/떨림/울림을 주는 미술입니다.

이렇듯 현장에서의 행위미술 관람은 관객을 눈으로만 감상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놔두지 않습니다. 관객이 행위자가 함께하며 작품 안에서 같이 출렁거리게 됩니다. 전율/떨림/울림이 있는 ‘공동현존’에서 오는 충만함, 쾌감, 감동을 지면에서나마 함께 하고자 합니다.

덧붙이자면 이 연재가 끝난 후 ‘행위미술애호가’가 조금이라도 더 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글을 시작합니다.
여기 초대하는 작가 선정은 역량 있는 작품을 해온 작가들을 위주로 40대~50대~60대 초반의 작가부터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마지막 실험미술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원로급 작가들을 다루고자 합니다.                             

“강령탈춤 예인이고 행위예술가입니다”
조은성은 고등학교 때 연극으로 무대예술을 접했고, 졸업 후 회사에 다니면서도 배우로 대학로 연극무대에 한 달 동안 34회나 섰었다. 하지만 같은 역할의 반복 공연, 한정된 무대 등에 답답함을 느끼던 자유로운 예술혼은 행위예술이라는 장르로 시야를 확장하게 된다. ‘아트 로봇’이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운영하던 김광철 작가의 제안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첫 작품을 발표하게 된다.

▲<Untitled>, 5Pointz 갤러리, 2012. ⓒ최도진

행위미술을 시작한 2004년 같은 해, 같은 시기에 강령탈춤을 시작해서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34호 강령탈춤 예인이고, 행위예술가” 두 역할을 함께 하고 있다. 20년 세월은 만신(무당) 역할의 강령탈춤 예인으로서의 체화된 몸을 갖게 하였고, 그 몸이 개념미술적인 행위미술에도 적절히 교합하며, 탁월한 발상의 행위미술가로 싱싱하게 활동하고 있다. 더구나 미술 전공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행위미술사에 큰 족적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부재, 결핍을 겪은 자, 따뜻하고 풍성한 감성 전도사로
등단 초기에는 가짜로 길게 연장한 머리카락을 사방에 묶인 채로 움직이지 않는 자전거 바퀴를 열심히 돌리는 행위 <껄끄러운 것들>(2005) 같이 사회적 모순이나 부조리에 관련한 작품을 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부재를 겪었던 작가가 할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리고선 <죽음을 대면하는 자세>(2009)라는 전환기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그전 행위작품과 달리 작가가 “삶과 행위가 일치되는 퍼포먼스로 기억”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일상복을 하나하나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밀가루가 잔뜩 쌓인 소파 위를 상여 종 치면서 계속 뛰는 장면이 압권이다. 할머니와의 가슴 저미는 영원한 이별에 온몸으로 절절히 부른 장송곡이었다.

이 작업 후는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우러나오는 작업이 되었다. 이 부족한 성장기를 보낸 작가는 따뜻한 물을 수채화 붓으로 찍어 관객의 얼굴과 몸, 자신의 얼굴과 가슴에도 바르는 행위, <터치 Touch>(2014) 같은 작품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과 접촉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죽음을 대면하는 자세>, 서교예술실험센터 옥상, 2009 ⓒKOPAS

이후 여러 작품에서 잊었던 감각을 일깨우고 감각의 풍성함이 서로에게 너울지기를 바라는 ‘감성/애정 전도사’를 하고 있다. 오감에 관련된 여러 행위로 따뜻한 감성 교감의 소중함을 인지하고 감사하며 살자고 주창하여 왔다. 서로 보듬어주며 모두 행복해지자고 행위로 말해오고 있다.

독자가 작가다--‘행위자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현존’
소설책의 진정한 주인은 독자이다. 아니 “독자가 작가다”라고까지 한다. 독자가 읽음으로써 소설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은 소설가도 아니고 독자도 아니고 소설과 독자의 만남, 그 접촉에 있는 것이다. 사과의 맛도 사과에 있지 않고 먹는 사람의 입안에도 있지 않고 사과와 먹는 사람 간의 접촉에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행위미술의 맛도 관객과 행위자의 ‘접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 접속/접촉이 적극적으로 발생하면 관객이 제2의 작가/행위자가 된다. 이렇게 행위자와 관객의 접속/접촉을 에리카 피셔-리히테는 ‘행위자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 현존’이라 명하였다. 이 공동현존이 이뤄지는 조건으로 ‘행위자와 관객의 역할 바꾸기’, ‘그들 간의 공동체 형성’, ‘상호 간의 접촉’, 이 세 가지를 꼽았다.

▲<Touch>, 안동문화예술의전당, 2014 ⓒ권영일

이 세 가지 조건이 다 이뤄진 작품이 <인지>(2022) 이다. 조은성(행위자)은 자신의 피부를 팔레트로 사용하라고 했다. 작가는 관객(1행위자로 바뀐)을 도와주는 2행위자가 된 것이다. 또 다른 관객(행위자)이 만들어진 캔버스(행위자=관객 몸)에 그리는 즐거움을 만끽했고, 캔버스가 된 관객은 붓질의 그 아사모사하고 스사브사한 붓질의 감각을 느끼며 존재의 자각 속에 있었을 것이다. 행위자와 관객이 모두 행위자가 되어 함께 행위를 하며, 서로 에너지를 교환하고, 서로 감응했고 함께 출렁거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이 공동으로 ‘현존’했다는 것이다. 현존은 ‘현재 살아있음’이다. 현재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 순간순간의 자각이 존재의 한 가운데 있게 하는 것이다. 참여자들 모두는 존재(살아 있음)의 한 가운데서 작은 피부의 떨림도 인지되는/하는 각성의 기쁨 속에 있었을 것이다. ‘행위자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 현존’ 의 모범사례 같은 작품이다.

▲<인지>, 밀양 아리랑아트센터, 2022 ⓒ이혁발

노란 꽃씨로 나누는 위로와 치유의 사회적 퍼포먼스
따뜻한 감성의 교감이 너울거리는 행복한 세상을 꿈꿔온 작가에게 세월호 참사의 충격은 추모 행사 [노란 꽃씨]를 기획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인재 앞에서 할 수 있는 건 그 영령들을 위로하는 것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 추모예술제가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감정들을 치유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총감독이라는 직책으로 십 수명이 참여하는 추모예술제를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1주기에 시작한 후 매년 진행해 왔다. 1회 때부터 노란 꽃씨를 한 줌씩 포장해 노란 리본과 함께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이벤트를 지속해왔다.

조은성은 대못과 노란 꽃을 입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 물고 304명의 희생자 이름을 부르는 퍼포먼스인 <노란 꽃씨>(2023) 작품처럼 매년 작품 발표도 해왔다. 이렇게 여러 작가의 작품들과 이벤트 등 이 행사 전체를 조은성 작품이라 칭할 수 있다. 또한, 이 행사가 많은 이들에게 치유의 역할도 하는 것이므로 총감독인 조은성은 지금 이 시대 무당(만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란 꽃씨>, 목포 신항만 세월호 배 앞, 2023 ⓒ권영일

또한, 이것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사회적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요셉 보이스가 떡갈나무 7,000그루를 시민들과 함께 심는 프로젝트 작품과 유사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요셉 보이스의 떡갈나무와 비견되는 것이 조은성에겐 노란 꽃씨이다. 노란 꽃이 활짝 피면 위로와 아픔의 교감들과 치유와 정서의 안정 효과들이 하늘하늘, 멀리멀리 퍼져나갈 것이다. 

사유를 끌어내는 탁월함
간단한 재료와 행위로 조은성만의 탁월한 작품을 지면상 하나만 소개하고자 한다. 작품 <Untitled>(2012)은 허벅지 한쪽에는 얼음 덩어리를, 한쪽에는 양초를, 케이블 타이를 이용해 고정시킨 후, 다리의 여러 움직임을 하다가 마지막에 양초 불을 이용해 얼음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얼음을 가까이해 촛불도 꺼트리는 작업이다.

촛불과 얼음의 대비는 따스함과 차가움, 열정과 냉정, 움직임과 정지, 존재와 부재 등 대비되고 동시에 함께 존재해야 하는 세상의 온갖 상황들을 사유하게 한다. 작품 이미지도 매우 강렬하여 오랫동안 이미지가 남아 있게 만드는 이 작품은 조은성의 탁월한 재능이 발휘된 대표작 중 하나이다.

단 한 번의 인생, 단 한 번의 행위미술
조은성은 똑같은 작품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원칙으로 작업하고 있다. 행위미술에서 ‘일회성’이라는 특성은 한 번의 행위, 1회만 한다는 것이다. ‘행위’ 하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며 행위 후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한 곡 드로잉>, 기린미술관, 2024 ⓒ손경대

행위미술의 이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조은성은 미술의 상품성을 거부하고 탈물질, 무소유의 자유로운 영혼이고자 하는 행위미술가들의 본령을 성실히 실행하고 있다.

이 ‘일회성’의 특성을 살린 작품 <한 곡 드로잉>(2024)을 소개한다. 한 관객을 불러 노래 한 곡을 선택하게 하고, 그 신나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오는 동안 향 하나씩 들고, 노래에 맞춰 춤추듯 이동하며 향 연기로 허공에 드로잉을 하였다. 행위의 어떤 물질적 흔적도 남기지 않는 ‘허공 드로잉’이었다. 드로잉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 향은 코끝에서 살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