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왕국의 행복한 백성으로 살기
미디어왕국의 행복한 백성으로 살기
  • 임해리 작가
  • 승인 2009.04.1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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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리 작가

내가 사는 나라는 세계 제일의 인터넷 강국으로 등극하였고 TV프로그램의 재미는 선진국이 감히 따라오지 못할 수준을 자랑한다.

▲ 임해리 작가
하지만 대학 졸업생의 반이 취업준비생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고 직장인은 언제 쫓겨날지 모르고 자영업자들은 먹고 살기 힘들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 와중에 우리 미디어왕국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언젠가 나는 하루 종일 TV를 시청한 적이 있다. 열 시간 이상 TV앞에 눈을 꽂았더니 머리가 아프고 급기야 눈이 충혈 될 지경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프로그램들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저녁 황금시청시간 대에 방영되는 드라마들이 무척 자극적이고 유혹적이다. 아니 어쩜 그렇게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기가 막히게 잘 건드리는지 방송작가들의 천재적인 능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모 드라마의 내용은 이렇다.

시댁식구들이 며느리를 식모처럼 부려먹고 구박하는 것도 모자라 남편은 아내의 친구와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에 눈멀어 아내를 죽이려고 하고 그 아내 친구는 알고 보니 아내의 오빠와 살던 여자였고, 아내는 복수를 신나게 하고 시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누이동생이라 속이며 살고 가장 악독한 인물로 나오는 아내의 친구는 절규한다. 자신은 아무개를 사랑한 것뿐이라고...

그 외의 드라마들도 미혼모가 애 낳아 키우다 사랑에 눈 먼 멋진 남자 만나 또 사랑을 받는 얘기, 수십년 동안 남몰래 사랑하며 아내와 연인사이에서 애도 낳고 갈등하는 남자의 러브스토리, 게다가 아프리카의 처녀를 데려와 보살펴 주는 착한(?) 의사얘기 등등 채널을 어디에 고정시킬까 고민이 될 정도로 우리 드라마들이 재미있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멜로에 액션(납치, 감금, 주먹질)과 코믹, 공포(살인미수, 절도, 협박)를 적당히 짬뽕시켰으니 나이와 학력, 경제력과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들 빠져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꽃미남들이 심성도 좋고 제작비를 과감히 쓴 덕에 우리 가난한 백성들이 앉아서 눈의 호사를 즐기며 현대판 신데렐라편에 열광할 수 있었다.

드라마뿐 아니라 리얼다큐 오락프로그램은 현실의 고통을 잊기에 너무나 좋은 진통제와 같다. 어리버리한 인물들이 나와 좌충우돌하며 새로운 곳에서 고생하며 서로의 우정을 다지는 얘기는 머리 아플 때 보면 딱 좋은 프로들이다.

일요일 아침에는 채널마다 맛집 여행에 대한 정보로 넘쳐나고 오후에는 영화소개 프로가 친절하게 방영된다. 그리고 저녁에는 오락프로들이 저마다 경쟁하고 개 사랑하는 매니아들을 위해 강아지프로가 빠지지 않는다.

최근에 영화를 줄 창 보았다. 헐리웃 영화는 다시 휴먼모드로 진화하고 있는데 우리 영화들은 행로가 불투명한 것 같았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고 나왔는데 잘생긴 대학생이 말하기를 “난 저런 밑도 끝도 없고 주제가 없는 영화는 넘 짜증 나!” 영화에 대한 취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최소한 2시간 본 영화의 주제는 파악해야 되는 것 아닌가?

미디어 왕국의 행복한 백성의 실체를 보았다. 지금 우리 대중문화의 취향은 과연 건강한 것인가? 모르핀으로 삶을 지탱하게 만드는 미디어 왕국, 이대로 안전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