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 인플레이션
호칭 인플레이션
  • 김은희 / 수필가
  • 승인 2011.03.24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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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어머니가 입원하셨다. 양쪽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받기로 하신 것이다. 한 달 정도의 입원에 대비해 아예 간병인 아주머니도 알아봐 달라고 병원측에 미리 부탁을 했다.
병원에 입원해서 간병인 아주머니를 소개받았다.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할 사이도 없이‘간병인들의 반장님’이라는 분이 “오늘부터 이 여사님이 어머님을 도와드릴 거예요”하신다. 해외에서 오래 산 나는 병원에 와서야 미화원 아주머니들이나 간병하시는 분들의 호칭이‘여사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칭은 상대방에 대해 부르는 사람의 태도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자신에 대한  경의(敬意)를 나타내기를 바라는 바람의 표현이기도 한다.

러시아의 문학비평가 B. 우스펜스키는『소설구성의 시학』에서‘명명(命名, naming)’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그는“어떤 사람을 명명하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태도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조건 지워진다”라고 언급한다.그 예로 저널리즘의 글들을 지적했는데 나폴레옹이 백일천하의 권력을 쥐기 전인 1815년 파리로 향하는 동안 파리의 신문들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각기 다르게 명명한 것을 대표적 사례로 꼽았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프랑스에 도착한 것을 맨 처음 알린 언론은“코르시카의 괴물이 주안 만에 상륙했다”였고, 두 번째 기사에서는“식인종이 그라스를 향해 전진한다”였으며, 세 번째는“찬탈자가 그르노블에 입성했다”, 네 번째는“보나파르트가 리움을 점령했다”, 다섯 번째는“나폴레옹이 퐁텐블로에 접근한다”, 여섯 번째는“그의 충성스러운 파리는 이제 황제폐하를 고대한다”였다. 나폴레옹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명칭에서부터 극명하게 달라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씁쓸한 사례다.
러시아에선 제정 러시아 시대에 썼던 호칭인‘나리’,‘마님’대신에 구소련 시대엔 모든 사람들이‘동무’였다. 독재자로 유명한 스탈린도 자신의 호칭은‘스탈린 동무’하나로 족하게 여겼다.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위대한 스탈린 동지’가 던져준 작은 위안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호칭에 있어서는 어쨌든 평등을 이루었다고 볼 수도 있다.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호칭과 존칭에 혼란을 겪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일반화된 존칭은 그 사람의 직위나 신분에 상관없이‘부(父)칭과 이름’을 함께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총리나 대통령도‘각하’나‘대통령’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푸틴),“드미트리 아나톨리예비치”(메드베데프)면 된다. 
그러나 한국에선 다르다. 상점에선 무조건 “사장님, 사모님”이다. 길거리에서도“아줌마, 아저씨”라 부르면 돌아보지도 않는다. 직장에선 세분화된‘직위’에‘님’을 붙여 꼭 누가 더 높고 낮은지를 구별해야만 하고 그 구별은 곧 차별이 된다.
식당에선 손님이나 일하시는 분의 나이에 상관없이‘이모’라고 부른다. 아마도 음식을 만들거나 서빙하는 분들에게“자신들을 친조카처럼 살갑게 대해 달라”는 손님들의 애교 섞인 바람이 반영된 것인 듯싶다.
일상 속에서 관계를 맺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보이지 않는 경시를 막기 위한 보호본능이 오히려 과장된 '호칭 인플레이션'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호칭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