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선진국’ ‘문화대국’이란
‘진정한 선진국’ ‘문화대국’이란
  • 권대섭 대기자
  • 승인 2011.06.21 23: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증도가자(證道歌字)’ 둘러싼 중국 측 입장에 대해

 

대학시절 백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다.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복학이후 졸업 때 까지 내내 그랬다. 가슴에 머리에 ‘한국 문화의 주체성 확립’이란 화두가 꽉 차 있을 때였다. 대단한 뭐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어려서 읽은 책이나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학교 교육을 통해 한 나라와 민족이 살아가는 데 있어 문화적 자부심과 정체성, 주체성을 확립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걸 생각해서였다.
 
 문화적 주체성이란 뭘까, 그걸 상징할 만한 사물이나 현상이 뭘까를 생각하던 끝에 백고무신을 생각해 냈다. 고무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나 남미 등 열대 국가이다.

그런데 그게 우리나라에 와서 고무신이 되었을 때, 그것은 완전히 한국적인 것이었다. 어릴 적 시골 집 섬돌위에 가지런히 놓였던 고무신들이 그렇고, 학교 갔다 오다 물살 센 개울에 떠내려 보내고, 한 쪽 발을 맨 발로 돌자갈 길 걸어 집에 와야 했던 고무신이 그랬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주시경 선생 이야기를 읽을 때, 삽화 속 선생님이 두루마기와 함께 신고 있던 고무신도 그랬다. 그래서 고무신하면 완전히 우리 생활에 체화된 ‘우리만의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백고무신 하면 왠지  ‘백의민족’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래서 내린 결론, ‘아하! 문화적 주체성이란 바로 그런 거다. 어차피 세계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 다양한 종교와 사상, 다양한 문화와 역사, 산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곳, 다른 것들 끼리 서로 어울려 사는 곳,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다른 것끼리 서로 주고 받되, 그것에 동화되거나 종속되지 않고, 또 동화시키거나 지배하려 들지 말고, 서로 인정하며 남의 것도 자기 것으로 체화하고 재창조하는 능력...그럼으로써 세계와  공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문화적 주체성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고무신이 확연히 떠올랐다. 고무야 말로 원래 우리 땅 산물이 아니지만 우리 땅에서 고무신이 되었을 때, 완전히 ‘우리 고무신’이 됐던 것이다. 특히 백고무신은 지금도 시골 할배들 한복 두루마기와 너무 잘 어울리는 한국적인 물건이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민족의 문화적 주체성을 상징하는 생활물건이라 생각됐던 것이다. 외래 것이되, 우리 것으로 만들어 창조하고 체화(體化)한 생활문화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고춧가루도 마찬가지다. 그것의 원산지는 머나먼 남미이지만 지금은 한국을 상징하는 김치의 핵심재료로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문화란 전 세계가 서로 주고 받는 것이며, 돌고 도는 것이며, 궁극엔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며칠 전 고려 금속활자 ‘증도가자’(證道歌字)에 묻은 먹이 탄소연대 측정결과 1100~1200년 사이의 것이라는 연구 분석결과를 내놓은 학술대회가 열렸다.

한국 지질자원연구원 홍완 책임연구원은 17일 오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증도가자’ 중 비교적 오염이 적고 먹이 많이 묻은 비(悲), 불(佛), 대(大), 인(人), 원(源), 광(胱), 혜(醯) 등 7개 활자를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를 밝혔다. 결과 ‘비’자에 묻은 먹의 성분은 1160~1280년에 만들어졌을 확률이 95.4%, ‘불’자에 묻은 먹은 1010~1210년의 것일 가능성이 95.4%로 나타났다. ‘대’자의 먹은 770~980년일 가능성이 94%, ‘인’자의 먹은 810~1030년일 가능성이 95.4%로 각각 분석됐다.

 몽골 침입을 받은 고려왕조가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기 이전에 발간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증도가)의 인쇄에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돼 학계에서 이름 붙여진 ‘증도가자’ 금속활자가 기존 알려진 세계최고(最古) 금속활자인 ‘직지심체요절’보다 무려 138년 이상 앞섰다는 것이다.(본지 기사 참조)

이는 1239년 찍은 ‘목판본’ 증도가의 권말에 “강화도 천도당시 금속활자로 찍은 ‘증도가’를 1부밖에 가져오지 못해 이를 목판으로 번각해 보급했다”는 최이(崔怡, ?~1249)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를 놓고 최근 중국의 학자들은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최고 금속활자임을 인정하던 이전의 태도에서 바꾸어 ‘증도가’를 찍은 고려 금속활자 기술도 중국에서 배워갔을 거라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사실여부를 밝힐 자세한 내막이야 학자들이 차츰 규명하겠지만, 우리로선 중국에서 배웠든 자체 발명한 세계 최초 최고의 것이든 그 시대 ‘증도가자’ 금속활자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럽고,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무신’과 ‘고춧가루 김치’ 비유처럼 그것의 본산이 원래 외래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 것으로 완전히 체화(體化)해 ‘증도가자’ 금속활자를 만들어 낸 선조들의 마인드와 행적은, 그것만으로도 우리들의 문화적 주체성과 역량으로 세계문화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며, 모든 것이 자기들에게서 비롯됐다고 생각하길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은 앞으론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향후의 세계는 어차피 각 나라 각 민족이 평등한 입장에서 각 나라 고유문화를 지킬 줄 알며 교류하며, 서로 존중 ? 배려할 줄 알아야 진정한 ‘선진국’ ‘문화대국’으로 대접 받을 수 있는 시대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