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칼럼]보카 주니어스 구장에서 느끼는 둥근 공의 미학
[여행 칼럼]보카 주니어스 구장에서 느끼는 둥근 공의 미학
  • 정희섭 글로벌문화 전문가
  • 승인 2011.08.1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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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축구 시즌이 되었다. 남미의 축구 강국 콜롬비아에서 20세 이하 젊은이들이 둥근 공을 가지고 기술과 지략을 겨루는 U-20 청소년 월드컵이 열리고 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선수와 국민이 함께 이룬 4강 신화 훨씬 이전에 우리는 이미 세계를 놀라게 했었다. 1983년 청소년 월드컵에서 이미 4강에 올라 한반도를 들썩이게 했다. ‘원조 4강 신화’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보카주니어스 구장

대한민국 응원단을 일컫는 붉은 악마라는 호칭도 사실 1983년에 얻은 것이다. 붉은 색 유니폼을 입은 우리 젊은이들이 연전 연승을 벌이며 4강까지 올랐던 모습은 1980년대 학창시절을 보냈던 사람에게는 너무도 생생하다. 컬러 텔레비전이 완전히 보급되지 않는 시절이어서 왜 우리나라 선수들을 붉은 악마라고 부르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도 그 당시에는 꽤 많았다. 축구장의 잔디 한 포기도 보이는 초고화질 텔레비전을 보는 요즈음 세대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둥근 공. 둥글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공정함. 그 공정함이 우리에게 주는 안도감과 평등함. 누구에게나 똑같은 크기와 무게를 가진 둥근 공을 차는 세계 각국의 축구 선수들, 그리고 둥근 공의 빠른 움직임에 열광하는 팬들. 축구는 예술이며, 축구는 인생 그 자체이며, 축구는 기회이며, 축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아르헨티나다. 

 

▲ 기념품샾의 마라도나 동상

 

아르헨티나는 역대 월드컵에서 우승 2번, 준우승 2번을 차지한 국가다. 물론 브라질도 있지만 브라질보다 아르헨티나를 꼽는 이유는 너무나 유명한 축구 클럽이 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초반 지하철을 건설한 세계 4대 부국으로서의 아르헨티나를 말하지 않더라도, 또한 '세기의 영부인' 에바 페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아르헨티나는 1980년대 그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아이콘이자 최고의 브랜드였던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의 조국이다.

 축구선수로서는 믿기지 않는 165cm 초단신 마라도나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보여준 신기에 가까운 드리블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손에 맞고 들어간 골에 대해 "그것은 신의 손이 한 일이다" 라고 말한 그의 독설이 아직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마라도나를 배출한 구단은 보카 주니어스다. 남미 최고의 축구구단으로 여겨지는 보카 주니어스는 마라도나 외에도 1994년과 1998년 월드컵에서 연속으로 해트트릭을 이루고 200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공격수로 불렸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Gabriel Batistuta), 그리고 ‘제 2의 마라도나’ 라고 명명된 카를로스 테베스(Carlos Tevez)를 배출한 구단이기도 하다.

보카 주니어스 구단을 거쳐 유럽의 빅 리그로 건너간 선수들이 단순하게 거대한 축구 시장에 진출했다는 정도가 아닌, 세계 최고의 몸값을 인정받고 종횡무진 활약하는 것을 볼 때 보카 주니어스를 남미의 ‘축구영웅 양성소’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다. 보카 주니어스 구단의 홈 구장은 Boca 라는 작은 항구도시에 자리 잡고 있다. 아르헨티나에 출장으로 세 번이나 방문했지만 보카 주니어스 홈 구장을 직접 가본 것은 2009년 여름이 처음이었다.

보카 주니어스 홈 구장의 이름은 라 봄보네라 (La Bombonera)이다. 이 구장에서 보카 주니어스의 팬들은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함성을 지르며 열성적인 응원을 하여 상대팀의 기를 꺾는다고 한다. ‘초콜릿 상자’ 를 의미하는 구장의 이름과는 달리 경기가 열린 때면 모든 것이 녹아 버릴 것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아르헨티나 축구의 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 봄보네라는 아르헨티나 축구의 중심이며 축구에 대한 열정 그 자체다. 1904년에 완공되었다는 이 구장이 백 년이 넘은 지금도 이렇게 화려하고 건재한 것을 보면 수많은 축구팬들의 사랑과 애정이 곳곳에 녹아 들어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경기가 열리지 않을 때는 일반에게도 공개가 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견학을 온다. 일층에 마련된 기념품 가게에서 각종 축구 용품과 선수들의 캐릭터 상품을 판매하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보카 주니어스' 와인이다. 와인의 나라답게 축구단의 기념품으로 와인을 내놓았다. 이 와인을 마시면 왠지 축구가 잘 될 거 같은 느낌이었다.

기념품을 파는 상점 입구에 늠름하게 서 있는 마라도나의 동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구장을 방문한 사람들의 심장은 이미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천장의 밝은 조명에 비친 동상의 그림자. 동상과 동상의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실루엣만으로도 상대방 팀은 사기를 잃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심장은 다른 관광명소보다 가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축구를 통해 모든 명예와 부를 거머쥐려는 젊은이들의 땀방울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둥근 공은 많이 가진 자, 가난한 자, 권력을 가진 자, 권력에서 소외된 자, 빨리 뛸 수 있는 자, 오래 뛸 수 있는 자, 그리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래서 축구라는 규칙을 통해 움직이는 작지만 아름다운 공의 미학에 전 세계가 열광하는 지도 모르겠다. 아르헨티나 축구의 심장, 보카 주니어스 구장에서 내가 본 것은 아름다운 승리의 미학이었다.

둥근 공의 공정함과 젊은이의 패기는 왠지 궁합이 잘 맞아 보인다. 젊은이의 패기는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16강에 올라 곧 유럽의 강호 스페인과 일전을 벌일 예정인 우리 대한민국 국가대표 팀의 선전을 기대해본다. 지난 달 기습 폭우로 피해를 입은 많은 이재민들에게 우리 젊은이들이 멀리서 보내주는 승전보가 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