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우리에게 고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가
[데스크 칼럼] 우리에게 고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가
  • 권대섭 객원 논설위원
  • 승인 2011.09.26 15: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문화의 세기를 말하다

 

▲ 권대섭 객원 논설위원

 사적 제271호인 경희궁은 서울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5대궁 중 서쪽에 자리해 ‘서궐’로도 불렀다. 정원군(定遠君:元宗)의 집 근처인 색문동(塞門洞)에 왕기가 서려 있다는 부사(府使) 신경희(申景禧)의 말에 따라 이곳의 왕기를 제압하기 위해 1617년(광해군 9)에 수백 호의 여염집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경덕궁(慶德宮)을 짓기 시작, 3년 뒤인 1620년에 완공했다.

인조반정(1623)으로 등극한 인조는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후 효종부터 철종에 이르는 10여 명의 임금이 살았다.

 현종과 숙종은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화재와 수리가 특히 많았다. 숙종은 이 궁의 정전(政殿)인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나 융복전(隆福殿)에서 죽었다. 경종은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함으로써 경덕궁에서 최초로 즉위식을 올린 임금이 됐다.

 영조는 1760년(영조 36) 인조의 아버지 원종(元宗)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는 이유로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바꾸었다.

 영조도 이곳에서 즉위를 했으나 몇 달만 이곳에서 지냈으므로 거의 빈 궁궐로 있었다. 1810년(순조 10) 순조가 이곳으로 옮겨 지냈는데, 1829년(순조 29)에 많은 건물이 불타 2년 뒤에 중건했고, 1834년 회상전에서 죽었다. 헌종도 이곳에서 즉위했으나 여섯 달만 머물렀으며 그뒤 다시 빈 궁궐이 되었다. 1860년(철종 11) 수리를 하고 철종이 일곱 달만 머물고 창덕궁으로 옮김으로써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빈 궁궐이었다. 1889년(고종 26) 숭정문이 불탔으나 1902년(광무 6)에 수리했다.

 정조 때 만들어진 〈경희궁지 慶熙宮志〉에 경희궁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궁성의 둘레는 총길이 1,100보(步)로 6,600자였으며 사방에 5개의 문을 두었다.

 동쪽에 정문인 흥화문(興化門)과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남문 개양문(開陽門), 서문 숭의문(崇義門), 북문 무덕문(武德門)이다. 정전인 숭정전은 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곳으로 궁성의 서쪽에 위치했으며, 주위는 회랑으로 둘러져 있었다. 뒤쪽에는 업무를 보던 자정전(資政殿)이 있었는데 이곳도 행각으로 둘러졌다.(이상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참조)

 경희궁은 본래 꽤나 큰 궁궐이었다. 지금처럼 왜소한 궁궐이 아니었다. 역사박물관 앞 쪽 신문로 구세군 건물 앞에 표석으로 남아있는 원래의 흥화문 자리가 그것을 대변한다. 그곳에서 성곡미술관 쪽 골목으로 따라 들어가면 아파트로 변신한 ‘경희궁의 아침’을 너머에 둔 경희궁 담장 흔적을 볼 수 있다. 그 담장은 사직동 풍림스페이스 본 앞 쪽 언덕을 거쳐 홍파동 까지 이어져 경희궁을 둘러싼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만큼 크고 넓은 궁궐이었다. 그런 궁궐이 이리 저리 흩어져 궁궐 뒤쪽에 있던 황학정은 사직단 뒤로, 숭정전은 조계사로 매각된 뒤 동국대 구내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흥화문은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함으로써 빈터만 남았다가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서게 되었다.

 서울고는 다시 1974년 학교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1988년부터 궁궐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2002년 현재 자정전과 숭정전, 숭정문 등을 복원하는 1차 복원공사를 마치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조선왕조 5대 궁궐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된 궁궐이 바로 경희궁이었다. 그런 경희궁이 요즘 떠들썩하다.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이 이 궁궐 숭정전 앞마당에서 무대를 꾸린 거다. 조선시대 왕실 중궁전을 배경으로 일어난 일을 독특한 상상력과 연기로 기발하게 엮어낸 작품이다. 내시와 궁녀의 사랑이란 대중적 스토리위에 ‘사라진 왕세자’란 추리적 서사가 더해졌다.

 나인 자숙과 내관 구동은 왕세자 실종의 용의자로 주목됐다. 처소와 근무지를 벗어났던 자숙과 구동의 미심쩍은 만남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감춰졌던 이들의 가슴 아픈 사랑이 윤곽을 드러낸다. 궁궐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자숙과 구동의 관계에 빨려 들어간다.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고궁에서 펼쳐졌다는 것이다. 경희궁 숭정문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회랑을 감아 세 면이 툭 트인 무대를 꾸몄다. 숭정문 안쪽에서 회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뮤지컬은 아늑한 분위기속에 마치 꿈나라 공연을 보는 듯. 관객들은 숭정전의 상월대와 하월대에 마련된 그 옛날 왕의 자리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며 공연을 즐겼다.

 세트가 없는 맨 무대이지만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환상적 상상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그런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력이 탁월하다. 영화 속 장면처럼 시간을 되돌리는 ‘슬로모션’과 ‘역모션’ 기법은 특히 공연예술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고즈녁하던 경희궁, 가장 큰 피해를 입고 파괴됐던 ‘서궐’은 이 뮤지컬 하나로 살아있는 문화공간이 됐다. 일곱 살 왕세자가 사라지면서 조용하던 서궐이 갑자기 긴박해지는 상황. 사람사는 공간으로서의 궁궐이 어느 새 다가온 듯 한 기분. 이로써 서궐은 그야말로 박제의 오랜 침묵을 깨고 현대인의 생활 속 문화공간으로 되돌아 온 느낌이다.

 우리에게 ‘서궐의 부활’이라도 선언하는 듯...이렇게 고궁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제 우리의 문화적 끼를 발산하는 재료가 되는 것이다. 이른바 ‘문화의 세기’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