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경의 일본속보]일제가 조선경찰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가?(1)
[이수경의 일본속보]일제가 조선경찰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가?(1)
  • 이수경 도쿄가쿠게이대학교 교수
  • 승인 2012.05.0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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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그들의 시각으로 집필된『老開拓士が贈る半島裏面史』

『老開拓士が贈る半島裏面史』속의 비화와 성숙한 리더를 기대하며

출처=[1907년 조선타임스사 발간 기념사진첩(정식 명칭 -황태자전하 한국 도항 기념사진첩(皇太子殿下韓国御渡航記念写真帖)]의 일부

나라의 안전과 방위는 물론 사회 안녕과 질서 유지, 국민들의생활 보호를 위해서 군대와 경찰이 존재한다. 한 나라의 존립과 올바르고 건전한 사회 발전을 위해 청렴 결백의 정신으로 국로을 먹으며 때로는 목숨도 마다않고 자신들의 책임과 의무에 신념을 다하는게 군대와 경찰이기에 국가의 안녕과 치안을 맡기고, 신뢰를 하는 것이다.

외세 침략을 많이 받았고 지금도 분단된 한반도이기에 국방의 의무가 존재하고, 경찰은 치안 유지와 정의사회 구현에 힘쓰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표현으로 지칭되기도 한다. 나라와 국민을 지키는 중요한 군대와 경찰, 그들이 만약 우리 국민을 버리고 침략해 온 외국 세력을 보호하는데 이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작년에 항일의병장 논문 집필을 위해 입수했던『老開拓士が贈る半島裏面史』 속에 서글픈 우리의 역사를 몇 번 망설이다가 필자의 바램도 있어서 소개를 해 본다.

1940년 12월, 당시의 일제 강점기 하의 경성(서울)에서 발간된 이 책에는 대한제국이 어떻게 쉽게 일본에 넘어갔는지에 대해 조사한 일본인 경성 특파원들의 무용담을 실은 기사가 나온다. 물론 일개 신문사에서 자사의 기사를 엮어서 수정 가필한 글이지만,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나라를 빼앗기지 않겠다며 항일 활동을 했던 의병(당시 일본측에선 폭도라고 명칭)들이 필사적으로 저항을 할 때, 나라를 책임지고 민족의 앞날을 위해 사수했어야 할 당시 조정의 고위급 대신이 어떻게 나라를 침략세력에 넘겼는지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책 본문

이 책은 오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 및 도쿄 니치니치 신문사의 경성지국이 편찬한 것으로 당시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 일본측 사람들이 조선을 어떻게 개척했는지 그들의 무용담과 비화를 [오오사카 마이니치신문 조선판]지상에 [노개척사가 보낸다---살아 있는 반도 이면사(老開拓士が贈る――生きた半島裏面史)]라는 시리즈로 50 수회에 걸쳐 연재한 것을 56편으로 2-3차 증보 채록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서문에는 당시 경성제대 총장이었던 시노다가 격찬을 하고 있다. 히라노 지국장이 적은 글에 의하면 이 책은 당시 신문사의 11명의 기자들이 집필, 수정을 봤고, 그 외에 1895년에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했던 기쿠치 겐죠 등의 취재 협력도 받고 있다.

▲책에 수록된  1907년 고종이 태황제로 물러난 후 즉위한 순종과 황태자 시절의 영친왕의 모습 사진(위에서부터)자료출처=[1907년 조선타임스사 발간 기념사진첩(정식 명칭 -황태자전하 한국 도항 기념사진첩(皇太子殿下韓国御渡航記念写真帖]
이 책에는 흥선대원군이나 명성황후의 모습이나 당시의 정세 정황도 소개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본측이 대한제국에 얼마나 많은 은혜를 베풀었는지 관련 인물들을 찬미하고 있으며, 자화자찬격으로 적혀진 글이 중심이다.

그렇기에 지배 통치자의 시각에서 적혀져 있는 것은 물론, 자신들이 한국 땅에서 한 행동에 대한 정당화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1940년 경이면 1937년의 중일전쟁 이후, 2차 대전을 의식한 총력전을 향한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기에 자신들의 업적에 대한 극찬이 필요한 시기였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하면서 어떻게 선진적으로 발전시키고 개발시켰는가를 홍보 겸 자아도취적 우월의식으로 짜여진 연재 기사였다.

그렇기에 일방적인 지배자측의 일화가 될 수 있지만 부패한 한말 사회의 조정 대신의 매국 행위를 조롱하는 내용은 자성의 자료가 될 수 있기에 소개한다.

대한제국을 지켜야 할 군대권이나 경찰권이 어떻게 일본의 지배자들에게 넘어갔는지, 정작 충성을 맹세했고 나라를 끝까지 항거하며 지켰어야 할 고관대작의 무분별한 사욕으로 인해 얼마나 숱한 희생자들이 만들어졌는지, 국가와 사회를 책임지는 신념의 지도자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국회의원 선거를 끝내고 대선을 앞둔 우리 사회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카시 모토지로. 그는 일본의 우국충절의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항일의병 세력탄압에 앞장섰다. (사진제공=아카시 후손) 

이 책에서는 아카시 모토지로 장군이 우국충절의 충신임이 강조되어 있고, 그가 한반도와 관계되는 이야기도 제법 비중있게 실려있다.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1864년8월1일~1919년10월26일)는후쿠오카 출신의 군인으로 1883년 12월25일육군사관학교보병과를 졸업했다. 당시의 사관학교교장은 명성황후 살해를 맡았던 미우라고로중장이었다(아카시의 후손이 제공한 자료에 따름).

1889년 12월9일에 엘리트군인을 육성하는 육군대학교를 중위로 졸업한뒤, 만44세가 되던 1907년에 제14헌병대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경성에 파견되어 한국주차사령관이 되어 식민지를 반대하며 거센 저항 운동을 하던 항일 의병세력을 탄압하게 된다.

1910년 6월에는 조선 경찰권을 장악,폐지시키고, 헌병경찰제도를 세운 뒤, 경무총장을 겸하게 된다. 1918년에 55세의 나이로 제7대 타이완 총독으로 취임하여 타이완과 깊은 연을 맺게 되지만 1919년 10월 26일 고향인 후쿠오카에서 인플렌져로 사망하게 된다.

▲용산의 일제 통감부 관측소 사진

그의 장례식은 11월 3일 타이페이에서 거대하게 행해지는데 같은 날, 조선 초대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도 사망을 한다. 데라우치는 생전에 아카시를 상당히 신뢰를 하고 있었고, 그의 정보전이나 전략 계획등을 신임하는 바가 컸기에 한국 식민지 통치책에 관한 헌병대나 경찰권 관계를 일임하다시피 했고, 아카시를 위해 그린 서화 등을 선물하는 등 그 우애는 각별하였다 (아카시 후손 제공 자료에 의함).

그런 아카시 모토지로가 한국 경찰권을 손에 넣는 일화가 이 책의 249페이지에서 251페이지에 걸쳐 [충성 아카시 모토지로 장군과 제5열의 활약]이란 소제목으로 기재되어 있기에 번역 소개한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