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웨이를 바라보는 관점
탕웨이를 바라보는 관점
  • 서문원 기자
  • 승인 2012.07.04 14:2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업화ㆍ문명이기로 도퇴된 우리 삶

오래 전 썼던 글에 시점을 덧붙였다.

희극배우건 영화배우건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돈 많이 벌면 벌었다고 욕먹고, 연기가 시원찮으면 못한다고 욕먹고, 일거수일투족이 노출된 상황에서 잘나갈 때와 못나갈 때에도 늘 수많은 감시와 손가락질로 살아가는 그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좋지만 인기가 시들할 때는 처절하기 짝이 없다. 문명의 이기로 인해 쓰레기더미에 버려진 로봇 같다고나 할까?

▲ 영화 방자전는 흥행과 작품 두 가지 다 섭렵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스토리이다. 서슬퍼렇던 남녀차별 구조를 지닌 조선. 춘양(조여정)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방자와 이도령을 오가며 사랑놀음을 벌인다. 아울러 이같은 비극은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피해자는 물론 부권사회에 갇힌 여성이다.

최근 개봉된 국내영화 ‘후궁’을 놓고 주연배우로 열연한 배우 조여정에게 쏠린 시선이란 ‘얼마나 벗었나?’에 초점을 맞추진 상태. 2년 전 조여정이 출연했던 영화 ‘방자전’(2010) 영향 때문인가? 사람들은 어느 순간 그녀를 배우로 보지 않고 있었다. 정작 당시 작품도 짜임새있고 연기력 또한 훌륭했는데도 말이다.

스탠리 큐브릭 그리고 A.I.

잭 니콜슨의 진가가 발휘된 ‘샤이닝’(1980),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내놓은 명작 중 명작이다. 어떻게 저런 시대에 저런 스토리와 세련된 색상을 한 소품들이 있을까 싶은 ‘시계 태엽 오렌지’(1971).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그는 아마 미래에서 온 사람일거다” 이런 상상을 해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각본 A.I.(2001)는 본 영화중 아마 최고의 작품으로 기억되지 싶다.

사람 그리고 로봇, 이들의 차이가 애매모호해진 경우는 A.I(인공지능)이란 영화가 처음이다. 그 뒤로도 윌 스미스의 ‘아이로봇’이 나왔지만 왠지 눈이 가는 건 ‘A.I’쪽이 먼저다. 영화 보는 내내 차갑지만 마치 ‘미지의 세계’를 비춰주는 느낌. 지금도 장면 하나 하나가 생생히 기억난다.

다시 배우 이야기로 돌아와, 현재 한국 배우들은 마치 영화 ‘A.I’(2001)에 나오는 장면에 나오듯 쓸모가 없어 쓰레기 더미 위에 버려진 로봇처럼 살아가고 있다. 좀 더 확대 해석해보면 오늘날 노동자들이 그렇게 됐다. 그것은 화이트건 블루건 아무 상관이 없다.

▲ 화 'A.I'중 주인공 데이비드(오스먼드)가 유모 로봇(클라라 벨라)과 헤어지던 장면을 기억해 보자. 그 속에 일회용으로 쓰여지다 유행에 뒤쳐진채 버려진 자들의 웃음이 너무도 애절하다.

그렇다. 한 때의 인기가 유통기한 종결 뒤 바로 버려지고, 새로운 스타에 의해 과거가 잠식되는 사회. 배우 혹은 연예인들의 가십거리를 보도하는 매스컴을 통해 작금의 시대적 비극이 드러나고 있다.  

이 시대 비극은 시작됐다

작금의 시대를 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까? 일례로 주자학, 양명학, 그리고 실학. 최소한 이 세 가지 학문이 혼용된 사회였다면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이념을 신앙으로 발전시킨 그 죄가 멸망의 길을 터놓고야 말았다.

21세기 현대사회에도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매몰된 찌질이들이 너무 많다. 무릇 역사란 다양성에 의해 변화되기도 하지만 일방적인 독재에 의해 모든 것들이 파멸되고 재생성 되기도 한다. 한국은 후자에 해당된다. 이 나라는 이상하게도 배려도 수용도 없는 비인간적인 ‘오타쿠’만 존재되어왔다.

정치가 아니라 사회가 그렇게 됐다. 그러니 정치도 그렇게 갈 수 밖에 없다. ‘respect’(라틴어로 원뜻은 '뒤돌아 봄'이다)도 없거니와 ‘노블리스 오블리주’ 또한 기대할 수 없는 소통부재의 세상을 창조해낸 것이다.

탕웨이를 바라보는 관점

국내매스컴이 중국배우 탕 웨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편협했다. 명품배우 히스레저가 주연한 '브로크백마운틴'(2005)을 연출해 비평가들로부터 "아시아를 넘었다"는 평을 받아온 이안 감독의 작품 '색계'(2007)가 국내에 상영 될 무렵. 대다수 국내매체들은 “어디까지 벗었나?”가 주된 이슈였다. 덕분에 개봉 전 먼저 볼 수 있는 시사회 조차도 안봤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누리꾼들의 평가가 너무 좋아 상영 마지막 날 보게 됐다.

영화 색계를 본 뒤 ‘배우는 감독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때 리뷰를 쓰며 탕웨이를 향한 연기칭찬보다 감독의 역량에 박수를 보냈다. 어쨋든 그녀는 장만옥, 공리 뒤이어 장쯔이를 이어가는 대배우로 거듭난 셈이다.(물론 ‘아직은 멀었다’는 게 주된 설이지만)

▲ 위 상단은 영화 색계에서 순수했던 탕 웨이의 모습을 그렸다. 바로 아래사진은 농염한 탕웨이를 그렸다. 대만계 이안감독의 예라함이 그녀를 두 가지 형상으로 만들었다.

이안감독은 독단으로 영화제작을 하기보다 배우, 스텝들과 항상 대화를 통해 합의하는 과정 속에서 작품을 만들어왔다. 이를 증명하듯 이안이 탕 웨이를 통해 만든 ‘변화’란 ‘색’(color)의 조화로 드러났다. 배우가 어디서 부각돼야 하는지를 잘 아는 것이다. 이에 반해 첸카이거 감독은 ‘중국 5세대감독’ 답지 않게 영화 무극에서처럼 작품을 무리하게 해석해 오류가 많았고, 그 결과로 상업영화에 크게 실패한 경우다.

탕웨이와 이안을 장인으로 보는 시대

역사적으로 송나라가 망한 이유 중에 하나가 '사농공상'에 유.도.불이 얹혀 졌기 때문인데, 흔히 고대 계급사회에서 사(士, 유학자)가 모든 역할을 독점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만드는 사람’(장인 혹은 마이스터)이 공자처럼 성인과 동일시 되던 시대가 송나라 이전임을 감안하면 현재진행형은 또 하나의 ‘주자학’이 자리잡은 셈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사대부의 주류학문인 주자학은 사라졌지만 이념을 신앙시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계급’으로 바라보는 의식은 여전하다. 즉 검증되지 않은 학문 속 ‘도그마'가 다양성을 가로막고 있다.

다시 배우이야기로 넘어와, 사람도 쓰고 버려지는 사회라면 배우, 감독, 이어 작가도 필요없는 시대랄 수 있다. 즉 문화가 편협한 자본과 함께 도그마티스트들에 의해 도살되는 중이다. 생산자는 ‘사농공상’인데 소비자를 넘는 권력자가 유.도.불이라면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보다 더 비참한 “독단으로 배가 가라앉는다”는 이야기밖에 안된다.

요새 영화계처럼 ‘얼마나 벗었냐?’가 모든 이슈의 가치 기준이라면 문화적 괴리감 확대가 더욱 더 분명해진다. 대중들의 ‘탕 웨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한 인식과 준비 과정 속에서 나와야 하는데 생각 없이 무작정 그어대는 눈은 ‘무지’(無知)로 밖에 안보인다.

사람 하나 하나를 단순한 잣대로 긋기 보다 많은 배려와 연구가 필요한 시대에 문화를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열의가 아쉽다. 특히 여배우를 바라보는 것도 오로지 '美'에 치중한다면 그게 ‘문화’라고 말하기에는 궁색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2012-07-05 15:33:24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