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민족의 색채의식④
[특별기고]한민족의 색채의식④
  • 일랑 이종상 화백/대한민국예술원회원
  • 승인 2012.09.17 15: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 색 어미변화 하나만으로도 색상 기본적인 표현 완벽

 

▲필자 일랑 이종상 화백

<지난호에 이어> 순수한 한글 색 이름의 자격을 갖추려면 ‘하늘+빛’, ‘배추+색’ 등의 ‘빛’이나 ‘색’과 같은 접미어가 필요 없이 명사(파라+ㅇ), 형용사(파라+ㄴ), 부사(파라+ㅎ+게)가 되면서 스스로 주어가 되고 명사와 동사를 수식할 수 있어야한다.

그 많고 많은 색 이름 중에 위의 조건에 맞는 색 이름을 우리말 속에서 찾아보자. 아무리 애를 써봐도 결국 파랑, 빨강, 노랑(유채색계)이 있고 하양, 까망(무채색계)이 있을 뿐이다. 현상계의 나머지 잡다한 색깔들은 이들 오방색의 조화로운 변환에 달려 있을 뿐이다. 예컨대 삼원색의 색이름 끝자 받침에 ‘ㅇ’을 쓰면 명사가 되고 ‘ㄴ’을 쓰면 형용사가 되며 어미에 ‘ㅎ+게’를 쓰면 부사가 되는 어문적 원리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어미변화 하나만으로 색상의 기본적인 표현기능이 완벽할 수 있음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밖에도 색상 이외의 색질을 표현할 수 있는 채도(彩度), 명도(明度)는 물론, 건습(乾濕), 중량(重量), 질감(質感), 선도(鮮度)까지도 자유자재로 색채의 감정표현이 가능한 가변적인 색 이름을 일상화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방위, 식물, 동물, 계절, 기후, 바람, 오미, 오례, 오상, 오음 등 자연현상과 사물과의 연계성을 맺게되고 심지어는 각 색 이름마다 인격적인 윤리성을 부여함으로써 기능으로보다는 감성으로 살아 숨쉬는 풍류적 색채문화를 이어왔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왜 일찍이 유채색과 무채색을 합해 오방색이라는 다섯 가지의 원색 이름만 만들어 시ㆍ공간의 종합적 개념으로 사용하였을까. 1666년에 아이작 뉴톤의 프리즘에 의한 스팩트럼 이론을 들은 바도 아니었을 터이고, 그렇다고 먼셀이 태어나지도 않아 그의 색채론도 들어 본 적이 없었을 것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서구의 과학적 분석 이상으로 자연의 색채 원리를 이미 선험적으로 직관에 의해 터득하고 유채 삼원색과 무채 이원색의 오정색 이외는 색 이름을 만들지 않은 조상의 높은 안목과 합리성 앞에 다만 경건해질 뿐이다.

(1) 빨강 (赤) - ( ‘ㅂ’ + ‘ㄱ’ )

‘빨강’은 순수하고 고유한 우리의 색이름이며 삼원색 중의 하나이고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오정색(五正色) 중의 하나로서 명사이다. 형용사로서는 ‘빨간’이 있고, 부사(副詞)로서는 ‘빨갛게’가 있어서 간단한 어미변화 하나만으로도 명사와 동사를 자유자재로 수식할 수 있다.

‘빨강’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남방의 색이라고 하였고 적(赤) 땅과 불꽃을 가리키는 말로 땅 위의 불꽃이 후대에 이르러 땅 밑의 불꽃으로 도치된 것이다. 《옥편(玉篇)》에서는 밝은 색(朱色)이라고 기술되어 있듯이 주(朱)는 《설문해자》에서도 “주(朱)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심이며 남방의 양(陽)을 품고 있는 것이다(朱心木馬松相之屬)”라고 하였다.

주색은 땅 위에 나무가 탈 때 생기는 ‘붉은’ 기운과 남쪽 하늘에 햇볕이 비치는 양기의 밝은 빛(光明)을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 색 이름에서 ‘빨강’의 ‘빨’은 ‘불(火:弼)’의 색, 즉 ‘붉(赤,朱)’과 ‘밝(明)’에서 연유된 색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지금도 남향집을 좋아하는 양택사상(陽宅思想)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빨강’과 무관하지 않다. 일조권(日照權)을 법으로 보장받을 만큼 중요시하는 이유는 온대환경 속에서 따듯하고 밝은 것을 좋아하던 오랜 생활습성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활환경과 색 이름은 결코 무관할 수가 없다. 이런 현상은 자의적일 뿐만 아니라 매우 합리성을 가진 환경친화의 색채의식을 지녀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빨강’은 명사로서 자신이 주어가 되며 형용사로서 뒤에 명사를 수식할 때는 ‘빨간’으로 어미변화를 한다. 뒤에 동사를 꾸밀 때는 ‘빨갛게’로 어미변화를 일으켜 ‘사과가 빨갛게 익었다’와 같이 부사로 사용된다. 이처럼 우리말의 고유 색 이름은 삼원색상의 기본적인 표현언어로서, 완벽하게 어미변화를 할 수 있도록 갖추어져 있다.

그밖에 ‘빨갛다’. ‘벌겋다’. ‘시뻘겋다’, ‘붉다’. ‘발그레’, ‘볼그레’, ‘불그덱덱’, ‘불그죽죽’, ‘불그스름’, 등 색질을 무궁무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는 가변형의 색 이름을 써왔다. 그 뿐만 아니라 빨강은 남쪽, 난초, 여름, 예절, 예술, 마파람, 현악기 등 수많는 연계성을 갖게 되고 심지어는 빛깔마다 인격적 윤리성을 부여함으로써 기능으로보다는 심성으로 살아 숨쉬는 풍류적 색채문화를 이어왔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빨강은 ‘붉다’, ‘붉’, ‘밝’에서 온 개념이며 적(赤), 홍(紅), 주(朱)가 이에 속한다. 남방위를 가리키며 여름, 주작(朱雀), 화(火), 난초, 예(禮), 예술, 마파람, 현악(絃樂), 선묘(線描), 육(六) 등이 연계된다.

서울의 명물이며 국보 제1호인 남대문(南大門)이라는 현판은 없다. 다만 사람들이 관념적으로 그렇게 부를 뿐이다. 이 역시 오행사상에 의한 결과로 남방위는 곧 예(禮)이기 때문에 남대문이라고 쓰지 않고 숭례문(崇禮門)이라고 써 붙였다. 빨강은 양기가 왕성하여 생명의 성장을 촉진하고 경외(敬畏)로운 대상으로 신앙의 매개가 되었다. 또한 천재지변과 액운, 악귀를 몰아낼 수 있다고 믿는 벽사의 주술성이 숨어있다.

 *필자약력:서울대동양화화 교수/초대 서울대미술관장/국전초대작가 및 심사위원/5천원권·5만원권 화폐도안 작가/독도문화심기운동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