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육완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50년, 결코 긴 시간 아냐… 앞으로의 50년 향해 나아갈 것”
[인터뷰-육완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 “50년, 결코 긴 시간 아냐… 앞으로의 50년 향해 나아갈 것”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3.01.31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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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현대무용 되돌아보는 ‘육완순 현대무용 50년 페스티벌’ 성료

     국내 현대무용 역사의 시작에는 육완순 한국현대무용진흥회 이사장이 있다. 20세기 현대무용을 이끈 미국 무용가 마사 그레이엄을 사사하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그가 귀국발표회에서 국내 무용계를 경악시킨다. 한국무용과 발레만 있던 그 시절, 맨발로 무대에 올라 구르고, 물구나무서는 그를 보고 다들 ‘미쳤다’고 하던 때였다. ‘한국 최초 현대무용가’가 되겠다는 그의 다짐은 그런 손가락질 따위에 굴하지 않았고 그 후로 50년이 지났다.

     지난 27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에서 89명의 안무자와 460여 명의 무용수가 참여해 성황리에 개최된  ‘육완순 현대무용 50년 페스티벌’이란 메머드급 무용축제가 그간 50년 동안 그가 겪었던 과정과 그의 헌신을 대신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1963년 한국 최초로 미국 현대무용을 도입한 그는 이후 50년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은 물론 현대무용가, 안무가, 예술교육자, 저자, 문화예술 행정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해 한국의 현대무용을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50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고 그는 말한다. 앞으로의 새로운 50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그를 서교동에 위치한 육완순무용원에서 만났다.

△1933년 6월 전주 출생 △현재 국립현대무용단 명예 이사장 /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 예술감독 / 한국현대무용진흥회 회장 △이화여대 체육학 학사 및 석사·한양대 대학원 무용 박사 졸업 / 미국 뉴욕대 대학원 무용 박사과정 이수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한국현대무용협회 창립 및 회장·프랑스 바뇰레국제안무대회 예술위원 등 역임 △주요작품 : <흑인영가> <베이직무브먼트> <부활> <인간상> <황무지> <단군신화>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 외 다수

-무용인생 50주년을 기념하는 '육완순 현대무용 페스티벌'이 얼마 전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50년이란 시간에 느끼는 소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
“처음에 내 이름으로 현대무용 페스티벌을 연다고 해서 내가 싫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개인에 국한되는 것 같고, 마치 개인공연 같아서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현대무용 전체를 아우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원회에서는 현대무용계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며, 육완순이 곧 현대무용이라고 뜻을 굽히지 않더라. 또 나는 나대로 싫다고 고집을 부리고…. 결국 어른으로서 내가 양보를 했다. 굴복이라고 해야 할까.(웃음) 나는 50년이란 시간이 전혀 길지 않다고 생각한다. 50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나 많은 재원들과 재능들이 발견되고 발굴됐다는 게 너무 감동적이었다. 1963년에 난 외롭게 홀로 시작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 열매가 맺힌 거다. 열흘 가량 공연을 하는데, 매번 자리가 다 찼다. 국수호 선생, 윤수미 선생 등 다들 너무도 아름답고 잘 추시더라. 같은 시대에 이렇게 좋은 무용가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나도 의욕이 솟구쳤다. 50년이라고 구역을 짓고 싶지 않다. 50년이 끝이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나아갈 거다.”

지난 15일 열린 육완순현대무용페스티벌 개막 축하공연 '아직도, 최고의 날을 꿈꾼다'. 육완순 이사장은 이날 무대에 올라 녹슬지 않은 실력을 선보이며 한국무용계의 대화합을 기념했다.

-한국전쟁 등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어떻게 미국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더 큰 꿈을 위해서는 유학을 꼭 가야겠더라. 미국대사관에 가서 체육과나 현대무용과가 있는 미국 내 대학을 알아내 75개 학교에게 일일이 직접 편지를 보냈다. 내 소개와 함께 현대무용이 너무나도 공부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장학금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미국에 머물지 않고 귀국해 우리나라 무용계에 공헌할 거라 썼는데,(웃음) 아주 솔직하니 내 포부를 말한 거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학교로부터 연락이 왔고, 한국에서의 첫 현대무용가가 되겠다고 다짐하며 유학길에 올랐다.”

-60년대 미국 유학을 하면서 마사그레이엄으로부터 테크닉을 배웠다. 그에게서 배운 것과 영향 받은 것들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
“미국 유학 당시 일리노이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씩 뉴욕 최고 무용수들의 초청강의가 있었다. 그때 ‘그라함테크닉’을 처음 접했고, 그 즉시 난 교수님한테 뉴욕으로 가야되겠다고 말했다.(웃음) 그때부터 그라함 선생님한테 배우기 시작해 귀국 후에도 매년 외국으로 나가서 선생님께 배우고 왔다. 선생님으로부터 선생님의 동작뿐만 아니라 영혼에 대해서도 배웠다. 선생님은 동작 하나를 설명하셔도 정신과 영혼을 담아 시詩로 설명하곤 하셨는데, 그렇게 배우니 아무리 어려운 동작이라도 오히려 그 동작과 모습에 취해 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테크닉만으로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며, 정신교육을 단단히 시켜주셨다. 지금도 난 내 인생에서 그라함 선생님을 만난 게 가장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쉬면서도 늘 작품 생각을 하셨다. 휴식 또한 예술가로서의 삶의 연장이었던 거다. 선생님의 그런 부분들까지도 난 모두 받아들이고 싶었고, 지금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행을 참 좋아하는데, 새로운 세계를 보며 작품 구상을 할 수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서 현대무용 공연을 가졌을 때 무용계는 어떤 분위기와 반응을 보였나? 당시 현대무용은 생소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1963년 국립극장(現 명동예술극장)에서 귀국 발표회이자 첫 현대무용무대를 선보였는데, 맨발로 무대에 올라 거꾸로 서는 둥 그동안 본 적 없는 동작을 하니까 사람들이 경악했다. 야만인이라며, 저게 무슨 춤이냐고 손가락질 했다. 미국 간다더니 무슨 저런 걸 배우고 왔냐고 하더라. 하지만 난 당황하거나 어렵게 여기지 않고 그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 인식이 점차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 마음으로 바로 다음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주변의 어떤 말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첫 공연을 9월에 했는데, 마침 그해 11월 호세리몽무용단이 내한공연을 가졌고, 그때부터 현대무용에 관한 인식이 슬슬 달라지기 시작했다.”

-논개, 초혼, 황무지, 숲, 단군기원 등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를 담은 작품을 다수 남겼다.
“난 늘 관객과 무용계, 더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떻게 공헌하나 고민했다. 그라함 선생님께서도 당신 조국 얘기를 많이 하시며, 내게도 조국을 위해 춤을 추라고 그러셨다. 나도 내 춤을 통해 나라에 공헌하고 싶었다. 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 내 몸짓과 표현에는 이미 한국적인 정서가 깃들어져 있다. 어떤 공식이나 방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전통악기 소리도 얼마나 아름답나. 그 소리는 오로지 우리 음악에만 있는 거니까….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내가 아무리 서양춤을 춰도 다들 내 춤은 뭔가 느낌이 다르다고들 하더라. 그건 아마 한국적인 정서 때문이었을 거다.”

-바쁘신 와중에 결혼생활은 어떻게 유지하셨는지 궁금하다.(웃음)
“춤에만 빠져 있으니 결혼도 못할 뻔 했다. 귀국공연 끝나고 중매로 나타난 사람과 반년 정도 연애하고 결혼했다. 그러다가 딸 하나 낳았는데, 내가 워낙 밖으로 돌아다니고, 잘 보살피지도 않으니 남편이 폭발했다. 춤과 가정 중에 택하라며…. 둘 다 똑같이 소중한 건데, 내가 어찌 택할 수 있었겠나. 그래서 난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오히려 남편이 놀라더라.(웃음) 남편은 내 공연을 보고 결정을 하겠다고 했고 1971년 ‘단군기원’을 봤는데, 나보고 아무래도 춤 계속 춰야겠다고 그러더라.(웃음) 남편의 인정을 받고 나니 나는 더욱 더 즐거운 마음으로 춤을 출 수 있었고, 한 편으로는 책임감도 느꼈다. 가정, 학교, 작품까지 병행하려니 정말 너무 힘들었다.”

-사위가 가수 이문세로 잘 알려져 있다. 결혼 당시 떠들썩하지 않았나. 결혼 반대도 심했고….
“지금 같은 건물에서 작업하고 생활하는데도 서로 워낙 바쁘고 정신이 없다보니까 한 달 동안 못 본적도 있다. 결혼 전에 반대 많이 했다. 걔네들 결혼 못 할 뻔 했지.(웃음) 지금은 오히려 내가 사위랑 사위 곡을 너무 좋아한다. 2000년도에는 사위랑 공연도 했었다. 사위 곡에 내가 안무 다 짜서…. 또 하고 싶은데 둘 다 바쁘다보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지난 15일 열린 육완순현대무용페스티벌 개막 축하공연 '아직도, 최고의 날을 꿈꾼다' 무대 위의 육완순 이사장.

-현대무용은 어렵다, 지루하다 등의 인식으로 대중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국내 현대무용을 어떻게 바라보나?
“관객을 이해시키는 게 중요하고 그건 전적으로 안무가에게 달려있다고 본다. 관객이 싫다고, 어렵다고 떠나는 건 안무자의 책임이라는 거다. 또 요즘 기량 안 되는 무용가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우선은 기본과 테크닉이 돼야 하는 것 아니겠나. 기본을 완전히 갖춘 다음 재미요소를 더해야 한다. 기본도 안 돼 있는데 현란하게만 한다면 관중은 속지 않는다. 관객이 얼마나 냉정한데….”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올해 11월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 준비해야 하고, 또 매년 가을마다는 젊은 안무가들 해외 진출시키는 것에 집중한다. 내가 같이 가줄 수 있는 대로 최대한 같이 가준다. 그리고 현재 새로운 작품 구상 중에 있다. 내년 쯤 선보일 예정이다. 공연들도 빠지지 않고 챙겨보려고 한다. 그래야 배우고 구상하지 않겠나. 예술가는 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쉬지 않고 계속 바삐 움직이고 있다. 난 끊임없이 작품만을 생각하고 창조해왔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할 정도니까.(웃음) 이게 내 평생의 삶이었다.”

-자신에게 춤은 무엇인가?
“내 자신 그 자체. 나와 하나로 지금껏 함께 왔고, 앞으로도 함께 쭉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