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남정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남 몰래 춤추던 소녀, 국내 포스트모던 댄스 선구자로
[인터뷰-남정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 남 몰래 춤추던 소녀, 국내 포스트모던 댄스 선구자로
  • 인터뷰 이은영 편집국장 / 글 윤다함 기자
  • 승인 2013.03.27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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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not? 무조건 안 된다 생각마라

     남정호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의 저서 ‘남 몰래 추는 춤 나도 몰래 추는 춤’. 어렵지 않게 담담히 이끌어가면서도 가볍지 않은 글이 편안히 와 닿았고, 더불어 가벼운 무게와 손에 쏙 들어오는 적당한 크기로 누워서도, 지하철에서도 읽을 수 있어 부담 없었던 이 책은 기자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었다. 

     ‘남 몰래 추는 춤 나도 몰래 추는 춤’은 춤추기 시작했던 유년시절 이야기부터 이후 자신의 무용세계까지 모두 펼쳐 보이는 그의 춤 에세이집으로, 춤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그의 일상을 담고 있다.

     안무가, 무용가, 교수, 평론가….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들은 모두 춤이란 공통분모를 지니고 있다. 춤을 매개로 다방면으로 활동해온 그는 테크닉 중시의 미국식 현대무용이이 주를 이루던 당시 프랑스식 포스트모던 댄스를 국내에 소개하며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선구자이며, 부산국제여름무용축제를 만들어 다년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지역민들에게 문화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춤꾼으로서는 귀하게 문필작업에도 능한 그를 만나 그간의 춤인생을 들어봤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책 제목에서 왜 남몰래 춤춘다고 한 건지 궁금하다.
“교장선생님인 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고 고지식한 분위기 속에서 자라면서 어릴 때 너무 갑갑했다. 불량스러운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으니 말이다.(웃음) 하지만 춤을 출 때만큼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내 유일한 일탈이었으니. 아버지가 내가 춤추는 걸 아주 싫어하셨다. 몰래몰래 숨어서 춤추곤 했다.

-책이 너무 좋다. 개인적으로 내용이 참 마음에 들고, 작가 못지않은 글의 힘이 느껴진다.
“안식년에 쉴 때마다 감각이 무뎌지면 안 되니까 춤 전문잡지에 연재했었다. 그걸 엮어서 낸 책이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아버지께서 책을 많이 사주시곤 했었다. 문학소녀였다.(웃음) 국문과를 갈까 생각할 정도로 그랬으니…. 또 우리 언니가 문학도였기도 했고.”

-그런데 무용과에 진학한 계기가 있었나
“본능적으로 즐겁더라. 내가 승부욕이 강한데, 무용에서는 승부욕이 쉽게 드러난다. 한창 무용 배우는데, 주변에서 시골애가 서울로 학교 갈 수 있겠냐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에 발끈해 어디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무용에 내 자신을 걸어봤던 것이고 결국 합격증을 얻은 거다. 만약 내가 다른 과에 붙었더라면 무용 말고 다른 데를 갈 수도 있었을 거다.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안무가이기도 하면서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 사이에 괴리는 없나
“스스로 내가 평론가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국내에 평론가가 별로 없었다. 있다 해도 그다지 활발히 활동하는 것도 아니었고. 원래 글은 계속 써왔었고, 좋아해서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건데, 평론가라고 불러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웃음) 당시 평론가모임이 결성됐는데, 거기서 다른 멤버들과 춤에 대한 얘기를 나누니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용가로서, 안무가로서 평론가와 무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탈퇴 후에도 비평적인 글을 쓰고 있다.”

-지금도 작품활동과 무대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하루에 연습은 얼마나 하나
“매일 2시간 이상씩 늙어가며 무거워져 가는 몸을 추스르며 연습하고 있다. 이것 역시 내 자신에 대한 베팅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또래 동료들이 직접 춤추는 것은 이젠 안 하려고 하더라. 난 그걸 보면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좀 알겠는데, 이제야 춤이 뭔지 좀 알겠는데 말이다. 수 십 년 해온 지금에서야 무대에서 관객들 얼굴을 편안히 쳐다볼 수 있고, 연습한 만큼 발휘할 수 있는 경지에 이제야 이르렀는데 그만 둔다니 말이다. 예전에는 떨려서 나도 모르게 무대에서 오바하고 그랬다. 하지만 요즘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무대에 오른다.”

-교단에 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프랑스에서 귀국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직장을 찾은 거였다. 당시 내 주변에서는 대학교수가 아니면 무용가가 아니라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만 30살에 교수가 됐다. 대학교수라고 하면 대게 안락하고 편안하다고들 생각하지만 내가 지방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환경도 열악했고 조건도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처음 시작하니 모든 게 도전이었다. 계몽적인 입장이 됐다고나 할까. 10여 년간을 끝없이 도전했다. 그 후 서울에 왔는데, 마침 당시 이 학교도 막 만들어진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안일할 수가 없고 모든 걸 새로 만들고 늘 긴장해있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적은 없었다. 실은 교수 생활을 하며 매너리즘에 젖어 권위만 휘두를까 겁났었다. 안일한 예술가로 제자리에 남을까 걱정이었는데, 내 성격 때문이었는지 환경 탓이었는지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었다. 벌써 이 학교에 있는 게 17년째인데 지금껏 그럴 시간도 없었다.(웃음) 나는 항상 주변 환경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러기 위한 사명감도 투철했다. 무용계 자체는 마이너일지 몰라도 대학교수란 이점을 갖고 작품 활동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대학교수란 직책이 좋았다. 내 본연의 창작정신과 도전정신을 교육으로 의도적으로 옮겨 지금까지 온 거다.”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점이 있다면
“‘와이낫’(Why not) 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학생들에게 난 왜 안 된다고 생각하냐고 되묻는다. 이미 자신이 안 된다고 입 밖으로 말하는 순간부터 그건 자신에게 지는 거다. 무조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준다. 또한 요즘 들어 자주 하는 말은 ‘네 안에 네가 모르는 고결한 네가 있다’이다. 아직까지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네 자신을 춤을 통해 끄집어내보라고 말해주곤 한다.”

-포스트모던댄스를 국내에 소개한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포스트모던은 일상과 연결된다. 유학할 때 같이 작업하던 이들이 모두 포스트모던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나도 자연스럽게 포스트모던을 추구하게 된 거고. 이전까지의 현대무용에서 마사그라함과 테크닉이 전부였다면, 내가 귀국 후에는 경쾌하면서 캐주얼적이며 일상과 연결되는 포스트모던이 국내에 도입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향 받은 이들은 누군가
“안나파블로바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지만, 서양발레리나의 몸짓이 내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그들과 같이 추기에는 내가 너무도 작고 노랗고 성장배경 또한 달랐던 거다. 그러던 때에 이사도라던컨의 자서전을 읽게 됐는데 그렇게 공감할 수가 없었다. 이사도라던컨이 자신의 특별함을 믿는 그 마음이 내게 많은 용기를 줬다. 나보다 더 무용을 많이 하고, 테크닉도 좋은 부잣집 아이들 앞에서 주눅이 들 수도 있었지만,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적합한 모델은 이사도라던컨이 제격이었던 거다. 교육을 받지 않고, 가난하지만 자신이 개척해 나가고, 적극적인 그의 그런 점들은 특히 내가 30대 때 많은 도움을 줬다. 니진스키에도 많은 공감을 느꼈다. 나는 적극적이고 미래지향적이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는 소심하고 반항적이기도 하다. 그런 점을 니진스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이사도라와 니진스키는 정반대이지만, 나는 이사도라처럼 살면서 내면적으로는 니진스키를 닮은…. 그랬던 것 같다. 그 두 사이의 밸런스가 나를 유지시켜줬다. 또한 문학과 무용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몰랐던 때, 피나바우쉬는 문학이 무용의 틀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가르쳐줬다. 이전에는 무용가는 그저 엔터테이너에 불과했다면, 무용으로 철학을 얘기할 수도 있고 사상을 표현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준 게 피나바우쉬다.”

-파리와 일본에서도 오래 생활했고 지금도 오가고 있다. 파리와 일본, 우리나라 각각의 문화적 차이점이 있다면
“프랑스는 예술의 나라 아닌가. 예술가의 수준도 물론 높지만, 일반 시민들의 예술적 수준도 상당하다. 그런 측면에서는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 된다. 반면, 무용에서 우리나라가 프랑스보다 더 유리하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한국무용이란 독창적인 전통문화를 지니고 있어 전통과 현대무용이 합쳐져 하이브리드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예술에서 독자적인 부분이 중요하다고 하면 우리나라에서 더욱 더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작품과 예술인들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 더 높다고 전망한다. 지금까지 내가 본 일본은 예술이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고 재능이 뛰어난 상위 소수가 예술계를 지배하는 것 같다. 대중은 그걸 향유할 따름이다. 예술인과 대중의 거리가 아주 멀고 뚜렷하게 구분된다고나 할까. 우리나라는 예술계 전반적으로 범람하는 추세로 프로와 아마의 경계가 모호하지 않나.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흥나면 절로 일어나 어깨춤 추고 그러는데, 그런 모습은 전문 춤꾼보다 오히려 더 멋지고 대단하다.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거다.”

-‘부산국제여름무용축제’를 다년간 성공적으로 운영 및 개최했다. 특별한 노하우가 있다면 알려 달라.
“파리에서 유학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즐기는 아비뇽축제를 보고 너무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귀국 후 부산으로 갔는데 시민들이 즐길만한 예술 축제가 너무 없었다. 처음 만들었을 지금껏 그런 게 없었다보니 부산시민들도 좋아해주시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져줬다. 당시 참신했던 발상이었던 거다. 수완이 좋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무용가들을 많이 알고 있고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으니 이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난 그 첫 씨앗을 뿌린 사람이었을 뿐이고 그 씨앗이 자라나 더 큰 터로 이뤄질 수 있다면 아주 좋았을 거다.”

-예전보다 춤 무대가 많이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다수 대학에서 무용과를 폐지하는 등 무용계 자체는 점점 위축돼 가고 있다. 이를 어떻게 전망하나
“지금까지 무용계는 별로 실속이 없었다고 본다.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요보다는 그저 공급만 너무 많았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수요 자체는 별로 없는데 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가무를 좋아하다보니 직접 무용 자체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 무용은 너무 어렵고 멀기만 하다. 사실 무용가들만의 세계 아니었나.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춤과 자리가 더 마련돼야 할 거다. 또한 무용과 수가 줄어들고 있는 건 오히려 난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무용과가 너무 많았었다. 이 작은 나라에 무용과가 50개나 있다는 건 너무 기형적이었다. 지금 정상궤도로 돌아오고 있다고 본다. 무용과 수가 줄어들면서 능력자들만 현장에 남고, 점차 거품이 빠지고 ‘진짜’가 남을 거다.”

-지금껏 가장 잘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반면 후회하는 일도 있을텐데.
“무용한 거. 가장 잘한 일은 무용한 거다. 유명 무용가들 보면 몸이 약해서 시작한 이들이 많은데, 나 역시도 무용을 하면서 신체적으로도 튼튼해졌고, 정신적으로도 내 자신을 성찰하고 돌아볼 수 있었다. 무용은 날 단련하는 수단이면서 난 무용으로부터 위안도 받았다. 그리고 후회하는 건 귀국 후 바로 교수가 된 거다. 한 10-20년 직접 뛰며 현장에서 더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이 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