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법관 스님
[윤진섭의 비평프리즘]법관 스님
  •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 승인 2013.11.1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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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윤진섭 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안 쪽으로 가다보면 강릉 인터체인지 조금 못 미쳐 왼쪽에 능가사라는 작고 아담한 절이 보인다. 그 절의 주지인 법관스님은 그림을 그린다. 워낙 규모가 작은 절이다 보니 시중을 들 행자도 없이 스님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고 신도마저도 다섯 명 밖에 없다.

수행이 목적인 스님에게 화가로서의 세속적 출세가 문제 될 리 없다. 여러 번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지만 도록에 화력(畵歷)을 적지 않는 이유이다. 세속적 명리나 출세를 지향하지 않으니 자연 그림이 맑고 청아하다. 법관 스님은 순수 추상화를 그린다. 그 추상화(抽象化)의 도정이 이미지가 사라지는 과정과 일치한다.

작업 초기에 그는 형상을 그렸다. 산의 이미지, 민화와 단청, 난초와 매화의 이미지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이미지라곤 하지만 구체성을 띤 것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세부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단순화된 기호로서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청색과 적색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사하는 그는 이미지를 사상(捨象)시켜 가면서 마음을 비운다. 그는 마음을 비우면서 사물 본래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마음을 집중하여 그림을 그리자니 그리는 행위를 방해하는 세상의 잡사(雜事)를 자연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선(禪) 수행의 방편으로서의 그림 그리기란 그리는 행위 이외에는 일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정신과 행위가 일치할 때 마음의 지고지순함이 화면에 배어든다. 아크릴 칼라와 동양화 물감, 그리고 석채가 혼합돼 이루어내는 순도 높은 그림의 색가(色價)는 맑은 정신성을 듬뿍 머금고 있다.

선수행자가 높은 정신성을 추구하는 것과 한국의 단색화에 정신성이 깃든 것과는 깊은 관련이 있다. 김환기, 박서보, 정창섭, 윤형근, 하종현, 정상화, 이우환, 최병소 등등 대부분의 한국 1세대 단색화가들은 마치 선 수행을 하듯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정신성, 행위성, 물질성은 한국 단색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이다.

한국의 단색화는 그렇게 함으로써 촉각의 세계를 드러냈는데, 이는 이성과 과학, 그리고 기하학적 엄밀성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미니멀 아트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서구의 미니멀 아트나 모노크롬 회화는 시각중심주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촉각, 곧 대지에 뿌리박은 동양의 사유 체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촉각의 세계는 몸의 세계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시각은 눈으로의 여행을 인도하지만, 촉각은 몸을 통한 여행의 상징성을 지닌다. 우리는 땅이 어떤 것인가를 알기위해서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는다. 사막에서의 신기루 체험처럼 눈으로만 봐서는 미혹에 사로잡힌다. 몸의 체험, 그것은 원초적이다.

선 수행에 따라붙는 육체적 고통은 수행자가 넘어야할 산이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득도란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오랜 참선으로 인해 엉덩이 살이 진물렀다는 효봉스님의 일화는 선 수행의 어려움을 말해준다. 법관스님의 참선 방식은 그림을 통한 수행과도 같다. 그는 그림에 정신을 일도(一到)하여 높은 순도의 색채 추상의 세계를 일궈냈다.

그 과정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들어 그는 청색의 단색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미지가 사라지면서 청색 바탕에 유사한 계통의 작은 붓 자국들이 나타난다. 그 끝이 어디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분명한 것은 산과 같은 이미지들이 드러났던 초기의 작품들이 상징화의 과정을 거쳐 무(無)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무의 세계, 다시 말해서 비움의 세계는 비움을 통해 가득 차 있음의 세계를 역으로 보여준다. 삼라만상의 복잡다단함은 단순으로 환원되고 단순은 다시 복잡다단함으로 나아가는 확산의 세계를 예비하는 것이다. 그 세계란 법관스님 스스로가 생각하듯 균형 감각에 그 요체를 두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법관스님의 그림 중에서 둥근 원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띠를 형성한 붉은 색조의 그림은 경계를 문제 삼고 있는 듯 하다. 주관과 객관의 경계, 사물과 사물의 경계, 정신과 육체의 경계 등에서 벗어나 원융(圓融)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 윤 진 섭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및 동대학원 미학과 졸업.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 철학박사.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국립현대미술관 초빙큐레이터(한국의 단색화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 역임, 현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 호남대 교수, 시드니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로 재직, 저서로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 <한국의 팝아트> 외 다수의 공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