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민속만 파고든 원로는 스스로를 ‘학생’이라 칭했다
50년 민속만 파고든 원로는 스스로를 ‘학생’이라 칭했다
  • 인터뷰-이은영 편집국장/정리-최영훈 기자
  • 승인 2014.01.05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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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민속학자 심우성 선생의 민속학 연구 일대기

유랑이라 했다. 방황이라고도 했다. 목적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녔다고 했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고, 스스로를 못난 놈이라고 불렀다. 자신의 어리숙함에 부족함을 느껴 부끄럽다고도 했다. 우리 전통 민속문화를 연구하고 계승하는데 평생을 바쳐온 원로민속학자 남천(南泉) 심우성(80) 선생은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해방 이후 꼭두각시놀음 재연, 사물놀이 명명, 서울예전 등에서 민속학 등 강의, ‘무형문화재총람’ ‘우리나라 탈’ ‘마당극 연희본’ 등 10여 권 저서 집필. 그가 말한 ‘허송세월’ 동안  ‘못난 짓’의 결과물이다.

심우성 선생은 자신 스스로 한 게 별로 없다며 겸손의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1979년 서울특별시 문화상·2003년 대통령 보관문화훈장 수상 등에 비춰보면, 세상은 결코 그의 업적을 낮춰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스스로 부족함이 많다고 평한다.

“남들이 저를 민속학자라고 하는데, 저 스스로는 그 명칭에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속학자라기보다 끊임없이 발전하는 백성의 풍속을 연구하는 ‘민속학도’라고 생각합니다. 민속학도가 제게 맞는 말 같아요.”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심 선생을 만나 그 일새을 다시 돌아보는 자리를 만들었다.

스스로 민속학도라고 칭하지만 심우성 선생의 업적은 다양하고 방대하다.

한국민속극연구소와 공주민속박물관을 설립해 민속학에 대한 연구와 그 성과물을 정리했다. 또 아시아1인극협회를 창립해 ‘1인극의 대부’로서 민족에 대한 문제들을 극화했다. 중앙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우리 문화의 흐름과 정신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 외 마당극·민속극·탈·전통인형·민속문화 등에 대한 저서를 집필할 정도로 다방면에 조예가 깊다.

▲ 원로민속학자 남천(南泉) 심우성(80) 선생이 최근 본지 <서울문화투데이>와 서울 인사동에 마련된 심 선생의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통해 지난 세월을 회고하고 있다.

그가 민속학을 파고든 데에는 한국전쟁 이후 원치 않게 접하게 된 인민군 경력이 배경에 있다. 휘문중학교 4학년에 재학중일때 전쟁이 발발했고, 얼떨결에 인민군 사상교육에 끌려가서 충북까지 내려간다. 보름정도 인민군과 함께 생활하다 다시 상경하게 된다.

이후 방송국 아나운서로 근무할 때 인민군 이력이 밝혀지며, 회사를 그만두고 민속학에 몸을 던지게 된다.

심 선생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로 우리 민족 대표적 떠돌이 예인들에 대한 책인 ‘남사당패 연구’ 집필을 꼽았다.

“제 고향이 충남 공주예요. 한국전쟁 이후에 공주로 다시 내려갔는데 그때 정광진이란 분이 계셨죠. 당시 제가 ‘조선연극사’라는 책을 보고 있었는데 그분께서 책 내용 중에 꼭두각시놀음이나 탈춤 사진을 보시더니 ‘내가 예전에 좀 놀았던 건데’ 이런 말씀을 하셨죠. 알고보니 그분께서 남사당패로 돌아다니셨던 거죠. 그때부터 남사당패들의 소상한 얘기를 들으며 계속 메모를 했죠. 이후 그 분께서 동료들이 산다고 말씀하셨던 충청 경기 지방을 다니면서  남사당 식구 10명 정도를 만나 연희를 배우게 됐어요. 옛 자료들도 수집하고 ‘남사당패 연구’라는 책을 내게 됐죠. 전문적으로 연구하거나 공부하신 분이 아니고, 산 경험 산 지식으로 일깨워주신 분이에요. 보잘 것 없이 보일 수 있던 분이 제겐 큰 스승이 되셨던 거죠.”

고향에 내려가 마주친 우연한 기회는 한차례로 끝나지 않고 심우성 선생에게 또 다른 업적을 만들어줬다.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것.

사물놀이 명칭 만든 민속학자

“어느 날인가 젊은이들 넷이 모여  꽹과리 치면서 놀이패를 하나 만들려고 하는데 나보고 이름을 좀 지어달라고 했어요. 민사물과 절사물 중 민사물로 논다고 했고, 네 명이서 논다는 말에 ‘사물놀이’라고 지었죠.”

▲ 심우성 선생은 '사물놀이'란 이름을 지었다.

1978년 남사당패의 후예를 자처한 김덕수, 이광수, 최종실, 김용배(작고)의 사물놀이 공연은 전통놀이의 파격적인 진화라는 찬사를 얻으며 화제가 됐다. 옛 농촌 풍물놀이에서 꽹과리·징·장구·북 등 4가지 악기만 따로 떼어 ‘사물놀이’란 새로운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명칭과 관련해서 심우성 선생에 대한 평가는 또 있다. 마을을 뜻하는 ‘부락’과 해녀를 뜻하는 ‘좀녀’란 명칭에 관한 일이다.

심 선생은 일본에서 천박한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는 곳을 뜻했던 ‘부락’이라는 단어를 ‘마을’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정부에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공식적으로 언급하기에 이른다.

이와 함께 그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움직임에 탄력이 붙은 해녀의 애환에 대해 얘기하며 ‘좀녀’란 표현을 알렸다. 그는 해녀의 훌륭함에 대해 크게 찬동한다면서도 그들 삶에 얽힌 비극과 애환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주에서 남자 대신 가사를 책임지던 그들의 애환을 간과해선 안된다는 얘기다. 해녀는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며 좀녀란 명칭을 알렸다. 제주 사투리로 고생하는 여자란 뜻이다.

심우성 선생에게 붙는 또다른 호칭은 ‘1인극의 거장’이다. 1인극 분야에서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의 위업을 이뤄냈다. 1인극의 뿌리는 한국 연극사에 대한 공부에서 시작된다.

1인극의 거장으로서 민족 문제 표현

▲ 심우성 선생
“우리나라 연극사를 공부하다가 1인극을 직접 하고 싶어져서 시작하게 됐어요. 우리 인생에 깊게 관여되는 문제들과 민족, 한반도에 대한 얘기들을 다뤘어요.”

1인극 배우이자 연출가로서 ‘홍동지의 나들이’ ‘다시라기’, ‘녹두장군 오셨네’ 등 작품을 선보였다. 심 선생은 1인극을 통해 분단, 민족상잔의 비극을 다루며 역사적 사실과 그를 포용하고 넘어서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파했다. 머리가 두개인 아기를 뜻하는 ‘쌍두아’라는 작품으로 일본에 진출해 도쿄 오사카 고베 나고야 큐슈에서 무대에 올라 재일동포들의 심금을 울렸다.

분단으로 일어난 여러 비극들을 다뤘기 때문에 경찰서에도 수차례 불려갔다. 사상적인 의심을 받았던 적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문화적인 배경에 대해 경찰들에게 얘기를 하고 순순히 풀려났다는 설명이다.

2009년 제3회 제주세계델픽대회에서는 제주 대표 창 ‘오돌또기’와 가수 혜은이의 ‘감수광’을 바탕으로 한 1인극 ‘탐라의 노래’를 선보였다. ‘넋전’이란 춤의 요소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심 선생에 의하면 넋전이란 무당이나 박수들이 종이인형에 끈을 달아 춤을 추게 만든 것이라 한다. 제주의 아름다운 소리와 우리 인형극의 좋은 유산인 넋전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보여준 소재들을 통해 민족과 인생을 집약시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의 애환이 담겨있는 것이죠. 앞뒤로 꽉 막혀 슬플 것만 상황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법이에요. 남과 북이 두개로 분리됐지만 아프지 않게 하나 되는 방법을 찾아야 된다는 소망을 담아냈습니다. 제가 쌍두아, 새야새야, 결혼굿 등에서 얘기했던 건 우리 민족의 애환이기도 하지만, 제 자신의 오늘을 낳게 해준 과거입니다. 결론적으로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것입니다.”

통일에 대한 염원은 민속학을 대하면서 자연스레 쌓인 민족적인 응어리의 결과물이다. 그가 말하는 민속학은 백성의 학문이요 민속은 민중의 풍속이다. 하지만 그 흐름이 맑고 깨끗하지 않다는 문제 의식에 기초해 민속학이란 학문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민속학이란 접근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민속학은 현재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진행형의 학문

하지만 그가 강조하는 것은 민속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다.

“민속학을 과거의 학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그런 식으로 방향이 흘러왔어요. 허나 민속은 민중의 숨소리고, 과거사가 아닌 현대사에요. 이걸 현대사가 아닌 방향에서 접근하고 해석되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민속이란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한테 현재진행형으로서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제가 ‘민속학 공부한다’고 하면 ‘뭐하러 옛날 얘기를 다루려 하냐’는 말씀들을 많이 했어요. 학계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심우성 선생은 민속과 민속학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민속학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 좋은 풍습을 찾아서 자랑하는 게 아니라, 복잡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 백성의 풍속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키는 게 좋은가 하는 방향을 찾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옛 것이 아닌 쭉 이어져 오는 것이죠. 그래서 민속학은 쉽고 아름다운 게 아니라, 바쁘면서 어려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로민속학자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진 그에게도 첫 시작은 어려웠다. 그 첫 시작엔 세 명의 근대학자, 민속학자들이 있었다. 심 선생은 이들을 ‘조선학의 선각자 이능화, 방법론의 개척자 손진태, 송석화’라고 서술했다. 지난해 8월 출간한 ‘한국 민속학의 기억과 기록’이란 책을 통해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한국 민속학의 발자취부터 민속 문화와 민중의식까지 파고들었다.

“일제강점시기가 시작되던 초창기 무렵에 활동하시던 인사들에 대한 비판도 담았지만, 어려운 상황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어요. 예를 들면 해방이나 한국전쟁 등을 경험한 나이 아닙니까. 그 이전 시대의 경험을 통해 이 시대가 풀어야할 여러 숙제들의 해법이 보이는 듯 했어요. 그 생각으로 예전 책을 열심히 봤고 민속학이란 방향으로 향하게 된 거죠. 굉장히 열심히 탐구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세 분 모두 외세의 풍파를 견디고 고뇌하면서 애쓰신 분들이에요. 그런 측면에서 선배들의 아픔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저나, 우리들이 느껴보자는 의미에서 글을 많이 썼어요. 책에서 세 분에 대해 접근하면서 방향을 찾으려고 했죠.”

‘미쳤다’라는 말 들으며 전국 돌며 민속문화 채록

한때 심 선생은 ‘미쳤다’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민속학을 팠다. 6~7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속문화를 채록했다. 그는 스스로 이 기간에 대해 ‘방황’이라고 표현했다.

“이 마을 저 마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보고 방황했죠. 좋은 얘기로 하면 공부시간이지만요. 민속학이란 것은 민중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니까 제가 택한 방법 외에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여러 어르신들을 뵙고 많은 말씀 듣고, 풍습에 대한 기록들도 많이 찾게 됐어요. 또 여러 악기나 관련 의상도 많이 모으게 됐죠.”

 

그렇게 30년이 지나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고향인 공주에 민속극박물관을 세우게 된다. 1996년의 일이다. 우리나라 전통 인형극에 쓰이는 인형과 각종 탈은 물론 반주악기, 1인극 연극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책, 불교 영등놀이 그림 등 민속극에 쓰이는 여러 가지 유물들을 전시돼 있다. 자신의 세월 그리고 노력과 맞바꾸다시피 한 1000여 점 자료들이 소장돼 있다. 농기구 자료실에도 재래농기구와 관련 문헌, 목수연장 등 선조들의 생활이 담긴 도구들을 모아놨다. 

그를 바르게 평가해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스스로 모은 기록들과 연구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강의를 하며 민속학이란 학문을 전파하는데 힘썼다는 것에 있다.

심우성 선생은 서라벌예대, 서울예전, 덕성여대, 중앙대, 한양대 등에서 민속학, 연극사, 인형극 등에 대한 강의를 했다. 또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당시 전통예술원에서 민속학을 가르쳤다.

“전통예술원에서 남사당패 뿐만 아니라 민속놀이를 해가며 전국을 떠돌았던 조상들의 역사에 대해서 폭넓게 얘기했어요. 흔히들 연극이나 음악이라하면 외국에서 들어온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얼이 깃든 것이 거든요. 옛날 거라 가치가 없어진 게 아니라 전통적인 우리 문화의 본디 흐름은 어떤 것인지, 그걸 공부하는 게 우리 문화를 되찾는 좋은 길이 될 것이란 걸 얘기했죠. 민요로 보면 그 안에 담긴 여러 감정들 슬픔 즐거움 기쁨 분노가 다 담겨 있는 것인데, 외국 것에만 치중하면 우리 문화의 발전이 더뎌지지 않겠어요? 우리 조상들의 생활을 재확인하는 게 진정 문화를 발전시키는 거라고 가르쳤어요. 당시 많은 분들이 제 학문에 대해 ‘효과적인 학문이 아니고 조상만 앞세우려는 것’이라고 비판을 하면서 외국 즉 선진국을 본받아야된다는 말들이 많았죠. 그러나 저는 우리 것을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던 시절이었죠.”

“민족의 얼, 정작 중요한 것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렇게 일생을 민속학에 바친 원로학자는 요즘 시대를 두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현재 국가가 문화융성을 기조로 내세우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전세계적으로 한류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인 상황이지만, 정작 우리 고유의 문화와 그에 깃든 정신을 홀대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에 기초했다.

“세계에서 한국 풍속이나 문화에 대해 찬동하고 흉내내는 것이 많다고 하는데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죠. 대체로 오늘날 민속이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면도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정직하게 알아야 할 외세의 흐름, 이런 흐름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니라, 그 흐름의 강인함에 의해 우리 민족의 얼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에요. 한국전쟁 직후 가장 비극의 끝에 옳은 방향을 찾으려고 뜨겁게 손잡았던 그 시기는 가버리고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죠.”

이와 함께 민속문화와 관련해, 무형문화재 지정 등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견지했다. 무형문화에 대한 전국민적인 관심이 옅어지는 것에 대한 씁쓸함이었다.
“현재 무형문화재를 국가에서 지정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우리나라나 일본 타이완 정도 밖에 없어요. 자연스럽게 그런 문화들이 유지, 계승되는 나라에선 그럴 필요가 없는 거죠. 문화재 지정을 할 수밖에 없던 그 과정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단 얘기에요. 지정을 하지 않으면 없어질 수밖에 없는 과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무형문화재 지정에만 의지하면 안 돼요. 국민 스스로 오랜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지켜야 변화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거죠.”

“민속학자 아닌 민속학도일 뿐입니다”

‘민속학의 대가’ 심우성 선생은 앞으로 남은 과제에 대해 ‘아리랑 책 출판’과 제주 43사건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전했다.
정선아리랑과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을 두루 다루고, 나운규의 아리랑을 깊게 판 ‘통일 아리랑’을 통해 그는 조심스레 통일을 향한 염원을 다시 표출한다. 또 수년째 기거하는 제주에서 43사건에 대해 깨달으면서 느꼈던 가슴 뜨거운 감정들과 그에 앞선 사실들을 풀어낼 계획이다.

이처럼 심우성 선생은 자신의 인생을 모두 민속학 연구에 바쳤지만, 끝끝내 자신에게 ‘민속학자’라는 호칭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민속학도’란 말로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전 저를 민속학자가 아닌 민속학도라고 생각해요. 평생 학도로 끝낼 수 있다면 대단히 행복할 겁니다. 백성의 풍속은 대단히 훌륭한 것 같으면서도 끊임없이 더 훌륭한 방향으로 고쳐나가는 것이에요. 결과론이 아니고 진행론인 것이죠. 그게 민속학을 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속학도인 겁니다.”

남천 심우성
1934년 6월 28일생

◆약력

1954 서울방송국 아나운서
1960 민속극회 남사당 설립 대표
1963 대한뉴스 아나운서
1966 한국민속극연구소 소장(현재)
1970 서라벌예대, 서울예전, 덕성여대, 중앙대, 한양대 등 민속학, 연극사, 인형극 강의
1979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80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전문위원
1985 아시아1인극협회 창립 대표(현재)
1994 민학회 회장
1996 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
2002 한국종합예술학교 전통예술원 객원교수
2002 문화재청 무형문화재분과 위원장
2003 대통령 보관문화 훈장 수상

◆저서

통일아리랑, 무형문화재총람, 남사당패연구, 한국의 민속극, 마당극연희본, 우리나라 탈, 우리나라 인형, 민속문화론서설, 우리나라 민속놀이, 옷본, 전통문화를 찾아서, 전통문화 길잡이, 굿·춤·소리를 찾아서

◆1인극

쌍두아, 문, 남도 들노래, 새야 새야, 판문점 별신굿, 결혼굿, 거창 별신굿, 녹두장군 오셨네, 일본군 위안부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여, 4·3의 고개를 넘어간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