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books] “시도 내게” 꿈과 “같은 것일까?”
[Book &books] “시도 내게” 꿈과 “같은 것일까?”
  • 이소리 논설위원
  • 승인 2014.04.0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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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경림, 6년 만에 열한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 펴내

사진관집 이층에서 하숙을 하고 싶었다.

한밤에도 덜커덩덜커덩 기차가 지나가는 사진관에서

낙타와 고래를 동무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아무 때나 나와 기차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갈 수 있는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을 그 먼 곳에 갈 수 있는,

어렸을 때 나는 역전 그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꿈이 이루어져 비행기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다녀봤지만, 나는 지금 다시

그 삐걱대는 다락방에 가 머물고 싶다.

아주 먼 데서 찾아왔을 그 사람과 함께 누워서

덜컹대는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 소리를 듣고 싶다.


 

다락방을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싶다.

그 사람이 날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어두운 그늘에도 젖고 눈부신 햇살도 쬐고 싶다.


 

그 사람의 지난 세월 속에 들어가

젖은 머리칼에 어른대는 달빛을 보고 싶다.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첫날을

다시 삐걱대는 사진관집 이층에 머물고 싶다.

-‘역전 사진관집 이층’ 전문

‘한국문단을 넉넉하게 아우르는 느티나무’ 시인 신경림. 그가 새 시집 <사진관집 이층>(창비)을 펴냈다. 새 시집으로는 열 번째 시집 <낙타>(창비 2008)를 펴낸 지 6년 만이다. 시인 신경림은 이번 시집에서 “한평생 가난한 삶들에서 우러나오는 이야기들을 고졸하게 읊조리며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건네는 “맑고 순수하고 단순한 시편들”(시인 문학평론가 이경철 ‘발문’)을 터뜨리고 있다.

창비는 이 시집에 대해 “지나온 한평생을 곱씹으며 낮고 편안한 서정적 어조로 삶의 지혜와 철학을 들려준다”며 “올해 팔순을 맞는 시인은 연륜 속에 스며든 삶에 대한 통찰과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시편들이 묵직한 울림 속에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가슴 저릿한 전율과 감동을 자아낸다”고 밝혔다.

이 시집은 모두 4부에 53편이 시인 박성우 추천사 “서러운 행복과 애잔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정릉동 동방주택에서 길음시장까지,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정릉에서 서른 해를, 당당히 빈손을, 두메양귀비, 낯선 강마을에서의 한나절, 이제 인사동에는 밤안개가 없다, 새, 누구일까, 인생은 나병환자와 같은 것이니, 옛나루에 비가 온다 등이 그 시편들.

올해 등단 59년을 맞은 시인 신경림은 ‘시인의 말’에서 “늙은 지금도 나는 젊은 때나 마찬가지로 많은 꿈을 꾼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며 “때로는 그 꿈이 허황하게도 내 지난날에 대한 재구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꿈은 내게 큰 축복이다. 시도 내게 이와 같은 것일까”라고 적었다.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별' 모두

시라는 외길을 평생 걷고 있는 시인 신경림. 올해 팔순에 접어든 원로시인은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고 되뇐다.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더 잘 보이는 그 별. 나도 나이가 한참 더 들면 그 별을 볼 수 있을까. 하긴, 별은 환한 대낮(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고 어두워야 잘 보이는 것 아닌가.

시인 신경림이 이 시에 숨겨둔 핵은 나이가 지그시 들어야 이 세상 모든 것이 별처럼 환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 사람들 사이에 별이” 환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 하나를 제대로 보아야 그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도 제대로 보이지 않겠는가.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이자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이리저리 마구 엉긴 실타래를 풀려면 그 실이 시작된 뿌리를 찾아야 풀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세상살이도 그러하다.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그저 나온 속담이 아니지 않겠는가.

떠나온 지 마흔 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 치는

가난한 아내와 함께 부엌이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 산다

전기도 없이 흐린 촛불 밑에서

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

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

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산다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는데도

어쩌면 꿈만 아니고 생시에도

번지가 없어 마을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 번지

떠나온 지 마흔 해가 넘었어도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지금도 이 번지에 산다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몇 토막

그래. 나도 오십대 허리춤께로 들어선 지금까지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가난한 아내와 함께”가 아니라 기러기 남편이 되어 “부엌이 따로” 있는 사글셋방에 살고 있다. 오늘도 기러기 아빠가 건강하게 돈 잘 벌 수 있기를 창원에서 기도하고 있는 아내, “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살고 있다.

나는 매일 아침 이 골목 저 거리를 훑고 다닌다

어느새 서른 해가 훨씬 넘었다

정릉에 들어와 산 지가

눈에 익지 않은 거리가 없고

길들지 않은 골목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매일 아침

이 골목 저 거리를 훑고 다닌다

어제까지 못 보던 것 새로 볼 것 같아서

밤이면 깨닫지만

아무것도 새로 본 게 없구나


 

아침이면 다시

활기차게 집을 나온다

입때까지 못 보던 것 무언가

어제 보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게 무언지 오늘

찾아야겠다 생각하면서

정릉에서 서른해를 넘게 살면서

-‘정릉에서 서른해를’ 몇 토막

나는 7호선 사가정역을 끼고 있는 용마산 자락에 4년째 살고 있다. 나도 시인 신경림처럼 “눈에 익지 않은 거리가 없고 / 길들지 않은 골목이 없”지만 틈만 나면 사가정공원과 용마산, 사가정시장과 면목시장을 이 잡듯이 훑고 다닌다. “어제까지 못 보던 것” 문득 “새로 볼 것 같아서”다.

시인 신경림 열두 번째 시집 <사진관집 이층>은 지난 세월을 밑거름으로 삼아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그 속내를 차분하게 더듬는다. 이 시집을 읽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저만치 서녁하늘에 곱고 예쁘게 물드는 노을에 퐁당퐁당 빠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저 노을이 서럽도록 아름다운 것은 오늘이라는 하루를 그 누구보다 열심히 헤쳐왔기 때문 아니겠는가.

시인 박성우는 ‘추천사’에서 “지난한 삶과 인생 굴곡에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 시인은 그저, 어제와 오늘의 시간을 사진기에 담아 굳이 흑백으로 인화해 보여준다”고 쓴다. 그는 “마음 깊은 곳을 꺼내놓을 때도 마찬가지”라며 “흑백에는 얼마나 많은 빛깔이 숨어 있는 걸까”라고 가만가만 읊조린다.

박성우는 “시인이 펼쳐주는 사진첩에는 꽃 같은 생애와는 무관할 것 같은 민중의 일상이 작약과 들국화와 쑥부쟁이와 찔레꽃과 매화꽃과 복사꽃과 개나리꽃과 양귀비와 해바라기와 민들레로 피어 있다”며 “비록 주목받은 적 없는 비일비재한 생애일지언정 느티나무나 살구나무나 자작나무나 굴참나무나 상수리나무와 같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군소리 없이 살아가며 나이테를 늘려가고 있다”고 적었다.

시인 신경림은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와 동국대에서 공부했으며, 1956년 <문학예술>에 ‘갈대’ 등이 추천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농무> <새재> <가난한 사랑노래> <길> <쓰러진 자의 꿈>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뿔> <낙타> 등 여러 권이 있다.

동시집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산문집 <민요기행> <시인을 찾아서> 1·2 등을 펴냈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시카다상, 만해대상, 호암상 등을 받았다. 지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동국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