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계의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나간 풍강 최종민
국악계의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나간 풍강 최종민
  • 김승국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상임부회장
  • 승인 2015.06.29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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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故 풍강 최종민.

국악이론가이자 방송인으로서 국악의 저변확대와 대중화에 힘써온 풍강 최종민 선생이 일년이 넘는 뇌종양 투병 끝에 금년 5월 14일 이 세상을 떠나간 것이 한 달이 지났다.

그는 일반 대중들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우리 국악을 방송과 무대를 통하여 명쾌하고도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해설을 해주어 많은 사람들이 국악에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하였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숙성시켜 조곤조곤 해설을 해주던 최종민 선생의 다정다감한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돌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지병으로 타계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고인은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는 편이어서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건장한 편이었으나 2014년에 들어서서 평소 매끄럽게 진행하던 국악방송의 생방송 프로그램인 ‘최종민의 국악산책’에서 약간 어눌한 말투와 진행으로 애청자들 사이에 그에게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 어린 말들이 나돌았다.

급기야 2014년 1월12일 생방송 중에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와 놀란 방송진행 PD들이 최교수에게 검진을 해볼 것을 권유하여 검진 결과 뇌종양임을 알게 되었고 서울대병원에서 종양 제거 수술을 하고 상당기간 함암 치료와 건강 회복을 위한  각별한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1년간의 투병 끝에 애석하게도 2015년 5월 14일에 운명하였다.

그는 악성뇌종양 제거 수술 후에도 ‘광대의 자질을 타고 난 박정욱의 배뱅이 굿’ (2014. 5. 8),  ‘유교음악과 풍류와 정악의 관계를 어느 정도 파악하도록 합시다’ (2014. 5. 10)를 써가며 재기의 노력을 하였으나 ‘개인을 존중하는 한국의 음악문화’ (2014. 5. 18)를 끝으로 그의  칼럼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운영하던 모 포털사이트 인터넷 카페인 ‘최종민의 국악세상’ 에 2014년 7월 13일에 그는 아래와 같은 마지막 글을 남기었다.

.......(전략) 하여간 나는 금년(2014년) 그런 치료는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해 치료기간을 6개월 가져야 된다고 해서 아직 치료 중이고 보수용 약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2014년)10월2일이면 모든 공식 일정을 마치게 되는데 끝나고 나면 또 다시 할 일들이 많아서 언젠가는 다시 방송도 조금은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 다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때만 해도 그가 회복의 희망을 놓지 않았기에 안타까움이 더한다.

최종민은 1942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경북 풍기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가 자랐던 풍기의 풍(豊)자와 출생지인 강릉의 강(江)자를 따서 스스로 아호를 풍강(豊江)이라 지었다한다. 그는 풍기초등학교, 안동사범병설중학교와 안동사범학교를 졸업했고 서울대학 음악대학 국악과에서 국악이론을 전공하였고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악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예술철학을 전공하였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1968년 안동교육대학 교수로 출발하여 1970년 강릉교육대학 교수, 1982년 전남대 교수, 1983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1998년 남원정보국악고등학교 교장, 2000년 국립창극단 단장, 그리고 타계하기 까지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하였다. 한때는 서울대학교 강사,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성신여자대학교 강사, 덕성여자대학교 강사로서 강단을 떠돌기도 했다. 특히 말년에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는 14년간 겸임교수로 있었지만 실제로는 과주임처럼 매학기 강의를 개설하고 강사를 섭외하는 등 행정업무의 일부까지 맡아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최종민 교수와 나와의 인연은 각별하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최종민 교수는 나의 학위 논문 심사위원이기도 하였고, 평소 세미나나 학술회의를 통해서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이기는 하였으나 내가 현 국립전통예고의 전신인 서울국악예고의 학교 국립화 추진 실무 책임을 맡아 국립화를 반대하는 세력과 외롭게 싸우고 있을 때 전면에서 나를 지지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급속히 가까워졌다.

내가 학교 국립화를 이루고 학교를 나와 사단법인 전통공연예술연구소를 개소하였을 때도 개소식에 친히 참석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또한 2011년에서 2012년까지 서울시문화재위원회 제3분과인 무형문화재 분과에서 함께 위원으로 활동하여 나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내가 최종민 교수를 구례 동편제소리축제 축제추진위원장으로 구례군에 추천하여 ‘구례 동편제소리축제’를 다른 축제와 차별화되는 축제로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게 하였으니 최종민 교수와 나는 각별한 인연이 아닌가 싶다.

그의 큰 강점은 친화력이다. 그가 오랫동안 방송인으로 활동하여 인지도가 높은 잇점을 활용하여 문화계뿐만 아니라 정관계, 언론계, 재계, 사회 전 분야에 폭넓은 인맥을 유지하였다. 특히 그와 처음 만난 사람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한 때 정악계와 민속악계가 대립 구도를 이루고 있었을 때도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각을 유지하였으며, 그것 또한 그의 강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국악계의 동료와 후배, 그리고 제자들의 멘토(mento)와 헬퍼(helper)가 되어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도움을 청하는 이가 있다면 거리에 구애받지 않고 달려가 도왔다. 한 때 구설수와 송사에 휘말려 세인들의 뒷 담화를 듣기도 하였지만 흠보다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 2009년 (사)전통공연예술연구소 개소식 기념사진. 왼쪽부터 유길촌 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김종규 문화유산신탁이사장, 최종실 기산국악제전위원회 위원장, 풍강 최종민 선생, 필자(김승국).

그는 국악을 보급하기 위하여 방송활동을 많이 하였다. 1977년에서 1988년 까지 KBS TV ‘국악의 향기’, ‘국악교실’을 진행하며 해설을 하였고, KBS FM이 생기면서 ‘흥겨운 한마당’을 맡아서 1993년까지 MC로 활동하였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는 EBS FM의 ‘우리가락 노랫가락’ MC를 하였고, 2000년부터 2002년까지 KBS TV ‘국악한마당’의 MC를 맡았으며, 2001년 국악방송이 생기면서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2시간 생방송으로 ‘최종민의 국악세상’을 맡아 MC를 하였다.

저서로는 공저로 나온 ‘한국의 민속음악’, ‘전통예술을 통하여 본 한국인의 미의식’ 등이 있고, 단행본으로 나온 ‘국악의 새로운 숨결’, ‘국악의 이해’, ‘민요-이렇게 가르치면 제 맛이 나요’, ‘한국전통음악의 미학사상’ 등과 많은 수의 논문을 남겼다.

그는 우리 교육 현장은 우리의 음악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을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음악언어를 가르쳐야한다고 늘 주장하였다. 한국말이 가장 잘 표현되는 우리노래를 만들고 누구나 쉽게 몸과 마음으로 부를 수 있는 우리노래를 부르도록 해야 하며, 그래야 창의성과 심미안도 길러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생각을 실천하기 위하여 그는 말년에 음악의 모국어를 가르치는 이론과 방법을 책으로 내고, 아울러 교재까지 개발하여 우리나라 음악교육이 명실상부한 한국의 음악언어를 가르치는 교육이 되도록 하고자 준비를 하다 완성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가 버렸다. 누군가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미완의 작업을 완성시켜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본다.

풍강 최종민. 그는 국악계의 한 시대를 풍미하고 떠나갔다. 그가 국악계의 크나 큰 자산이었기에 그의 타계는 국악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두 손 모아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