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칼럼] ‘그냥 지금 하자’에 담긴 역전의 미학
[전시칼럼] ‘그냥 지금 하자’에 담긴 역전의 미학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9.05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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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i 미술관 김구림-김영성 작품전, 이렇게 관람할 수도 있다

김구림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작품 활동을 해온 예술가다. 40년 이상을 예술을 위해 살았으니 이제는 새로움을 추구하기 보다는 이전 작품을 기획하고 콘셉트한 ‘관성’에 따라 작품을 만들기 쉬울 법하다. 하지만 김구림은 기존에 만들어온 작품의 콘셉트를 따라 하는 관성의 법칙을 거슬러 오른다. 아니, 스스로가 거부한다.

▲ 김구림, '음과 양 11-05.70'

‘그냥 지금 하자’ 작품에서 김구림이라는 거장의 타이틀을 뗀 채 일반인에게 이렇게 물어본다고 가정하자. “지금 보는 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나이대가 어느 나이대일 거라고 짐작되느냐”고 전시를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에게 김구림의 전시된 작품을 보여주며 묻는다면, 백 중 구십 구는 아마도 “이십대, 많아봐야 삼십 대 작가의 작품”일 것이라고 대답할 것을 확신한다.

그만큼 ‘그냥 지금 하자’에 전시된 김구림의 콘셉트가 올드하거나 구태의연한 작품이 아닐 것이기에 가상 질문과 가상의 답변을 언급한 거다. 해골과 훼손된 손을 콘셉트로 한 ‘음과 양’을 보면 ‘타나토스’, 죽음의 이미지가 창궐하다. 생기를 얻는 이미지가 아니라 ‘사의 찬미’가 작품  곳곳에 스며 있다. 무덤은 그냥 무덤이 아니라 디지털 화면으로 뒤덮인 채 디지털로 말미암은 문명의 폐해, 디지털의 타나토스를 상징화한다.

하지만 김구림은 타나토스의 이미지만 작품 안에서 강조한 게 아니다. 만일 김구림이 타나토스의 이미지만 강조하고자 했다면 작품의 이미지는 피폐하고 음울하고 망가진 이미지로 창궐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여자의 잘린 손은 빨란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고, ‘토르소’처럼 다리가 잘린 여자의 육체는 불에 타다 만 것처럼 볼품사나운 빛깔을 띄고 있다.

▲ 김구림, '음과 양'

그럼에도 여성의 아름다운 원형이라는 ‘형상’은 간직한 것처럼 보인다.(여기에서 언급한 형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이라는 걸 밝힌다) 타나토스의 이미지가 다가 아니라 아름다움이라는 심미적 이데아가 작품 안에 ‘이스터 에그’처럼 숨어있어서 죽음의 이미지 안에 미처 침윤되지 않은 아름다움을 어서 찾아보라고 손짓하는 게 필자의 눈에는 보이고 있었다.

만일 타나토스의 이미지가 ‘음과 양’ 작품 콘셉트의 전부였다면 반짝이는 해골에 달린 두 날개는 박쥐의 날개처럼 악마적인 형상을 갖고 있었어야 적당하지, 새의 날개라는 아름다운 날개가 달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영성의 작품 세션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과의 만남’을 한 마디로 압축하면 ‘유기물과 무기물의 만남’이리라. 청개구리와 금붕어와 같은 미세한 유기체는 자연의 품 안에서 거닐지 않는다. 차가운 금속 숟가락 위에 놓여있거나, 톱니바퀴 위에 있거나, 유리컵과 같은 인간미나 자연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기물 안에 안쓰럽게 놓여있다.

▲ 김영성, '無.生.物'

자연과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지배욕, 혹은 탐욕이 무기물이라는 차가움, 혹은 문명과 결합되었음을 은유적으로 읽힐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반전’되는 포인트가 있다. 인간이 컵을 엎어버리면, 톱니바퀴를 작동시키면, 숟가락을 던져버리면 작은 생명체의 생명은 온전히 담보할 수 없다.

흘긋 보면 아름다워 보이는 유기물과 무기물의 결합은 아름다워 보이는 정밀한 회화가 다가 아니라 무기물이 움직일 때마다 유기체의 생명을 담보할 수 없기에 애처로워 보인다. 그림 안에는 드러나지 않는 캔버스 밖 인간의 손길에 의해 얼마든지 작은 생명체들이 생명을 위협받는다는 함의가 숨겨진 ‘가장 작은 이들과의 만남’은 아름다운 이미지 뒤에 타나토스의 이미지가 캔버스 밖으로부터 읽을 수 있는 섬뜩한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 전시 '그냥 지금 하자' 오프닝이 4일 오후 5시 OCI미술관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김영성 작가,OCI미술관 김지예 큐레이터, 김구림 작가

‘그냥 지금 하자’는 타나토스가 다일 것 같은 작품 안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이 이스터 에그처럼 숨어있는 반면에, 미생물의 아름다운 세밀화를 통해서는 캔버스에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손길이 얼마든지 미생물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반전, 혹은 역전의 관점을 내포하는 전시로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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