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무한동력’에서 ‘맨오브라만차’ 슬픈 수염의 기사가 보여
[칼럼] ‘무한동력’에서 ‘맨오브라만차’ 슬픈 수염의 기사가 보여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10.04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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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것조차 사치라고 말하는 사회와 얼마만큼 타협할 수 있을까

우리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꾸는 꿈이 얼마나 대단할까를 곱씹어본다. 얼마나 그 꿈이 대단하기에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꿈을 포기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무한동력’의 철물점 주인 한원식의 꿈은 이룰 수 있는 꿈이라기보다는 이룰 수 없어 보이는 꿈, 무한동력을 만들겠다는 꿈이다.

▲ '맨오브라만차'의 한 장면 (사진제공=오디컴퍼니)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력기관은 지속적인 에너지 투입이 필요하다. 빛에너지를 내기 위해 전기와 화석 연료의 에너지를 받는다 해도 이들 에너지가 100% 빛에너지로 바뀌는 게 아니라 일부는 열에너지 등으로 소모되기 때문이고, 지속적인 다른 에너지를 공급 받아야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로 전환 가능한 게 이 세상 모든 동력기관의 속성이자 동시에 한계다.

그런데 한원식은 다른 에너지로 바뀌는 손실을 최소화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손실률 제로에 도전하는 것도 모자라 에너지를 하나도 공급하지도 않으면서 영원히 돌아갈 수 있는 동력기관을 꿈꾼다. 한원식의 꿈은 에너지 손실률 제로와, 에너지 공급 없이 영원히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두 가지 꿈을 추구하는 셈이다.

이런 한원식의 무한동력을 향한 무모해 보이는 꿈은 ‘맨오브라만차’에서 기사도라는 꿈을 놓지 않고자 하는 돈키호테, 슬픈 수염의 기사의 무모해 보이는 꿈과 닮았다. 돈키호테의 시대는 기사의 전성기가 아니다. 여관 주인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기사를 퇴물 취급하는 ‘죽은 기사의 시대’다. 그럼에도 슬픈 수염의 기사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흠모하는 둘시네아를 지키려고 애를 쓴다.

때로는 집시들에게 휘둘려 가진 돈을 몽땅 빼앗겨도, 거울의 기사에게 기사의 꿈을 홀랑 빼앗겨도 결국 돈키호테는 슬픈 수염의 기사라는 정체성을 되찾고 평온한 잠자리에 든다. 에스파냐에서 시들어버린, 모두가 놓고자 하는 기사도의 꿈을 잠시나마 잃어버리지만 다시금 되찾고는 기사라는 행복한 꿈을 되찾는다는 ‘맨오브라만차’의 판타즘은 에드워드 즈윅의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판타즘과 일맥상통하다.

▲ '맨오브라만차'의 한 장면 (사진제공=오디컴퍼니)

에스파냐 사람들 모두가 기사를 허황된 가치관으로, 낡은 가치관으로 치부하지만 돈키호테는 자신의 정체성을 슬픈 수염의 기사로 부여하고는 눈 감는 순간까지 그 꿈을 향해 달려간다. 한원식이 꾸는 무한동력이라는 꿈은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어 보이는 절대 이상이다. 이 꿈을 지키려다 보니 아들과의 소통은 요원하기만 하고, 매스컴에서는 한원식을 비정상적인 인물로 왜곡 보도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원식의 딸 한수자와 취업준비생 장선재 두 사람은 면접관으로부터 무한동력이 허황된 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다그침을 받는다. 무한동력이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기에는 한원식 본인뿐만 아니라 딸과 장선재라는 젊은이에게조차 한없이 버거워 보인다.

‘맨오브라만차’와 ‘무한동력’이라는 두 뮤지컬은 관객에게 묻는다. 자신이 품는 꿈이 현실과 괴리되어 있을 때, 혹은 ‘임파서블 드림’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주위의 비아냥거림을 듣더라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릴 정열이 있는가를 묻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두 뮤지컬 중 '무한동력‘은 만일 이룰 수 없는 꿈을 끝까지 달려갈 자신이 없을 때에는 현실과 어떻게 타협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객석에 묻는다. 현실과 타협했을 때와 타협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한수자와 장선재를 통해 알 수 있다.

▲ '무한동력'의 한 장면 (사진제공=PAGE1)

취업이냐 합격이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이상향을 고집했다가는 바늘귀 같은 취업문을, 명문대 합격을 보장받지 못할지라도 끝까지 이상향을 향해 달려갈 건가, 아니면 현실과 적절하게 타협하는 타협안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객석은 이상향을 향해 끝까지 달릴 수만은 없을 반응이 적잖이 나올 것이라 예상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극 중 돈키호테나 장선재 같은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들이 살기에는 너무나도 삭막한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했기에 말이다.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는 게 어쩌면 미련곰탱이처럼 꿈을 향해 달려가는 것보다는 지혜로운 처신으로 보일 만큼 지금의 젊은이들이 숨 쉬는 사회는 젊은이들이 꿈꾸는 것조차 사치라고 종용하는 사회이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