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챠이카’ 기성세대에 포획당한 건 꼬스챠와 니나만일까?
‘챠이카’ 기성세대에 포획당한 건 꼬스챠와 니나만일까?
  • 박정환 칼럼니스트
  • 승인 2015.10.0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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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스챠와 니나, 취업에 몸부림치는 이삼십대로도 볼 수 있어

 ‘챠이카’를 개막한다고 했을 때 필자는 대학로에서 쳇바퀴처럼 회자되는 안톱 체홉의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쯤으로만 생각하고 스쳐 지나치는 공연 가운데 하나로만 막연히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로에서 회자되는 정극을 보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햄릿’에 한이라도 맺힌 듯 ‘햄릿’을 재해석한 작품들로 도배를 하거나, 체홉 탄생을 기념하여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체홉 열풍이 불었던 것처럼 고전의 붐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썰물처럼 지나가는 게 대학로의 고전 트렌드였기 때문이다.

▲ '챠이카'의 한 장면

그럼에도 사람이 말랑말랑한 슈크림 빵만 먹을 수는 없는 것처럼, 고전이라는 정극을 상설화함으로 안톱 체홉의 ‘갈매기’를 ‘챠이카’로 명명하고 석 달이라는 장기 공연을 계획한다는 건 대학로를 찾는 관객이 달달한 사랑 이야기만 찾는 문화 편중 현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로 읽을 수 있다.

극 가운데서 갈매기라는 오브제는 1막 후반부에 되어서야 등장하지, 1막 초반부와 중반부에는 등장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타이틀이 사람의 이름이 아닌 오브제에 불과한 갈매기로 명명될 수 있었던 건 갈매기가 지난 상징성 때문이리라. 극 중 갈매기는 살아있는 생명체로서의 갈매기가 아니라 생명을 잃은 갈매기로 표상되는 건, 죽은 갈매기가 남주인공인 꼬스챠와 여주인공인 니나로 유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갈매기가 살아있는 두 주인공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지금부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꼬스챠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온 몸으로 거부하는 인물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어머니를 연정의 대상으로 품는 감정인데, 꼬스챠는 어머니를 오이디푸스처럼 연정의 대상으로 사랑하기는커녕 어머니의 그림자에 주눅이 들어 어머니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인물이다.

▲ '챠이카'의 한 장면

꼬스챠가 애써 준비한 연극이 망가지는 원인제공자, 혹은 어머니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아들 꼬스챠의 욕구를 무너뜨리는 이는 타인도 아닌 꼬스챠의 어머니다. 어머니를 극복하고 어머니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젠더가 변형된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발현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제공자가 다름 아닌 꼬스챠의 어머니라는 이야기다. 1막에서 꼬스챠가 총으로 포획한 갈매기는 어머니의 그늘에서 독립하지 못하는 꼬스챠의 자화상을 죽은 갈매기로 표상한 것이나 다름없다.

죽은 갈매기를 표상하는 또 다른 인물은 니나다. 원래 니나는 꼬스챠의 애인이었다. 하지만 꼬스챠의 어머니가 꼬스챠가 준비한 연극을 모욕한 탓에 꼬스챠와는 관계가 멀어진다. 대신에 니나는 꼬스챠의 어머니와 관계를 맺고 있던 유명 작가 뜨리고린에게 관심을 갖고 동거를 한다. 하지만 뜨리고린의 힐난에 주눅이 든 나머지 제대로 된 연기를 펼치지 못하고 3류 여배우로 전락하고 만다. 니나는 뜨리고린에게 포획당한 갈매기로 해석이 가능하다.

꼬스챠와 니나가 누군가에게 포획당한 갈매기로 표상이 가능하다면 꼬스챠와 니나를 포획한 사냥꾼은 꼬스챠의 어머니와 니나의 애인 뜨리고린이 된다. 이는 꼬스챠와 니나라는 청춘이 꼬스챠의 어머니와 뜨리고린이라는 중년에게 포획되고 희생 당한다는 의미와 매한가지다.

▲ '챠이카'의 한 장면

그렇다고 러시아의 청춘만 기성세대에게 발목 잡히는 것일까. 청춘이 기성세대에게 포획된다는 관점으로 ‘챠이카’를 바라보면 기성세대가 잘못 만들어놓은 세상 때문에 꽃을 피우기도 전에 취업 지옥이라는 덫에 포획된 이삼십대 청춘을 극 중 꼬스챠와 니나로 유비해서 바라볼 수도 있게 만드는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