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꽃은 떨어지고, 그 열매는...
민주화의 꽃은 떨어지고, 그 열매는...
  • 양문석 기자
  • 승인 2009.08.25 22: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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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전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25일 서울 국립현충원 대통령 묘역에 영면

18일 오전 9시경,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의료진은 혈압상승제 등을 이용해 집중 치료했으나 결국 오후 1시 43분 숨을 거뒀다.

김 전 대통령은 병세가 잠깐 호전되기도 했으나 이날 다시 악화된 상태에서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사인은 폐렴 악화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증과 이로 인한 다발성 장기부전증의 합병증으로 알려졌다.

이어 지난 23일, 전직 대통령에 대한 첫 국장으로 치러졌던 영결식은 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됐다. 역대로는 지난 1979년 현직 대통령이었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 이후 처음인데, 지난 5월 서거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또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삼우제(三虞祭)가 지난 25일 오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대통령 묘역에서 거행됐다. 이희호 여사와 세 아들 내외를 비롯한 유가족과 비서진, 김대중 정부 당시 각료, 민주당 전․현직 의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이 생전에 다니던 마포구 서교동 성당 윤일선 주임신부의 주관하에 천주교 의식으로 치러졌다. 유족 측은 평소 김 전 대통령이 검소함을 강조한 만큼 49재는 치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23일 63세의 나이로 서거한 지 87일만이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이희호 여사(87)와 장남 김홍일(61) 전 의원, 차남 김홍업(59)씨와 3남 김홍걸(46)씨가 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 운구행렬

한편 김 전 대통령의 꿈이자 우리 민족의 소원인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한 노력도 경주해야한다.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지난 2000년 6ㆍ15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지속적인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간 긴장 완화를 유지하며 다양한 교류협력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초석을 닦은 남북화해 정책은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었으나 그의 서거로 북한에서 조문단을 파견하는 등 육로 통행 및 개성공단 등 체류 제한 조치 해제 등을 전격 밝히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사후에도 남북관계 전환의 계기를 만든 셈이다.

어렵게 트인 남북관계의 물꼬인 만큼, 이를 잘 살려 남북의 평화적인 관계개선과 함께 미래 통일의 발판을 마련해야할 것이다.

이외에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반세기 가까이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3김(金)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평가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함께 3김 중 한 명이자, 정계 은퇴 후에도 유일하게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

1960년대 이후 3김은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하며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냉혹한 정치현실을 온몸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이들은 때로는 동지로서 손을 맞잡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극한 대립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애증(愛憎)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평가다.

결정적으로,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그토록 핍박했던 독재자와 군사 지도자들을 취임한 후 용서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서 풀어줬다. 그의 신앙은 그를 인내와 화해, 그리고 용서라는 삶을 살게 하면서 이 나라를 국가부도에서 구하고 민주주의를 뿌리내리도록 도와준 등불이었다.

"국민들이 내 편이기 때문에 나는 결코 두렵지 않다"며 군사정권하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민주화의 희망을 놓지 않았던 김 전 대통령은 이제 파란만장했던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이제 한국 민주화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서울문화투데이 양문석 기자 msy@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