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 (5)
물소리 (5)
  • 김준일 작가
  • 승인 2009.08.2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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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소장이라는 사내는 뻔한 허풍을 떨었다. 하지만 정구와 미순에게는 입주가 끝나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정말 3백만 원만 내고 이사를 올 수 있는지 오로지 그것이 문제였다.

내일 당장 이삿짐 때려 싣고 오세요. 일단 이사를 해 놓으면 뭔가 해결책이 나오지 않겠어요?

그러고 보니 관리소장도 정구네만큼이나 사정이 급한 것 같았다. 그는 돈 얘기는 꺼내지도 않은 채 서둘러 모델하우스 겸 분양사무실로 쓰고 있는 주택 내부를 구경시켰다.

분양면적은 17평으로 돼 있지만 이것 저것 빼고 나면 15평이 될까 말까한 옹색한 규모였다. 그러나 방이 두 개에다 샤워꼭지가 달려 있는 화장실과 베란다, 보일러실까지 필요한 것은 올망졸망 다 들어가 있었다.

거기에다 놀랍게도 허드레짐같은 것들을 쌓아 둘 수 있는 지하실까지 한 칸씩 차례가 돌아왔다. 어두컴컴한 지하층에서 주인집 눈치를 보며 살던 월세집에 비하면 그야말로 호텔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우리한테 나가라 마라 소리를 못하게 됐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미순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정구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우리가 잔금을 갚지 못하면 언제든지 나가 달라고 할걸?

그래도 미순은 기가 죽지 않았다.

내일은 내일의 바람이 분다는 말 몰라요?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이사 먼저 해 놓고 보는 거예요.

도무지 실감이 안 나는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정구네의 새 보금자리는 맨 꼭대기 층인 408호로 결정되었다. 수동씨는 2층이 좋겠다고 했지만 미순은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꼭대기 층에 살면 옥상에다 장독대도 올리고 빨래도 맘대로 널 수 있어요. 또 4층까지 걸어 다니다 보면 아버님 건강에도 좋을 거구요.

이제 미순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거의 흥분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이사를 하는 날에는 하루 종일 질금질금 비가 내리는 바람에 조금은 기가 죽는 것 같았다.

이건 하늘에서 우리 앞날을 축복하기 위해 내려 주는 단비예요 단비.

말로는 그렇게 둘러 댔지만 신발바닥에 들어붙는 진흙덩이를 떼어 낼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시멘트 몇 포대만 더 쓰면 되는 걸 가지고 이런 날림공사가 어디 있어? 서방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말 나오게 생겼네.

미순을 짜증나게 하는 것은 그것 말고도 또 있었다.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석유보일러가 작동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관리소장이 달려와 뚝닥거린 끝에 어떻게 더운 물이 돌게는 만들었지만 한겨울에 그런 일이 또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순을 슬프게 한 것은 수동씨였다.

여기가 우리집 맞나?

그것이 이삿짐 정리가 다 끝나고 어두워진 다음에 나타난 수동씨의 첫마디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오늘은 해도 너무 하셨지?

그날 밤 잠 자리에 들었을 때 정구가 미순을 위로하기 위해 그 얘기를 꺼내자 미순이 얼른 말을 막았다.
됐어요. 우리가 뭐 하루이틀 겪어 본 일이에요?

정구는 말 대신 가만히 팔을 뻗어 미순을 안아 주었다. 다른 때 같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폭삭 품을 파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순은 너무 피곤했던 모양이다. 하품을 하면서 간신히 한 마디를 하고는 그냥 잠에 떨어졌다.

잔금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파출부를 해서라도 갚을 테니까요.

(다음 호에 계속)

김준일 작가/ TV드라마 '수사반장', '형사' 등, 장편소설 '예언의 날', '무지개는 무지개' 등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