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랭피아'와 '더러운 잠', 19세기 프랑스와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리석음
'올랭피아'와 '더러운 잠', 19세기 프랑스와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리석음
  • 임동현 기자
  • 승인 2017.02.07 0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독' '여혐'으로 누드화 매도 , 보수적 시선 거두지 않고는 '표현의 자유' 존재 못해

이구영 작가의 패러디 그림 ‘더러운 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모독했다면서 보수단체 회원이 그림을 훼손하고 이를 본 예술인들은 ‘표현의 자유 제한’이라고 크게 반발했다. 국회 전시회를 추진한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새누리당은 물론 몇몇 여성단체들의 표적이 됐고 이로 인해 ‘여혐’ 논란까지 불거졌다.

급기야 보수단체들은 표 의원은 물론 아내와 딸의 누드 그림을 퍼뜨리며 공격하고 있고 민주당은 표 의원에게 당직 6개월 정지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민족미술협회 등은 성명서를 통해 민주당의 징계 정지와 새누리당의 사과, 훼손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 이구영의 '더러운 잠'

정치권과 예술인, 여성계의 반응을 보면 ‘더러운 잠’ 논란이 대한민국을 뒤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막상 이를 지켜보는 일반인들의 모습은 크게 동요되지 않고 있다. 개인적인 호불호는 표시하지만 이렇게 흥분(?)하지는 않고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할까?

지금의 상황과 꼭 닮은 '올랭피아' 논란

시간을 되돌려 19세기 프랑스 파리로 한 번 가보자.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이 미술관에 걸리자 파리는 발칵 뒤집혔다. ‘올랭피아’. 바로 ‘더러운 잠’의 원전이다.

마네는 앞서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나체의 여인을 등장시켰고 그림을 본 이들은 이 그림을 ‘외설, 퇴폐’라고 비난했다. 그 이후 그가 여성의 누드를 그린 '올랭피아‘를 내놓자 비난은 다시 거세졌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참고한 것이라고 하는데 '올랭피아'라는 제목이 당시 파리 매춘부들 사이에 인기 있는 예명인 '올랭프'를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 그림의 주인공이 매춘부라는 인식이 생겼다. 

▲ 마네의 '올랭피아'

현실적인 그림은 '노골적인 성적 암시'라는 해석을 낳았고 '여신도, 비너스도 아닌 매춘부의 누드라니!'라고 생각한 관객들과 비평가들은 이 그림을 깎아내리기에 바빴다. 결국 온갖 비난에 시달린 마네는 프랑스를 떠나 스페인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이 당시 파리 인구 분포를 보면 인구 170만명 중 약 12만명이 매춘부였다고 한다. 즉, 생계를 위해 매춘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며 특히 고위층들을 상대하는 매춘부들이 많았던 시기였다.

보수적인 관객들은 '올랭피아'를 비난하며 도덕성을 강조했지만 그들 역시 '올랭피아'와 밤을 보내길 원하는 사람들이었고 이를 감추기 위해 '올랭피아'에 폭격을 가한 것이다. 결국 '올랭피아'를 옹호했던 시인 보들레르는 '민주주의와 부르주아의 어리석음'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이 그림은 이후에도 종종 정치인을 풍자하는 패러디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  2004년에는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누드로 표현됐고, 2012년에는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의 누드로 등장했다.

온 나라가 벌집이 됐을까? 전혀. 당사자들은 이 그림을 웃음으로 넘겼다. 물론 불쾌함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예술인들의 표현을 문제삼는 것은 민주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컸을 것이다.

▲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를 풍자한 '올랭피아' 패러디

이구영의 ‘더러운 잠’은 사실 새로운 작품이 아니다. 물론 세월호가 가라앉는 순간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잠만 자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여러 번 사용된 방법이었기 때문에 기발한 패러디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헌데 이 그림은 왜 유독 한국에서만 시끄러울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왜 19세기 파리의 모습이 재현되고 있을까? 

일반인들도 물론 이 그림에 대해 호불호를 이야기하고 있다. ‘거 참 기발하네’하며 낄낄대기도 하고 ‘그래도 대통령인데 남사스럽게...’하며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일반인들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다. 즉,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 선에서 끝낼 뿐,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는다.

논란을 키운 쪽은 정치권과 여성계, 그리고 언론이었다. 정치권은 ‘대통령 모독’, 여성계는 ‘여성 혐오’, 그리고 언론은 균형을 맞추는 척하면서 논란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며 재미를 보고 있었다. 당연히 예술인들은 이들의 비난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자유로운 표현을 이상한 방식으로 해석하며 ‘표현의 자유’를 막으려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누드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논란이 됐을까?

여기서 질문, 만약 이 그림이 누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논란이 일었을까? 한 작가는 이 상황에 대해 “순수한 누드화조차 매도되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라고 밝혔다. 누드화가 이미 순수 예술 장르로 인정받은 상황임에도 여전히 편견은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여성 대통령의 누드’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여러 비난을 하지만 그렇다면 ‘비키니를 입은 뚱뚱한 여인’으로 메르켈 총리를 묘사한 독일이나 힐러리 클린턴의 알몸을 그린 미국은 모두 ‘여성 혐오국’으로 비난받아야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국 내에서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정치인은 ‘공공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 유럽 카니발 모습. 메르켈 독일 총리 등 정치인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나오지만 아무도, 심지어 당사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보수적인 시선에 갇혀있다. 이는 비단 '수구' 혹은 정치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국민들의 시선은 많이 바뀌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국민들은 비록 호불호가 갈린다해도 '풍자'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소위 사회를 이끈다는 이들이 여전히 보수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는 세상, 이를 마치 모든 국민의 갑론을박인양 부풀려서 보도하는 언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과연 '표현의 자유'가 존재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아무리 예술가들에게 표현의 자유를 준다해도 보수적인 시선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논란은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민주주의'의 모습이 아니다. 패러디를 패러디로 이해하지 못하고 풍자를 풍자로 이해하지 못하는 지금의 모습이 '문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그대로 보여준 것 같아 부끄러울 뿐이다.

'민주주의와 부르주아의 어리석음'이라는 보들레르의 결론은 지금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