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이 아직 살아있는 곳, 영주ㆍ안동을 찾아(1)
성리학이 아직 살아있는 곳, 영주ㆍ안동을 찾아(1)
  • 정승희(국립극장전문가교양강좌 수강생, 주부)
  • 승인 2009.09.10 1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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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전문가교양강좌생들의 대한민국 답사기

드디어 간다. 멀리는 실크로드에서부터 시작해서 진도를 찍고 안동으로 간다.

실크로드에서 안동? 조금은 의아하겠다.

이번 여행은 국립극장에서 6개월 과정으로 주말마다 운영하는 전문가교양강좌 커리큘럼의 한 과정으로 진행된 것이다.

원래는 실크로드로 9일 정도의 여행일정이 잡혀 있었으나 다들 나름대로 공사다망하신 분들이고 더구나 요사이 유행하는 ‘신종플루’도 그 길을 떠나는 데 발목을 잡았다.

우리 클래스는 논의 끝에 국내 답사라도 다녀오자는 데 의견을 모으고 추천지가 진도 등 여러 곳이 거론됐지만 낙점은 안동이 받았다.

지난 4일 우리는 많지 않은, 아주 적당한 13명의 인원이 마이크로버스로 영주와 안동 여행길에 올랐다.

조선 왕조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는 곳. 지금 우리의 생활과 관념을 조종하는 정신문화가 때로는 날 숨막히게 하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지지만 결국은 우리다움만이 더욱 우리를 돋보이게 해주는 것이 전통문화이더라.

사람들은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여행을 떠난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했어도 아직 서로에게 어색하다. 임의로워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복잡한 생각들로 꽉 찬 어른이기 때문이리라.

눈부신 햇살은 뜨거운데 시원한 바람불어 땀을 식혀주는 아름다운 여름의 끝자락이자 가을의 초입이다.

눈에는 아름다움, 머리에는 풍요로움, 가슴에는 우정을 담뿍 담아오리라. 자,  떠나보자. 

서울에서 첫 목적지인 영주까지는 대략 2시간을 쓰면 도착한단다. 생각보다 가깝다. 중부고속도로를 타다

▲선비촌에 들어서고 있는 일행들
영동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만종분기점에 점 찍고 또다시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영주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토끼의 등허리를 지탱해주는 넓게 솟아오른 소백산의 장관과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 화엄종의 대표 도량인 부석사가 있는 곳, 영주이다.

가서 보니 풍기인삼, 영주사과, 풍기인견, 영주한우 등 유명 산품들로 가득한 풍요로운 곳이다. 이 맛있는 것들과 시원한 인견, 조상의 희노애락이 느껴지는 고풍스럽고 품위 있게 남아 있는 한옥들이 고개를 돌리면 즐비한 곳에 왔다.

선비촌에 도착하니 마침 점심때인지라 배가 출출하다. 영주문화원에서 소개했다는 음식점에서 비빔밥, 된장찌개, 국밥, 그리고 여러가지 전들을 시켰다. 내 입맛이 고급인가? 맛이 없다. 첫 만남인데 아쉽다.

맛난 거 좋아하는 내게 역시 경상도 음식은 별로야 하고 다가온다. 다음엔 더 맛있게 해줘. 그래야 널 맛보고 싶다고 또 올 것 아니니?  일행 중 왕언니가 가져오신 고흥 유자막걸리향만이 내 입안을 감돈다.

▲선비촌 내  다도체험 가옥
우리나라 민속촌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그 고장에 있는 가옥이나 정원을 한곳에 모아 보여주는 전시형이 있고 , 자연부락 그대로를 잘 보존하고 가꿔놓은 자연부락형이 있는데, 영주의 선비촌은  그 후자란다.  지금은 민박집이나 부채나 염색제품 등을 소규모로 운영하는 공방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는데 ㄷ자형 가옥이 많이 눈에 띈다.  어떤 집은 심지어 소 마굿간이 사람 사는 방과 부엌이 있는 곳에 함께 있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 선조들은 열 사람 일꾼보다 더 요긴한 소를 아꼈음이라.

주변 모든 것들이 너무나 당연한 우리 세대에게 반성문을 쓰라고 숙제를 주는 듯하다.

우리 옛집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세어서 몇 칸 가옥으로 구분을 하는데, 새로운 사실 하나는 기둥과 기둥 사이가 다 제각각이어서 칸 수를 일률적으로 도량할 수가 없단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칸의 기준은 8자가 한 칸으로 쓰였단다.  한 자는 대략 30cm이다.

선비촌을 쭉 따라걸어가니 소수서원이 나온다.

이 동네는 뒤는 야트막한 산림이고 앞은 계곡물이 흘러가는 배산임수형의 아름다운 마을이다.

명당을 소개하는 책을 보면, 우리네 사람들은 배산임수 중에 제일 하급이 바다이고 , 그 다음이 강이며, 최고로 치는 것이 계곡물, 즉 개천이 휘감아도는 입지를 최고로 친다는데, 여기가 그런 것 같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백운동서원이라고도 한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 말의 유학지이며 최초의 성리학자인 회헌 안향 선생의 고장에  그분을 기리고자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데서 시작되었고,  그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군수 재임 시절 조정에 건의 <소수서원>이란 사액서원으로 되었다.  사액서원이란 임금님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고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이다.

그 시절에는 지방에 향교가 있고 서원이 있었는데  그 둘의 차이점은 향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란다. 즉 한자문화권의 정신적인 지주인 공자ㆍ맹자가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방 출신의 대학자가 모셔져 있으면 서원이라 했다. 중국에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규칙과 학칙을 모방해서 세워서 백운동서원이라 칭했다고 한다.

 ▲군수 주세붕선생이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붉은 글씨로 쓴 '敬'자가 지금까지도 선명히 남아있다.
서원을 빙 둘러싸고 있는 죽계천과 적송은 꽤나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죽계천의 끝이 피끝마을이었을 정도로 피비린내나는 단종복위 거사의 실패담이 있다. 

세조 3년 <정축지변>으로 희생당한 이들의 시신이 죽계천에 수장되면서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곡소리를 듣게 되어,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이 원혼들의 영혼을 달래며 경자 위에 붉은 칠을 하고 정성들여 제사를 지냈더니  그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