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뒤샹의 후회
[윤진섭의 비평프리즘] 뒤샹의 후회
  • 윤진섭 미술평론가
  • 승인 2019.02.1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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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진섭 미술평론가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은 창의력을 증폭시킨다. 예를 들어 포장 상자 하나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면 그것은 재활용 물품으로 분류돼 조만간 재생지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계적이거나 화학적인 변형일 뿐 창의적 변형이라 말할 수 없다. 창의적 변형은 거기에 예술적 영감과 실천이 더해질 때 이루어진다. 

마르셀 뒤샹을 비롯하여 쿠르트 쉬비터스,  한스 리히터 등등에 의한 숱한 다다적 실천은 이같은 재생미학의 진원지이다. 60년대 로버트 라우센버그에 의한 네오다다는 이의 계보를 이었지만 아쉽게도 상업주의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네오 다다에 대한 마르셀 뒤샹의 깊은 탄식은 다다가 지닌 미학적 도발과 전복성이 무너진 것에 대한 우려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라우센버그를 비롯한 재스퍼 존스, 올덴버그의 작품들이 세계 주요 콜렉터들의 필수 소장품 목록에 올라있고 옥션에서 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상황은 뒤샹의 이런 우려가 옳았음을 증명한다.

더욱 아이러니칼한 것은 마르셀 뒤샹 역시 그러한 운명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수적인 면에서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뒤샹의 작품 또한 세계의 주요 미술관과 콜렉션, 파운데이션에 소장돼 있기 때문이다. 필시 뒤샹은 미래에 자신이 처할 그런 운명을 생전에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이란 것도.

옛날의 서양 궁정시대건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현대사회건 간에 미술품은 상류층의 위신과 품위를 대변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좋은 품목으로 간주돼  왔다. 돌스타인 베블린의 말을 빌리면, '과시적 유한'인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이처럼 무소불위의 상위 1프로 유한계층의 과시적 소유욕을 만족시키는 다양한 제도와 기관들이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가령 미술관은 대중의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 욕구를 충족시키는 한편 미술교육을 통해 미적 능력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지만, 알게 모르게 부유층의 소장품 값을 올려주는 역기능을 하고 있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비엔날레를 비롯하여 아트페어, 옥션 등 대표적인 미술제도들 역시 결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을 둘러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더욱 공고화되며, 휴머니티라든지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휴지통 속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논의해야 하는 당위가 여기에 있다. 

오랜 숙성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소위 유한계층인 자본가 계급이 사회에 환원해야 할 도덕적 책무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고 이행해 온 서구 기업가들의 높은 도덕적 수준과는 달리, 한국은 아직도 천민자본주의의 천박한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한것 같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최근 몇년간 이 땅에서 벌어진 다양한 형태의  갑질 행위는 우리 사회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가지만 우리 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결핍과 만연된 성형미인의 붐 현상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깊은 연관이 있다. 이른바 인간미의 결핍이 그것이다.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소수의 1프로 상류층이나 자신의 몸이 귀한 줄 모르고 뜯어고치는 일부 여성들의 미를 향한 욕망은 다같이 몸을 도구로 생각하는 데서 온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종을 내 마음대로 다루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갑질자의 마음과 내 몸을 내가 고치는데 웬 상관이냐는 성형녀의 항변은 내용만 달랐지 그 의식의 저변을 살펴보면 결국 인간이나 몸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는 천민자본주의의 소산인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 넘쳐나는 수많은 사물들은 누군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며 변신의 꿈을 꾸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익히 알려진 표현을 빌면, '물질적 상상력'은 굳건한 이성과 논리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사물을 비롯한 우주가 새롭게 기지개를 켤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연된 기계문명의 지배로부터 물, 불, 공기, 흙과 같은 기본 원소로의 환원은 우리가 우리 존재의 토대에 대해 다시 성찰해야 할 당위를 이룬다. 

포탄이 작열하는 1차대전의 와중에서 다다이스트였던 한스 리히터는 대중을 가리켜 '천하 태평의 매미들'이라고 불렀다. 나는 어느 글에서 다다이스트들을 비롯한 전위주의자들을 가리켜 '연못 속의 메기들'로 지칭한 적이 있다. 미국의 미술평론가인 도널드 커스핏은 그들을 '양떼를 모는 목동'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 어느 것이건 인류가 처한 위기적 상황에 대한 깊은 우려를 담고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의 기능과 역할로는 여럿을 들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급진적 도전과 저항성이다. 예술적 진보와 도전, 저항의 정신이 사회적으로 번질 때 그것은 '정치적 아방가르드'로써 전복적 사회개혁에 이바지하게 된다. 

사회에서 아방가르드의 실종은 기존 가치의 영속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른바 틀에 박힌 것들의 용인과 무기력한 감정의 만연은 세상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게 되고 급기야는 비판의식의 결여와 함께 타성에 젖게 된다.

타성이 무서운 것은 될대로 되라는 식의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점이다. 공무원 사회에 만연한 복지부동이나 이윤만 남기면 된다는 식의 상업주의는 다같이 사회적 생기와 탄력을 잃게 하는 요인들이다. 

사회에서 미적교육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고의 형이상학적 가치로서의 미는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킨다. 예술은 철학과 함께 인간에 의한 부산물들이 아니라 인간의 본연적 가치들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해 왔다. 

사소한 것에 대한 질문은 거대한 것에 대한 질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사소한 사물들은 늘 우리의 주변에 있으며 우리와 함께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실존적 존재의 거소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들이 늘 그러하듯이, '그림을 시처럼(ut poesis pictura)' 그리고, 사물을 연금술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