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이용주 감독의 철학적 도발 ‘음악극 카르멘’
[공연리뷰]이용주 감독의 철학적 도발 ‘음악극 카르멘’
  • 남정숙 /문화기획자, 본지 편집기획위원
  • 승인 2019.04.16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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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숙 /문화기획자, 본지 편집기획위원

진즉에 음악극 카르멘의 감상평을 써달라는 이용주 연출과 박준석 배우님 요청이 있었으나 연극을 평론할만한 수준이 아닌지라 몇 차례 고사의 말씀을 드렸었다.

그런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그저 ‘이 카르멘은 그 카르멘과 다르다’고 일반인들에게 알려드리자는 문화예술 가이드의 역할은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니 언감생심 평론은 아니고 애호가의 리뷰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겠다.

이왕 쓸 것을 일찍 쓰기라도 했으면 관객모집에 도움이나 됐을 텐데 이제야 쓰게 되어서 죄송한 마음이 든다. 첫 공연은 처음 만난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께서 초청해 주셔서 함께 봤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날카롭고 정의로운 박준석 기자님이 배우로 연기하시는 모습을 처음 봐서 신기하기도 하고 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거니와 적과의 동침도 아니고 유인택 사장님이 옆에 계셔서 편하게 공연에 집중하지를 못했었다.

두 번째 공연을 보고서야 전체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에서야 글을 올리게 되었다. 이해 부탁드린다.

현재 정동세실극장에서 공연하는 카르멘은 음악극이다.
오페라, 뮤지컬, 음악극이 모두 음악이 중요하게 사용되지만 조금씩 다른 것이 오페라는 음악의 완성도가 보다 중요한 장르이고, 뮤지컬은 노래가 대사의 일부로 사용되어 배우들이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연기로 드라마를 끌고 나가게 된다. 오페라와 뮤지컬에서 노래와 춤이 진행되는 동안 드라마는 멈춰진다. 이는 노래와 춤이 연기의 일부이며 드라마에서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음악극에서는 노래와 춤이 없어도 드라마를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음악보다 드라마 자체가 중요하고 음악은 전체를 완성시키는 부수적인 요소가 된다. 그래서 오페라와 뮤지컬에서는 주인공들이 아리아나 2중창을 부르며 극을 고조시키고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게 되지만 ‘음악극 카르멘’에서는 주인공들은 아리아를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카르멘에서도 역시 음악과 음향은 희노애락을 표현하며 충분히 한 몫을 해내고 있다.

특히 작곡가 심연주는 카르멘의 대표곡 ‘하바네라’만 제외하고 모든 곡을 작곡하는 열정으로 이용주 연출의 카르멘이 전혀 다른 카르멘으로 자리메김하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그뿐만 아니라 카르멘의 공연에 매번 라이브로 연주를 하며, 심지어 간단한 연기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등 음악감독으로 적극적으로 드라마에 개입하고 있다.

나도 처음에는 카르멘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식상한 생각이 들었었다. 또 카르멘이야. 특히 이용주 연출이 제작한 지난번 카르멘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비슷할 줄 알았다. 그런데 햄릿이 수백 년 동안 무수한 햄릿을 제작하고 공연을 해도 다 다른 햄릿이듯이 카르멘도 다 같은 카르멘이 아니었다.

정동세실극장에서 공연중인 극단 벼랑끝날다의 음악극 '카르멘' (사진=극단 벼랑끝날다)

이용주 연출의 ‘음악극 카르멘’이 기존 카르멘과 확연히 다른 것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이 아닌 프랑스 낭만주의 작가 ‘프로스퍼 메리메(Prosper Merimee)의 원작소설 카르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일 것 같다. 그래서 오페라나 뮤지컬이 아니라 음악극으로 제작하게 된 것이리라.

나는 메리메의 원작소설 카르멘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에서 카르멘이 주인공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데 비해서 ‘음악극 카르멘’은 박준석 기자가 분한 죠반니가 3인 층 관찰자 시점이자 낭독자로서 주인공 카르멘과 돈호세는 물론 그녀의 남자들인 남편 가르시아와 제임스 등을 관찰하고, 차분한 목소리의 독백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 그리고 낭독을 통해 관객들을 낯설게 하고 마치 인간의 운명을 관장할 수는 없지만 관조하는 현자처럼 자신의 열정을 이성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돈호세의 파멸하는 삶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따라가게 만든다.

대형 오페라를 단지 수명의 배우들이 표현하면서 한 편의 연극을 만들어 낸 것은 순전히 재주 많고 헌신적인 배우들 덕분인 것 같다. 이용주 연출은 자신의 장기인 피지컬 씨어터를 훈련시켜서 배우들에게 마임, 무용, 서커스뿐만 아니라 탱고, 탭댄스, 현대무용 등을 극 전환의 적재적소에 사용하므로 극을 역동적으로 보이게끔 하면서 몸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배우들은 덤블링을 넘고, 스핀을 돌거나 슬랩스틱 코메디를 하다가 금세 국면을 전환해서 첼로, 만돌린, 바이얼린 등의 악기들을 서정적으로 연주한다. 퍼포먼스들은 전체적으로 합과 타이밍이 잘 맞아서 어색하지 않고 재미있다.

정동세실극장에서 공연중인 극단 벼랑끝날다의 음악극 '카르멘' (사진=극단 벼랑끝날다)

무대미술과 조명은 소극장에 과분할 정도로 투입된 듯 정교하고 아름답다. 무대미술가 박찬호, 조명디자인 문종태의 역량으로 소극장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고급스럽고 적확하다.

그런데 너무나 아쉬운 것은 세실극장이 노후화되어서 인지 음향이 아쉬웠다. 잔향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름다운 음악과 노래들이 충분히 객석에 전달되지 않아서 아쉬웠다. 음악극은 음악극에 맞는 극장에서 공연해야 하는데 그나마 서울연극협회의 대관료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저렴한 가격에 대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이게 어딘가?

그리고 연출가의 의도겠지만 음악극 카르멘의 여주인공 역시 아름답고 섹시하고 도도하기는 하지만 나는 여리여리한 카르멘보다는 뇌쇄적이고 치명적일 정도로 팜므파탈적이어서 기가 약한 남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매력의 소유자이자, 무대를 휘어잡고도 남는 카리스마 넘치는 카르멘 주인공을 기대하고 간 터라 그게 좀 아쉬웠다.

또한 타 오페라나 뮤지컬 등에서는 자유로운 영혼인 카르멘을 소유하지 못하고 파멸되어가는 낭만주의자인 돈호세의 스토리를 주 드라마로 했다면, 이번 이용주 연출은 낭만주의자 돈호세가 파멸해가는 과정을 운명처럼 그리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돈호세의 운명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오이디프스 왕’이나 섹스피어의 ‘햄릿’과 같이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듯 그리고 있다. 연출에서도 유사한 구조 및 기제를 보여주고 있는데 두건을 푹 눌러쓴 코러스를 사용하거나 콤모스라고 불리던 낭송을 사용한 것도 그리스 비극을 연상하게 한다. 마지막에 돈호세가 카르멘에게 “이제 나도 지쳤어, 나와 같이 갈 수 없겠니?“라고 말하자 카르멘과 카르멘을 둘러싼 두건을 눌러쓴 고대 승려들이 카르멘과 함께 ”싫어“라고 할 때는 영락없이 그리스 비극으로 느껴졌다.

정동세실극장에서 공연중인 극단 벼랑끝날다의 음악극 '카르멘' (사진=극단 벼랑끝날다)

그래서 이용주의 ‘음악극 카르멘’은 그리스 비극 같은 카르멘으로 느껴진다. 마치 이용주 연출은 카르멘을 통해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가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수레바퀴 아닐까?’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음악극을 사용하면서 천하의 오페라 카르멘을 그리스적 비극과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한 젊은 감독의 전복적 도전이 재미있었다.

제일 재밌는 건 박준석 기자다. 평소 냉철하고, 정의감이 넘치는 기자 모습만 보다가 천연덕스럽게 죠반니를 연기하다니, 그냥 원래 죠반니였던 것 같다. 연기가 아니라 그저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재미있으니 바쁜 기자생활을 하면서 더 고달픈 배우생활을 할 수 있겠지!

다 같이 이루어내는 음악극 카르멘을 2번 보고나서야 신인배우들의 열정과 헌신, 연출과 각 장르의 감독들과 그리고 죠반니와 같은 장년 기술자들의 노련함과 배려심들이 잘 버무려져서 하모니가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극단 ‘벼랑끝날다’의 ‘음악극 카르멘’은 하모니가 뛰어난 작품이다. 이 맛이지! 관객들이 공연예술에 기대하는 것은 완성도 높은 예술성이기도 하지만 공연자들 간, 무대와 관객 간의 화학작용에서 나오는 예술의 페르몬에 취하는 것이다. 서툴러도 괜찮고, 허술해도 괜찮다. 하나씩 완성해 가는 배우들과 연출가들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