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숙의 문화읽기]연극 ‘월화’에 구현된 문화론적 함의
[성기숙의 문화읽기]연극 ‘월화’에 구현된 문화론적 함의
  •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 승인 2020.07.1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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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무용평론가

“서울의 국립극단이 못했던 걸, 춘천의 강원도립극단이 해냈다”. 작년 강원도립극단(예술감독 김혁수)이 올린 연극 ‘월화, 달빛에 물들다’(이하 ‘월하’)에 대한 국악평론가 윤중강의 평이다. 전문가와 언론에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행운도 뒤따랐다. “2020년 연극의 해”를 기념하여 지난 6월 27~29일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재공연됐다. 강원도립극단의 연극 ‘월하’ 서울공연은 서울문화투데이와 공동주최로 열려 더욱 뜻 깊었다.

지방의 공공예술단체가 서울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공포의 바이러스 ‘코로나’ 상황이 아니던가? 유례가 없는 상황에서 유례가 없는 공연을 감행한 셈인데, 결과 또한 유례가 드문 성공적인 무대로 갈무리되었다. 

성공요인은 복합적이다. 2018 평창올림픽 개막식 총연출로 한층 명성을 높인 양정웅 총괄 디렉터의 입체적 시야, 그리고 이치민 연출의 시대를 관통하는 예리한 통찰력과 정교한 공간미학이 빛을 발했다. 근대가요를 테마로 한 ‘경성살롱’ 음반 발매로 존재감을 과시한 음악감독 이정표의 감각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배우들의 열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성공요인이다. 시대극에 걸맞은 각자의 캐릭터 해석이 돋보였다. 특히 통곡과 절규로서 혼신을 다한 월화 역의 문수아의 연기는 섬뜩한 전율을 안겨줬다.   

한국 근대연극사학의 권위자 유민영 교수는 이월화의 드라마틱한 일생에 대하여, “신파극과 정통 신극이 교차하던 시절에 추종불허의 여배우 자리를 지키기 위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극적인 죽음을 자초한 전설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나아가 근대극 100년의 연극 주역들 중에서 창작의 소재로 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이월화를 꼽았다. 

한국연극 10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이월화가 창작극으로 다뤄졌음은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월화는 1920년대 식민통치하에서 일제의 폭압과 남성지향적인 가부장적 시대현실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시대와 맞섰던 인물이다. 연극 ‘월화’의 작가 한민규는 이월화를 ‘변혁과 혼돈의 시기에 피어난 혁명의 꽃’이라 정의했다. 충분히 공감가는 해석이다. 

한국공연예술사에서 ‘최초’라는 수식은 단지 ‘처음’ 혹은 ‘새롭다’라는 의미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100여년 전 실존했던 조선 최초의 여배우 이월화를 소재로 한 연극 ‘월화’는 인접 전공자의 입장에서도 무척 흥미로웠다. 공연을 보면서 그 누구보다 ‘최초’라는 수식어와 잘 어울리는 두 명의 근대 무용인물을 떠올렸다. 세계적 무용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조택원·최승희가 연상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작품 속으로 한 발 더 깊이 내딛으면 토월회(土月會)와 매개된 조택원의 행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알다시피 1923년 창단된 토월회는 박승희를 비롯 동경유학파 젊은이들이 만든 신극단체다. 토월회의 등장은 신파극에 머물던 기성 연극계에 경종을 울렸다. 토월회 제3회 공연 ‘사랑과 죽음’ 막간에 무용가 조택원이 출연하여 코박춤을 추었다. 그는 타고난 신체와 천부적 재능으로 슬라브풍의 경쾌하고 역동적인 춤사위로 관객의 심미안을 자극했다.  

박승희 작(作)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은 연극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무용사에서도 유의미한 작품이다. 바로 신무용가 조택원의 데뷔무대였기 때문이다. 조택원은 일찍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박세면에게 코박춤을 배웠다. 박세면은 작곡가 홍난파의 사촌인 바이올리스트 홍재유 등과 함께 토월회 음악부 멤버로 활동했다. 조택원은 스승 박세면의 소개로 토월회 무대에 출연하는 행운을 얻는다. 조택원이 관객을 대상으로 입장료를 받고 춤춘 최초의 공연이었다.

조택원이 ‘모던 보이’라면, 최승희는 ‘모던 걸’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최승희 역시 무용뿐만 아니라 광고모델, 영화배우 나아가 대중가수로 음반을 취입하는 등 활동의 지평을 넓혔다. 근대 여배우를 다룬 연극 ‘월화’에서 모던 걸 최승희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음악감독 이정표는 이 작품에서 근대를 연상케하는 대중가요를 삽입했다. ‘이 풍진 세월’을 비롯 ‘화류춘몽’, ‘이태리의 정원’, ‘황성옛터’ 등 여덟 곡을 선곡하여 배경에 깔았다. 시대를 담은 노랫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애수띤 음색이 심금을 울린다. 극중 이월화와 박승희가 심적 교감을 이루는 1막 마지막에 울려 퍼진 ‘이태리의 정원’은 특별히 가슴에 와 닿는다. 음반 ‘이태리의 정원’에 투영된 무용가 최승희의 육성이 지닌 희소성도 없지 않을 게다.      

원래 성악가가 꿈이었던 최승희는 1936년 ‘이태리의 정원’ 음반을 출시한다. 이하윤 작사로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제작했다. 터번 모양의 모자를 쓰고 양장차림을 한 최승희가 세련된 모던풍의 포즈로 음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당시 대부분의 대중가요에서 포착되는 일본 신민요 선율과 달리 재즈풍이라는 점도 흥미를 더한다. 

재즈는 1920년대 근대 도시문명에 침윤된 경성의 젊은이들의 예술취미를 대변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이태리의 정원’은 제목부터 이국적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근대의 아이콘 최승희의 슬픈 정조의 목소리는 묘한 흡입력을 지녔다. 노랫말은 더욱 예사롭지 않다. “맑은 하늘에 새가 울면/ 사랑의 노랠 부르면서/ 산 넘고 물을 건너/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세요”.

특히 마지막 구절 “님 오길 기다리는, 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세요”는 적극적인 청유형 표현으로 가부장적 관념이 지배하던 당대 완고한 정서에서 보자면 매우 파격적 발상으로 읽힌다. 시대를 관통하는 파격! 이것이 신극(新劇), 신무용(新舞踊)의 예술미학적 요체가 아니던가? 

연극 ‘월화’는 극장예술로서의 한국공연예술의 기원을 반추케 한다는 점에서 의의 있다. 서구적 공연미학으로 ‘근대성’ 구현에 앞장섰던 공연예술 선구자들의 치열한 예술혼과 그 존재성을 새삼 일깨웠다. 더욱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강타한 상황에서 거의 모든 국립예술단체의 공연이 멈춘 가운데 강원도립극단의 서울 원정무대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아르코예술극장에 오른 연극 ‘월화’는 “서울의 국립극단이 못했던 걸, 춘천의 강원도립극단이 해냈다”는 평이 올해도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한 값진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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