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 존 버거가 1995년 발표한 소설 『결혼식 가는 길(To the Wedding)』이 새롭게 번역 출간됐다. 그는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은 ‘사람들을 에워싼 게토에서 그 사람들을 내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 소설은 에이치아이브이(HIV)에 감염된 젊은 여인이 사람들의 혐오와 스스로의 절망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오게 되는지를 독특한 화법으로 그린다.
작품은 냉전이 끝나고 정치적 긴장감이 완화된 1993년쯤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유럽대륙 양쪽에서 각기 국경을 넘어 목적지로 향하는 ‘장 페레로’와 ‘즈데나’가 여행길에서 만나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세기말의 암울한 현실을 드러낸다.
프랑스 쪽 알프스 산맥 모단에서 철도 신호원으로 일하는 장 페레로는 이십여 년 전 즈데나와 결혼해 딸 니농을 낳았다. 프라하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즈데나는 ‘프라하의 봄’ 이듬해인 1969년 파리로 망명했고, 그르노블의 이민자 모임에서 장을 만났다. 니농이 여섯 살 되던 해 프라하 시민들이 인권과 시민권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으로 떠나 결국 돌아오지 않는다.
성인이 되어 이탈리아 모데나로 거처를 옮긴 니농은 베로나에서 지노라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입술에 난 상처가 아물지 않아 찾아간 병원에서 에이즈라는 선고를 받고, 몇 해 전 하룻밤을 보낸 남자에게 옮은 것임을 직감한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알리고 지노와의 만남을 거부하지만, 그는 곁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청혼을 한다.
장은 모단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즈데나는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서 버스를 타고 딸의 결혼식이 열리는 베네치아 남쪽 시골 마을 고리노로의 긴 여정에 오른다. 그 여행길은 우연한 만남과 대화, 깊은 연민과 눈물로 채워진다. 그들과 모든 순간을 함께하는 눈먼 타마 장수는 ‘결혼식 가는 길’의 종착지에서 슬프지만 행복한 사람들의 축제를 밤새 지켜본다.
줄거리는 제목 그대로 단순하지만 존 버거 특유의 화법이 그렇듯, 이야기는 시간 순으로 흐르지 않는다. 화자인 타마 장수의 시선으로 등장인물들(주로 장, 즈데나, 지노)의 과거와 현재가 불규칙하게 나열되고, 중간중간 니농의 목소리가 일인칭으로 들려오기도 한다. 또 보통 소설이 결말을 나중에 보여주는 것과 달리 시작부터 니농의 불운을 드러내고, 거창한 서사도 인물의 복잡한 심리 묘사도 없다.
이 책의 편집자는 “이 소설의 배경인 1990년대는 에이즈 치료제가 지금처럼 개발되지 않았기에, 병의 진전 속도나 증상이 심각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등장인물들의 반응과 공포 역시 마찬가지”라고 설명하며 “이제는 약을 복용하면 만성질환 정도로 관리가 가능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전염되지 않는다고 의학적으로도 밝혀졌으나 일반인들의 인식은 삼십 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병에 대한 오래된 선입견과 막연한 두려움으로 환자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라고 밝혔다.
『결혼식 가는 길(To the Wedding)』의 저자 존 버거(John Peter Berger, John Berger)는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터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처음 미술평론으로 시작해 점차 관심과 활동 영역을 넓혀 예술과 인문, 사회 전반에 걸쳐 깊고 명쾌한 관점을 제시했다. 중년 이후 프랑스 동부의 알프스 산록에 위치한 시골 농촌 마을로 옮겨 가 살면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농사일과 글쓰기를 함께했다.
저서로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예술과 혁명』, 『다른 방식으로 보기』, 『본다는 것의 의미』, 『말하기의 다른 방법』, 『센스 오브 사이트』,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모든것을 소중히하라』, 『백내장』, 『벤투의 스케치북』, 『아내의 빈 방』, 『사진의 이해』, 『스모크』,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초상들』, 『풍경들』, 등이 있고, 소설로 『우리 시대의 화가』,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G』, 『A가 X에게,』 『킹』, 삼부작 ‘그들의 노동에’ 『끈질긴 땅』, 『한때 유로파에서』, 『라일락과 깃발』이 있다.
정가 15,000원, 열화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