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엄마와 페미니즘
[영화학도를 꿈꾸는 청춘, 인문학 파먹기] 엄마와 페미니즘
  • 윤영채
  • 승인 2021.04.02 1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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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윤영채(2000년생), 몇 가지 일을 하며 글로 꿈을 써 내려가는 중이다. 류이치 사카모토와 히사이시 조의 음악, 요리 문학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사랑한다. ‘멀리 갈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도전과 실패, 상처로부터 단단해지는 것들과 친해 보려고 한다. 애완 묘 ‘깨미’와 같은 방을 쓰고 있다.

패륜을 고백한다. 카페를 운영하는 엄마는 새벽 530분이 되면 기상을 한다. 부엌으로 가 가스를 켜고 요리를 시작한다. 7시에 아빠를 깨워 밥을 먹이고 와이셔츠를 다려서 출근을 시킨다. 그제야 그녀는 간신히 밥 한 숟갈을 뜨고서는 만원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한다. 낮에는 커피를, 밤에는 와인을 파는 형식의 가게는 언제나 막차가 끊기기 직전에야 마감할 수 있다. 마스크와 땀, 화장과 피곤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서 돌아온 엄마는 말이 없다. 손님들에게 다 나눠준 웃음기는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가장 먼저 건넨 말은, ‘수고했어도 아닌, ‘오늘 매출 얼마야?’였다. 입을 꾹 닫은 그녀를 보면서 생각한다. ‘가엾다. 그러나 이게 현실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게 능력이라도 있던가.’

뼈가 시리고 인대가 늘어나도 병원 한 번 가지 않고 밤마다 시름시름 앓는 엄마의 손을 잡아 드린 게 언제인지. 팅팅 부은 다리를 주물러 드린 일은 기억조차 희미하다. 고생하고 온 그녀에게 고생 많았지?’라는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엄마는 마치 당연한 듯 이 많은 일을 홀로 감당하고 있는데, 그걸 나는 알아주지 못했다. 14시간에 육박하는 강도 높은 노동, 쉼터가 되어야 할 집에서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빨래를 하는 엄마. 그 사이 눈가엔 많은 주름이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엄마 아빠 그리고 나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이 불평등한 구조를 바꾸자거나, 집안일을 나눠서 하자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의 기득권자인 아빠와 나는 이 편한 세상을 포기할 용기가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열일곱의 나이에 처음 페미니즘을 접했었다.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인해 여성 인권과 페미니즘이 한참 논쟁거리였다. 그 당시 나는 친구 몇몇과 독서토론 모임을 운영하고 있었다. 남성에게 똑같이 복수해야 한다는 어리석은 말을 내뱉은 나에게, 한 친구가 가했던 일침이 떠오른다. ‘그러면 증오는 끝나지 않아. 너의 말은 너무 어리석어.’ 자존심이 구겨졌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배운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을 위한 학문이 아니었다. 여성과 남성, 흑인과 백인, 동양인과 서양인, 비장애인과 장애인 그리고 성 소수자와 그 밖 사람들의 얘기다.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주류와 비주류 그리고 다수와 소수의 경계는 언제나 부서지고 다시 세워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득권을 누리다가도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많은 사회적 위치와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기 위해서 타자의 목소리를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작가 정희진은 말한다. 그 친구는 열일곱의 어린 나이에 이미 페미니즘의 본질을 일부분 깨달았던 모양이다.

그렇다. 나라는 정체성은 본질이 아니다. 내가 있기 이전에 세상이 있었고, 그 위에서 태어난 이상 는 결국 무수한 관계 속에 형성된다. 누군가에게는 연인, 부모님에게는 막내딸, 또 타인에게는 한낱 비루한 아르바이트생이자 사수생에 불과할 것이다. ‘를 알기 위해 을 이해하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맹자가 덕에 의한 정치, 타인의 불행에 공감할 수 있는 마음(王道政治, 惻隱之心)을 주장한 이유도 어쩌면, 남을 아는 것이 곧 나를 이해하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정의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된다. 엄마와 나를 여성’, 아빠를 남성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바라보는 일이다. 이성애자와 동성애자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냐를 따질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다. 모두를 빛나는 별로 바라보면 복잡한 이해관계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다. 가득했던 증오로부터 편안해질 수 있다. 고유의 향기와 정체성 그리고 사회에서 만들어진 개개인의 역할로 바라봐주는 시선이 필요하다.

다시 돌아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굳이 나눠보자면 우리는 모두 비장애인이며 서울에 사는 나름의 기득권자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엄마와 나는 여성이다. 그리하여 50대인 아빠가 이끄는 가부장적인 가정에서는 언제나 약자다. 연령주의 관점에서도 엄마는 두 살 위인 아빠에겐 영원한 약자이다. 이렇듯 우리 가족만 봐도 무수히 많은 사회적 관계로 얽혀있다. 이해가 필요하다. 엄마를 엄마가 아닌, 꿈 많고 쇼핑을 좋아하며 가끔은 다혈질적으로 구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로 인정해야 한다. 아빠를 아빠도 기득권자도 아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향기를 지닌, 수면 위의 달빛 같은 사람으로 바라보려 한다. 나를 무엇이라 정의하지 않고, 봄볕 같은 사람으로 느껴보는 것이다.

누군가는 용기를 내야 한다. 지금의 편안함을 여전히 잃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엄마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살아간다면 훗날 부모가 된 나는 얼마나 비참할지 상상도 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녀가 하루라도 자신답게 살 수 있도록 엄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녀의 삶이 주체적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 홀로 짊어진 부조리한 이 관습을 격파할 용기를 내는 것, 기득권자인 아빠에게 이 모든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각자 조금씩 용기를 모으는 것, 이것이 지금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작고도 큰 페미니즘이다.

거대한 달이 운하의 물길을 헤쳤듯 그렇게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은 극단적인 여성 인권 운동도 아니고, 남성 혐오도 아닌 타인과 자신에 대한 이해로 가득한 따뜻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엄마라는 역할 명칭이 아닌 그녀의 이름을 불러야겠다. 모두가 피곤한 저녁, 각자의 안부를 물어야겠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각자의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는지를 물어보자. 그렇게 에서 그리고 우리로 넓혀가는 세상이 펼쳐지길 바란다.

 

추신: 언제나 나보다 성숙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던 친구 소연이에게. 넌 내가 아는 가장 멋있는 페미니스트였어. 어디선가 눈부시게 반짝이는 사람으로 살고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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