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현대무용단의 '빨래'와 조재혁의 '현 一'
[이근수의 무용평론]국립현대무용단의 '빨래'와 조재혁의 '현 一'
  •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 승인 2021.04.1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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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이근수 무용평론가/ 경희대 명예교수

국립현대무용단의 <빨래>(2021. 3.19~21, 자유소극장)는 남정호의 1993년 초연 작품의 2021년 리메이크 판이다. 그녀가 한예종 교수로 있던 시절, 재학생들을 주축으로 공연했던 이 작품을 보았다. 젊은이들의 상큼한 정서와 서정미가 돋보였던 그 때의 무대에 미얄할미 캐릭터가 추가된 75분 작품이다.

무료해지는 오후 한나절 혹은 어스름히 해지는 시간일까, 적막을 뚫고 어디선가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가 울려온다. 빨래광주리를 머리에 인 여인들이 하나 둘 개울가로 모여든다. 프랑스와 미국 등 해외에서 다양한 춤 경험을 축적한 구은혜와 홍지현, 국내에서 무용가, 안무가 혹은 교육자로 활동해온 이소영, 박유라, 정서윤의 다섯 무용수가 공동주역이다.

2층과 3층에 ‘ㄷ’자로 만들어진 객석에서 무대를 내려다보게 했다. 1층 객석이 있던 자리까지 무대를 확장하고 반대쪽에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을 만들었다. 경사를 따라 흐르는 물가에 주저앉아 여인들은 빨랫감을 북처럼 두드리고 방아 찧듯 발로 비비면서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웃고 떠들고 귓속말을 나누며 빨래를 헹구어 물기를 짜내고 긴 빨랫감의 양 끝을 마주 잡아 장대에 널어놓는다. 빨래는 노동이지만 한 편으로 운동이고 놀이가 되기도 한다. 빨랫감을 깨끗이 하는 행위라는 면에서 몸을 씻는 목욕과도 통하고 서로 간에 정보를 교환하고 각자가 묻어두었던 비밀을 털어놓는다는 점에서는 힐링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

원작에 추가하여 이 작품엔 미얄할미가 객원으로 출연한다. 미얄할미는 봉산탈춤이나 송파산대놀이 등에 등장하는 탈춤의 단골캐릭터다. 강령탈춤이수자인 박인선이 이 배역을 맡아 열연한다. 조강지처로서 소박맞은 슬픔, 떠나간 남편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한없는 외로움, 급기야는 남편을 찾아 길을 나서는 다부진 마음이 판소리가 되어 구성지게 펼쳐진다. 이 사설이 빨래터 여인들과 소통하는 접점이 된다. 여인들은 입고 있던 얇은 옷을 한 겹 두 겹 벗어놓고 깨끗이 세탁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여 있던 때 묻은 감정을 씻어내고 치유된 마음으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배경에 흐르는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미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잔잔한 여운을 남겨준다.

<빨래>를 통해서 남정호가 보여주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여인들이 봉착하는 외로움과 기다림,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소통이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한국현대춤협회가 주최하는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3.27~4.4, 아르코대극장)이 올해 35회를 맞았다. 나는 차진엽, 조재혁, 손관중, 제임스전이 출연한 첫 날 공연을 보았다. 2015년 초연 시 대한민국무용대상 솔로 앤 듀엣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조재혁의 <현 一>이 내게는 의미 있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무대 한 쪽에 찻상을 마주하고 앉은 두 남자가 보인다. 찻상 위에는 다관(茶罐)과 찻잔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 남자가 다관을 높이 들어 올려 찻물을 따른다. 찻물이 수직으로 떨어지며 찻잔을 채운다. 차를 마신 그들이 편한 자세를 취하며 눕는다. 찻상 옆에 아쟁이 놓여있다. 국립국악원 수석연주자인 윤겸이 현(弦)을 들어 올려 아쟁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음악에 맞춰 무대 가운데선 춤사위가 펼쳐진다.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려 공중에 평행선을 만들고 몸통을 아래위로 흔드는 손짓과 발짓이 연주되는 음악을, 보이는 음악으로 만들어준다.

제목은 한자가 아닌 한글의 ‘현’이고 그 옆에 한 일(一)자가 붙어있다. 한글의 ‘현’은 많은 의미를 표현한다. 아쟁을 튕기는 줄을 뜻하는 현(絃)외에도 그윽하다는 뜻을 가진 검을 현(玄), 상현달과 하현달처럼 구부러진 곡선을 뜻하는 현(弦), 과거나 미래와 구분되는 현재시점을 나타내는 현(現)… 등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라는 메시지가 <현 一>이란 제목으로 구현된다. 국악기의 음률에 맞춰 무용가의 춤은 계속된다. 아쟁 외에도 무대 뒤편에선 장구를 치고 꽹과리를 두드린다.

춤사위는 농악에 맞춰 밭가는 농부들의 쟁기질을 보여주기도 한다. 차(茶)가 주는 힘, 찻자리에서 비롯된 그윽한 정취는 글자의 경계를 넘어 세상을 하나로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소리와 몸짓이 하나라는 안무가의 바람을 노래한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차의 세계에 푸욱 빠져드는 느낌을 준 정숙한 25분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