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충무로야사] -60년대 충무로 명소들-
[연재 충무로야사] -60년대 충무로 명소들-
  •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 승인 2009.12.23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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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지금은 철거된 스카라 극장
60년대 영화계 뒷이야기를 늘어놓자면 충무로2가에서 5가, 퇴계로2가에서 5가까지 산재해 있었거나 밀집해있던 명소들을 되살펴보는것도 자못 흥미로울 것이다.

50년대와 60년대 명동야화를 이야기하자면 소위 명동백작들이 드나들던 은성주점이나 당시 내로라하는 문단 예술계 인사들이 즐겨찾던 동방쌀롱과 목동다방, 돌체음악감상실 등을 거명할 수 밖에 없듯이...

이제는 옛 대원호텔자리 건너편 빌딩2층에 나산커피숍, 얼마전에 헐려버린 스카라극장 위쪽에 있는 진고개식당, 그 건너편 길목에 황소집, 숫한 스타들이 드나들던 스타다방 아래쪽에 자리한 사랑방칼국수집 정도만 남아있을 뿐 인쇄소와 촬영기재상들만 즐비하다.

그 옛날 한국영화메카였던 충무로3가 명소들은 시대변화에 따라 이제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 숫한 충무로 명소 중에 영화인들의 뇌리에 가장 오래 기억되는 곳은 아무래도 청맥다방일 것이다.

그 곳엔 주로 영화제작자, 영화배급업자, 지방흥행사, 당좌수표나 약속어음을 할인해주는 속칭 와리깡 아줌마들이 포진하고 있었기에 영화계 전 스태프와 관계자들이 언제나 무슨 시장처럼 북적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영화제작은 모두 지방흥행사들의 입도선매식 필름 매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다방의 주인마담은 언제나 다방 한가운데 떡 버티고 앉아있던 왕년의 전설적인 명동파 주먹보스였다가 영화제작자로 변신한 이화룡씨 다음으로 명물이었다. 그녀는 작달만한 키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 타입의 중년부인이었는데 매우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암기력의 소유자였다.

수없이 드나드는 영화인들은 물론 하다못해 구두닦이나 심부름꾼 소년까지도 하루에 몇 번, 몇시몇분에 왔다갔다는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그사람을 찾는 손님에게 친절하고 정확하게 전달해 주었다. 그러니 당연히 성업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업소에 드나드는 고객들의 신분이나 이름, 전화번호까지 훤히 꿰고 있었다.

다방 앞에는 언제나 수많은 영화인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홀 안에는 앉을자리가 없어서 한 사람이 볼일을 마치고 나오면 한 사람이 입장하는 식이기도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지방흥행사들로부터 당좌수표나 약속어음을 결제받아가지고 나오는 영세한 제작자나 감독들을 기다리는 스태프나 연기자들이었다.

제작자는 일단 그곳에서 나오면 영화감독과 함께 옆건물에 있는 세기다방으로 가서 제일 먼저 감독계약을 하게 되고 감독은 전스태프들에게 계약에 의해 당좌수표나 약속어음을 배분해주었다.

제작자는 감독과 계약이 끝나면 시나리오작가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디어다방이나 브람스다방으로 가서 시나리오잔금을 지불했고 그 다음으로 스타다방으로 가서 연기자들과 계약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계약이 끝나면 전스태프나 연기자들은 다시 청맥다방으로 가서 원서동 아줌마니 신당동 아줌마니 신촌 아줌마니 하는 할인 아줌마들에게 수표나 어음 등을 할인해서 현찰로 바꾼 뒤 비로소 식당이나 술집, 까페 등으로 몰려가는 것이다.

그때 아직 영화작업에 끼이지 못한 예비스태프들이나 연기자들은 청맥다방 부근에 서성이다가 감독이나 작가, 혹은 촬영기사, 조명기사 등에게 몰려들면서 “오야붕! 이동차(영화촬영시 쓰는도구) 까는 겁니까?” 아니면 “형님! 한잔 때리러(마시러) 가시는겁니까?”하고 당연한것처럼 따라붙었다.

오야붕이나 형님으로 불리운 감독이나 작가들은 그들에게 호기롭게 따라오라는 싸인을 보내고 그들은 마치 옛날 우미관이나 명월관으로 몰려가는 김두한 패들처럼 거리를 쓸다시피 활보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영화계에서는 오야붕이니 뭐니 하는 일제시대에서 전수된 건달패용어나 웬만한 영화의 전문용어들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더 기민하고 비윗장 좋은 친구들은 유명감독이나 작가들의 단골식당과 까페에 가서 미리 자리를 잡아놓고 대기해 있기도 했다.

그 날 밤 오야붕이나 형님으로 불리운 감독, 작가, 촬영기사, 제작부장 등은 대부분 얄짤없이 계약금의 3분의1을 밥값, 술값 등으로 날리는 것이다. 그 많은 꼬붕들이 밤을새워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대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통금이 있었던 시절이었고 군부정치가 시퍼렇던 때였지만 영화인들에겐 해당이 되지 못했다. 충무로3가 주변엔 보통 새벽까지 술을 마실 수 있거나 당구를 칠 수 있거나 마작을 할 수 있는 곳이 이 골목 저 골목에 산재해 있었고 또한 영화편집실이니 녹음실이니 하는 곳이 여러곳 있어서 통금이 되면 의례히 그 곳으로 가서 술을 마시거나 잠을 자곤 했다.

또 대원호텔이니 라이온스호텔, 동신여관, 수강여관, 남장여관 등에는 언제나 시나리오작가들이나 감독들이 시나리오집필이나 콘티(연출대본)를 작성하기 위해 장기투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찾아들어가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그들은 실컷자고나서 해장국에 모닝커피까지 얻어마시고 차비까지 챙겨가지고 다시 충무로로 의연하게 출근(?)하는 것이다. 그래도 작가나 감독들은 그런 충무로 무법자들에게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아량(?)을 베풀어야만 했다.

정말 다른 사회에서는 상상 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미풍양속(?)이요, 지금도 낄낄거릴수밖에 없는 상쾌한 전설이다.                   

(정리/조민아)

이진모 시나리오 작가(영상교육원 교수)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