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채훈의 클래식 산책]프란츠 리스트와 최초의 리사이틀Ⅱ
[이채훈의 클래식 산책]프란츠 리스트와 최초의 리사이틀Ⅱ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승인 2021.06.1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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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 이채훈 클래식 해설가·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

(지난호에 이어)

리스트는 자기의 작품들뿐 아니라 바흐부터 쇼팽까지 피아노 레퍼토리 전체를 무대에 올렸다. 오늘날의 리사이틀처럼 과거 작곡가의 작품도 연주한 것이다. 그는 베토벤의 아홉 교향곡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해서 연주했는데, 이 피아노 편곡판들은 “오케스트라보다 더 오케스트라답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영어로 Transcription, 우리말로 ‘옮겨적기’라 한다.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자주 보기 어렵던 시절, 리스트의 피아노 편곡은 위대한 교향곡들을 널리 보급하는 효과가 컸다. 레코드 녹음기술이 없던 그 시대에 누구든지 가정이나 소모임에서 즐길 수 있도록 레코드 역할을 해 준 게 바로 리스트의 피아노 편곡판이었다. 

리스트는 헨델, 모차르트, 슈베르트, 파가니니, 슈만, 바그너, 벨리니, 도니제티, 베르디의 작품들을 피아노로 재창조하여 연주했다. 과거의 위대한 작품들 뿐 아니라 동시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발굴해서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다른 사람의 작품에 리스트의 음악혼을 담아서 새롭게 작곡한 이 작품들은 영어로 Paraphrase, 문학용어로 ‘의역’이라고 한다. 이 ‘의역’는 편곡자의 주관과 환상이 들어가기 때문에 단순한 ‘편곡’과 다르다. 리스트의 ‘의역’ 작품을 들으면 19세기 전반의 음악 풍경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진다. 발렌티나 리시차가 연주한 <라 캄파넬라>를 들어보자. <라 캄파넬라>는 ‘종’(鐘)이란 뜻으로, 현악기의 높은 현을 개방현으로 둔 채 낮은 현으로 멜로디를 연주하는 특수 주법이다.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 B단조의 3악장인데, 리스트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의역’하여 종소리의 빛나는 효과를 극대화했다. 

 파가니니-리스트 <라 캄파넬라> (피아노 발렌티나 리시차, 2013년 서울 예술의전당 연주)

리스트의 화려한 연주 스타일을 의식적으로 닮고자 하는 피아니스트로 중국의 랑랑을 들 수 있다. 그가 연주한 모차르트-리스트의 <동주앙의 추억>을 들어보자. 모차르트라는 옛 대가의 작품들에서 주제를 빌려오긴 했지만 리스트 자신의 색채가 훨씬 더 강하다. ‘의역’(Paraphrase)이란 게 단순한 편곡이 아니라 ‘재창조’임을 알 수 있다. 

모차르트-리스트 <동 주앙의 추억> (피아노 랑랑)

피아노의 초인 리스트가 관현악에서도 적지 않은 걸작을 남긴 것은 놀랍다. 그는 시와 교향악을 버무린 ‘교향시’를 13곡 남겼는데, 그 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곡은 1854년 작곡한 <전주곡>이다. “삶은 죽음의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지극히 염세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곡의 악보에는 프랑스 시인 라마르틴느의 시(詩)와 함께 카롤리네 자인-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쓴 서문이 붙어 있다. “우리의 인생이란 죽음에 의해 엄숙한 첫 음이 연주되는 미지의 찬가, 그 전주곡이 아니겠는가?”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 누가 이 말을 부정하겠는가? 그러나 음악을 들어보면 삶의 강력한 긍정이 느껴진다. 리스트는 광막한 우주를 향해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치고 있지 않은가? 죽음이 영원하다면 삶 또한 영원하다고 선언하는 것 아닌가?   

힘차고 장엄한 삶의 긍정에 이어서 네 개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우주를 향해 포효하는 듯한 힘찬 팡파레가 잦아들면 첼로와 호른의 평온한 칸타빌레가 사랑과 행복의 나날을 묘사한다. 알레그로, 인생의 시련이 폭풍처럼 격렬하게 몰아친다. 이어서 파스토랄레, 호른과 목관이 전원의 휴식을 정겹게 노래한다. 부드러운 칸타빌레의 주제가 다시 나타나서 고조된 뒤 모든 악기가 힘차게 삶을 긍정하며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리스트는 1847년 키에프 연주회 때 만난 자인-비트겐슈타인(Sayn-Wittgenstein) 공작부인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리스트는 1848년 공작부인의 감화로 화려한 비르튜오소 생활을 청산하고 작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결혼하려 했지만,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방해로 실패했다. 공작부인이 러시아에 갖고 있던 영지가 너무 넓어서, 리스트와 결혼할 경우 영토가 줄어들 게 예상됐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이 1세는 리스트의 리사이틀에서 수다를 떨다가 리스트에게 면박을 당한 경험 때문에 개인적 앙금이 있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결혼을 완전히 포기한 1861년 로마로 이사한 뒤 1865년 카톨릭 신부가 되어 교회음악 작곡에 몰두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초인적인 카리스마의 대가였지만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였고 문학적 소양도 뛰어났다. 그는 파리에서 쇼팽과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는데, 두 사람은 연주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서로 비교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쇼팽은 리스트의 테크닉을 찬탄했지만, 그의 외향적인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쇼팽은 자신의 에튀드를 리스트가 멋대로 화려하게 연주하자 “그 따위로 칠 거면 차라리 안 치는 게 낫겠다”며 화를 냈다. 리스트는 당황했지만, 쇼팽이 직접 연주하는 걸 듣고서 “자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네”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고 한다. 1849년 쇼팽이 사망하자 리스트는 이 고귀한 친구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고,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첫 전기를 썼다. 이 책은 <내 친구 쇼팽>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는 말했다. “리스트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를 화려한 비르튜오소로만 보는 것은 피상적인 인식이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성직자가 될 생각을 했고, 결국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려고 은퇴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