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리뷰]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도피 이상의 도피를 꿈꾸다
[전시리뷰]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도피 이상의 도피를 꿈꾸다
  • 안소현 기자
  • 승인 2021.09.18 14: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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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탈출한다 One Escape at a Time⟫, 오는 11월 21일까지
'도피주의' 재해석 …미술과 연관해 대중문화 변화 양상 살펴봐
시각 이미지 이면 권력 고발하기도

[서울문화투데이 안소현 기자] 대중문화는 권력의 시녀라고 했던가? 지난 8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에서 막을 올린 제11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는 이러한 통념을 슬쩍 비튼다. 전시 제목은 ⟪하루하루 탈출한다(One Escape at a Time)⟫로 미국 시트콤 <원 데이 엣 어 타임(One Day at a Time)>에서 따왔다. 한 쿠바계 미국인 가족 이야기를 통해 이민자, 여성, 퀴어 등 소수자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시트콤의 문법을 이용해 누군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을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전달했다. 이렇듯 오늘날 대중문화는 정색하고 현실과 맞대면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사회적으로 발언하기도 한다. 대중문화의 '도피주의'는 현실을 외면하는 비겁함이 아니라, 숨을 한 번 크게 돌리고 어려운 상황을 여유롭게 헤쳐나가는 전략이 될 수도 있다. 전시는 이러한 맥락에서 동시대 대중문화의 변화 양상과 그 가능성을 살펴본다. 

▲브리스 델스페제, '바디 더블 3', 1995, 스틸 이미지 (사진=작가 제공)
▲브리스 델스페제, '바디 더블 3', 1995, 스틸 이미지 (사진=작가 제공)

미술관 로비에서 첫인사를 건네는 브리스 델스페제의 비디오 <바디 더블 3>(1995)은 이번 전시의 전체적 윤곽을 그려주는 작품이다. 델스페제는 1995년부터 <바디 더블> 연작을 통해 영화의 일부 (때로는 전체)를 리메이크해오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가 대부분으로 여태까지 앨프레드 히치콕, 구스 반 산트, 안드레이 졸랍스키 등 유명 감독의 영화를 다수 차용했다. 영어 단어 '바디 더블(body double)'은 신체 노출이 있거나 위험한 장면에서 주연 배우를 대신해주는 대역 배우를 가리킨다. <바디 더블> 연작에서 델스페제는 스스로 대역 배우가 되어 자신이 인상 깊게 본 장면을 재현한다. 

<바디 더블 3>에서 리메이크한 영화는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스릴러 영화 <침실의 표적>(1984)이다. 남자 주인공 제이크(크레이그 왓슨)가 이웃집 여성 글로리아(데보라 쉘튼)를 스토킹하다가 얼떨결에 소매치기를 쫓아주고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다. 여기서 델스페제는 글로리아를 연기한다. 등장인물과 비슷한 의상을 입고, 원작 영화의 360도 패닝 기법도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뒷배경은 너무나도 인위적이고 의상도 조악하다. 원작에서 남성의 황홀경을 표현하기 위한 연출 기법이 여기서는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남성인 델스페제가 여성 역할을 하면서 할리우드가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에도 균열이 온다. '바디 더블'은 그렇게 확연히 다른 두 개의 몸을 가리키기도 한다. 작가는 제작자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능동적인 관객성의 모델을 보여준다. 

K-대중문화와 타국의 만남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현상은 한국 대중문화에 반응하는 타국 출신 작가가 꽤 많다는 점이다. 이들 작가는 델스페제처럼 자신을 수용자의 입장에 위치시키고 자기 시각으로 한국 문화를 재해석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를 바라보는 일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공기처럼 익숙했던 자국 대중문화를 타인의 시선을 통해 어느 정도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국적을 초월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작품 속에 그려진 풍경은 한국의 것도, 이국의 것도 아니었다. 대중문화를 매개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열려 있는 제3의 풍경이 펼쳐졌다. 

▲미네르바 쿠에바스, '작은 풍경을 위한 레시피', 2021,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홍철기, 글림워커픽쳐스
▲미네르바 쿠에바스, '작은 풍경을 위한 레시피', 2021,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홍철기, 글림워커픽쳐스

미네르바 쿠에바스의 대형 벽화 <작은 풍경을 위한 레시피>(2021)는 작가가 바라본 한국 풍경을 픽셀 아트 형식으로 풀어냈다. 멀리서 보면 디지털 작업을 프린트해 붙인 것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바라보면 손으로 직접 그린 회화 작업이다. 쿠에바스는 동시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은 멕시코 작가다. 환경 문제, 초국가 기업의 횡포 등을 다양한 매체로 다뤄왔다. <작은 풍경을 위한 레시피>는 작가가 한국을 리서치하고 내린 작은 결론 같았다. 산수인물화 같은 느낌을 주는 작업인데, 쿠에바스가 바라본 한국 풍경을 풀어낸 것이라고 한다. 벽화 한쪽에는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바위산 위에 앉아 토끼를 쓰다듬고 있다. 바깥세상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등을 지고 앉아 경치를 감상하고 있다. 이 인물은 임순례 감독이다. 여태까지 동물권 운동에 힘써 온 임 감독의 행보와 남성 중심 영화 업계에서 여성 감독으로서 이뤄낸 성취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 그려 넣었다고 한다. 

반대쪽 구석에서는 꽃과 표고버섯에 둘러싸여 풍화되고 있는 듯한 스팸 캔이 놓여 있다. 작가는 초국가 브랜드가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맥락으로 변용돼 순환하는 모습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미군 전투식량으로 이용되던 스팸은 한국 전쟁 때 처음 국내에 들어왔다. 한동안은 부자의 전유물이었으나,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먹는 식품이 됐다. 명절 선물로도 커다란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스팸 생산의 이면에는 축산업을 둘러싼 탄소 배출 및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스팸 캔은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임순례 감독과 대비되면서 생태적 세계를 지향하는 작가의 가치관을 실어 나른다. 아파트 숲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조금 낯선 풍경이었다. 현실 세계보다는 이상향을 그린 것 같았다.

▲아이샤 혹슨, '슈퍼우먼: 돌폼의 제국', 2021
▲아이샤 혹슨, '슈퍼우먼: 돌폼의 제국', 2021

필리핀 작가 아이샤 혹슨은 <슈퍼우먼: 돌봄의 제국>(2021)을 통해 케이팝을 재해석했다. 혹슨은 서비스 및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몸'을 둘러싼 각종 정치적 문제를 작품 주제로 다뤄왔다. 2019년부터는 '필리핀 슈퍼우먼 밴드'를 운영하면서, 캐린 화이트의 1989년 곡 '슈퍼우먼'을 차용해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원곡 '슈퍼우먼'은 가사 노동에 지친 한 여성이 자신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며 남성 파트너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내용이다.  

혹슨은 이번 작품에서 블랙핑크 <Kill This Love>의 안무, 의상 등을 가져와 필리핀 문화와 접목했다. 중간중간 방호복을 입고 등장하면서 의료종사자들과 '슈퍼우먼'을 연결하기도 했다. 필리핀 정부는 팬데믹 상황에서 이들을 슈퍼우먼이라고 칭송하면서도 제대로 처우해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작가는 원곡을 개사해 "현대판 영웅 [...] 하지만 우리가 권리를 말하면 들리지 않지"라고 노래하며 이러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한국 여성 아이돌도 의료인과 마찬가지로 "현대판 영웅"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영웅 타이틀을 유지하려면 자기 삶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한다. "파시스트 사랑을 죽여라"라고 외치는 혹슨은 가부장적인 틀을 비틀어 저항의 도구로 사용했다. 

C-U-T의 비디오 <KALEIDOSCOPE>(2021)도 케이팝을 소재로 했다. C-U-T는 스톡홀름 왕립예술학교 학생 여섯 명이 결성한 스웨덴 케이팝 보이밴드다. 퍼포먼스를 가르치는 선생님, 밍 웡이 매니저 역할을 맡았다. <KALEIDOSCOPE>는 이들이 만든 뮤직비디오와 인터뷰 영상으로 구성된 비디오 작업이다. 케이팝 산업이 전달하는 여러 가치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 지평을 넓히려는 의도로 작품을 제작했다고 한다. 곡에는 만화경(kaleidoscope)처럼 다양성을 포용하고 다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실제로 이들은 스웨덴 케이팝이라는 혼종적인 장르를 만들어 국경을 초월했다. 멤버들은 또한 전형적인 남성성을 연기하지도 않고, 하나의 스타일로 통일해 의상을 맞춰 입지도 않았다. 케이팝이 한국인의 소유물일 수 없으며,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C-U-T 프로필 사진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테레즈 오르발.
▲C-U-T 프로필 사진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테레즈 오르발.

대중매체와 정치

하지만 대중매체가 여전히 특정 이데올로기를 실어 나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현실 속 특정 요소들을 선별 및 연출해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정형화하는 데 일조한다. 전시에서는 대중매체의 언어를 해체해 보여주고, 그 권력에 저항해 보려는 시도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아시아의 정치적 풍경을 비판적으로 그려온 작가, 바니 아비디의 <연설>(2007)은 대중매체에서 정치적 메시지가 어떤 식으로 인식되는지 살펴본다. 작업은 텔레비전 모니터와 9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니터에는 파키스탄 대통령의 연설 연단이 보인다. 화면 왼쪽에는 파키스탄 국기가 놓여있고, 뒤에는 파키스탄 독립을 이끈 무함마드 알리 진나의 초상이 걸려있다. 대통령이 금방이라도 나와 연설을 시작할 것 같지만, 화면은 움직이지 않는다. 모니터 뒤쪽에 걸린 9장의 사진에는 파키스탄 도시 라호르 곳곳에 설치된 연단 스틸 이미지가 담겼다. 사람들은 연설을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연단 이미지는 텔레비전을 통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사람들이 권력을 인식하도록 교육한다. 국기, 국부 등 국가적 상징이 동원돼 특정 발화 행위에 권력을 실어주고,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은다. 아비디 작가는 대중매체를 통해 정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을 노출했다. 

▲바니 아비디, '연설', 2007
▲바니 아비디, '연설', 2007

쿠웨이트 작가 무니라 알 카디리의 비디오 <비누(SOAP)>(2014)는 걸프 지역 산유국 드라마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상에 주목했다. 작품 제목은 '소프 오페라(soap opera)'에서 왔는데, 비누처럼 이들의 존재를 지운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해당 지역 드라마에서는 주로 호화로운 부유층의 삶이 그려진다. 작가는 여기에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합성해 지워진 존재들을 가시화했다. 이렇게 각기 다른 두 세계에 속한 인물들이 한 화면에 실리게 되지만, 이들은 서로를 인식하지는 못한다. 드라마 속 인물은 이주노동자를 발견하지 못하며, 이주노동자는 마치 유령처럼 인물 주변을 배회한다. 작가는 일부러 티가 나게 합성해 두 세계의 이질성을 드러냈다. 한국 드라마에서도 이주노동자는 거의 재현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홍진훤,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v2.0', 2021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홍철기, 글림워커픽쳐스
▲홍진훤,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v2.0', 2021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제공) ©홍철기, 글림워커픽쳐스

한국 작가 홍진훤 역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역학을 다룬다. 영상구독서비스 <Destroy the Code>(2021)는 인터넷상의 시각 이미지에 배태된 권력에 저항하고자 한다. 알고리즘에 의해 비가시화된 영상들을 발굴해 이메일로 공유하는 프로젝트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작가는 능동적인 검색 행위를 통해 정형화된 검색 패턴에 변화를 줌으로써 알고리즘에 도전하고자 했다. 전시장 1층에 전시된 작품 <굿 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v2.0>(2021)에는 사람들이 찾아낸 영상들이 선언문과 함께 전시돼 있었다. 하지만 수면 위로 올라온 비디오들도 미얀마, 난민 이슈 등 여전히 범주화된 주제들이기는 했다. 인터넷이 구획한 세상을 흐트러뜨리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 3층에서는 사진 이미지를 통해 가시화된 현실과 생략되는 현실의 관계를 보여줬다. 예를 들어 한쪽에서는 올림픽을 위해 연출된 도시 경관 사진이, 다른 한쪽에서는 지워진 낡은 도시의 흔적이 전시됐다. 배제된 세계를 들어냄으로써 시각 이미지 이면에서 작동하는 권력을 관람객이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하루하루 탈출한다⟫에서는 대중문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었다. 대중문화는 지배 도구로 이용되며 시민성을 억누를 수도 있지만, 다양한 문화가 모여 새로운 상상력을 끌어내는 창구가 될 수도 있다.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많은 부분 수용자에게 달렸다. 이지원 큐레이터는 "자기 나름의 스토리를 통해 현실에 코멘트하는 작가들을 통해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관점을 경험할 수 있다"라며 "관객이 이곳에서 세계를 넓히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그 어느 때보다 대중문화와 가까워진 지금, 이번 전시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요소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