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이버, 곧 박물관장이 될 껍니다.”
“맥가이버, 곧 박물관장이 될 껍니다.”
  • 이은영 편집국장
  • 승인 2010.01.2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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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주인공으로 40년 승승장구 성우인생...호기심 대장,지금은 아들 인생 가장 궁금하다.

맥가이버와 가제트 형사의 친근한 목소리를 지금도 기억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천의 변신을 하는 사람’, ‘배돌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만큼 호기심과 끈기 열정을 가지고 현재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걸어온 성우 배한성. 40년의 승승장구 성우인생도 모자라 20년 전부터는 하고 싶은 일들까지 부지런히 곁눈질하며 살아왔다.
늘 고상한 주인공 역할의 목소리를 맡아 왔기 때문에 그에게 어떤 인생의 굴곡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가 어려울 정도지만, 어려운 시절 자신을 돌아봐준 사람들이 고마워 지금도 따뜻한 온정을 베푼 사람이면 잊지 않고 끝끝내 보답을 한다는 배 교수. 이제 막둥이 아들의 진로만 잘 해결되면 좋겠다고 말하는 호기심 천국 배 교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고 왔다.

“그래도 제가 죽으면 성우 배한성이 죽었지 탤런트 배한성이 죽었다 그러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본인이 ‘호기심 천국’이라는 성우 배한성은 성우로만 기억되기에는 별난 이력들이 많다. 티코와 다마스로 시베리아 대륙을 횡단 했는가 하면 부산으로 훌쩍 내려가 술장사도 해봤다. 언제부턴가는 앤틱 유물들에도 관심을 갖게 돼 앤틱샵을 열어 본적도 있다.


현재도 서울예술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라는 대표 타이틀을 외엔 정말 ‘가제트 형사’만이 알아낼 법한 다양한 분야에서 ‘젊은 오빠’로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최근 근황을 물었다.

“전 성우로서 할 일은 다했고 이제 후배들이 할 일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강의를 많이 하고 있는데 제 강의가 3~40대 층에 어필하고 있다고 입 소문이 났다고 하더군요. 전 정체 되어 있는 것을 싫어하고 부산하고 산만한 편이예요. 호기심 천국이 제 원동력이죠. 항상 하는 일마다 칭찬을 받고 그렇다 보니 성우로서 불만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호기심이 많고 좌충우돌 하는 성격이다 보니 20년 전부터는 2프로 부족한 느낌을 받으면서 이것만이 아니고 또 다른 것이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죠. 성우 생활안한지가 오래되다보니 한 선배님이 저에게 ‘너 정말 성우가 맞긴 하냐’ 그런 말씀을 하실 정도 예요. 최근에는 무슨 홍보 대사를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국제 기아 대책 기구, 생명의 전화, 사랑의 집 수리 운동과 같은 단체들인데 정말 감사한 일이고 기꺼이 해야지요.”

배 교수는 그런 일은 정말 돈과는 관계가 없지만 사회에 빚을 갚기 위해 해야 한다며 운을 뗐다. 월북하신 아버지 때문에 혼자 남겨진 생활력 없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려서부터 가장이 되어야 했던 그의 아픔이 묻어난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중학교 때부터 가장 노릇을 했어요. ‘애미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 받지마라’는 말을 늘 듣고 자랐죠. 옆집 아주머니께 연탄을 빌리고 윗집 아저씨께 돈을 꾸고 그런 식으로 살았어요. 신문을 돌리고 가난에 찌든 생활이 계속됐지만 어머님이 그 때 들려주신 영화이야기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준 것 같아요. 어쨌든 그렇게 주변의 신세를 지고 살았으니까 지금도 희생과 봉사까지는 못하더라도 빚진 것을 좀 갚자는 의무감이 있죠.”

대표작은?...“앞으로 나올 것”

‘그래도 배한성은 성우’라는 그의 말에 자신의 대표작은 무엇이라고 생각 하냐는 질문을 하자 찰리 채플린 말을 인용해 ‘대표작은 앞으로 나올 것’ 이라며 너털웃음을 웃는다.

“제가 결정적으로 성우를 그만 둘 기로에 있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 때 이종환 피디라는 분이 ‘이대로 그만 둘 것이냐’며 저를 격려해 은퇴작을 하자고 하더군요. 당시 미국에서는 어윈 쇼라는 사람이 쓴 ‘리치맨 푸어맨’ 이라는 작품이 유행 중이었고 그걸 우리나라에 들여와서 ‘야망의 계절’, ‘태양의 계절’이라는 미니시리즈로 만들었죠. 70년대 중 후반이었는데 엄청 히트를 쳤었어요. 그 시리즈의 주인공 역할을 하다보니까 여성 팬들한테 아주 매력적인 존재가 됐었죠.”

녹음 하면서 가장 애를 먹었던 작품은 단연 아마데우스를 꼽았다.

“나노라는 말을 쓰지만 톰 헐스라는 배우가 아주 ‘나노’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였어요. 마치 ‘다른 배우는 절대 내 역할을 소화 못해’ 라고 말하는 것처럼 기가 막힌 연기를 했었죠. 학교 다닐 때 애 먹인 애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 것처럼 이 작품을 소화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보니 확실히 기억에 남는 군요.”


주인공 마인드로 사는 삶...“나는 전설이다”

이렇듯 터트리기만 하면 히트를 치는 성우였기 때문에 어린 시절 이후론 탄탄대로만 밝아 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도 방송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힘겨움이 있었다.

“제가 원래 KBS 영화부 쪽에서 일을 시작했다보니 MBC쪽 일을 하지 못하게 하더군요. 저는 비슷한 역이면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라는 말을 했지만 그게 허용이 되지 않았어요. 결국 MBC쪽에서 제의가 와 일을 하게 됐는데 KBS측에서 보면 배신을 한 셈이죠. 그 때만 해도 MBC가 파이가 작은 곳이다 보니 제가 거기에서 ‘숟가락을 들고’ 있는 것이 선·후배 들에게 눈길이 곱지 않을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MBC쪽에 당분간 외화를 떠나겠다는 제 의사를 표명했죠. KBS쪽에도 돌아가지 않기로 생각했고요. 그랬더니 MBC측에서는 자기네들 때문에 제 입장이 난처해 졌다고 생각 했는지 미안해서 선처를 해줬죠. 그래서 그 때 하게 된 작품이 ‘가제트 형사’였어요. 그게 또 저의 히트작처럼 됐지요. 워낙에는 다른 분이 하기로 되어 있던 작품이었다고 해요. 당시에는 여러 가지로 아주 속상했는데 결국 전화위복이 된 셈이지요.”

당시 경제적인 면을 생각해 타협을 했다면 KBS로 돌아가 무릎을 꿇어야 했지만 배 교수는 그러지 않았다. 인생 길게 보자는 생각을 하며 그 때도 그는 스스로 ‘전설’이 되고 있었다.

“배한성이는 목소리 좋아서 40년 성우 그렇게 하나보다 생각들을 하시는데 사실 목소리가 좋았던 것은 제가 가진 경쟁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나일 뿐이고 곰바우 처럼 열심히 하고 시대적인 트렌드가 따라 주었던 것이 성공 비결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 시대의 외화의 주인공이라는게 멜랑꼴리하고 철학적인 느낌도 많고 적당히 우울하기도 해서 당시의 여성들이 바라는 남성의 모습에 잘 부합했었어요. 제가 주인공을 주로 맡은 데다 제 목소리에 약간의 비음이 있어 오히려 여성분들의 심성을 자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웃음) 지금은 사회적으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보니까 별것 아니겠지만 당시만 해도 사회가 조용하고 침착했지요.”

계속되는 주인공 역할은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 같은 남자처럼 행동하게 했단다. 그게 지금도 10살은 어려보이는 동안의 비결이라고. 그는 주인공 마인드로 사는 삶을 강조했다.

“주인공만 계속 하다보니까 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들어서 그렇게 행동을 하다 보니 어디 가서 매너가 나쁘다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요. 영화 속 주인공 역을 하려면 분석을 해야 하니까요. 왜 저런 표정을 지었을까, 저런 몸짓의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주인공의 연구를 한 것이 제 스타일까지 만들게 된 거죠. 참 신기 한 것이 3류 배역을 맡은 친구들을 보면 점심 먹으러 가자고 말 할 때도 꼭 그렇게 말을 해요. 주인공으로 산다고 생각하면 먼저 생각이 바뀌고 삶이 그렇게 되는 것이죠.”


똑같은 것은 참기 힘들어...성공신화를 쓰다

계속 되는 고공 행진에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다는 배 교수. 특히 도전 지구 탐험대라는 코너를 진행하면서 매너리즘을 극복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코너를 10년 정도 하고 끝냈어요. 한 5년 정도 진행 하니까 제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지더군요. 그래서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그만두는 것은 안 되고 다른 여자 성우 분을 투입해서 스타일에 변화를 주겠다고 했어요. 막상 그렇게 하고보니 또 제가 방송하는 부분과 그분이 방송하는 시간대의 시청률이 또 달리 나오게 된 거예요. 그래서 결국 제가 다시 해야 했죠. 그러나 정말 같은 스타일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고민 고민 하니까 무언가 나오더군요. 가령 아프리카 촌구석에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충청도 말로 ‘촌장님 안녕 하십니꺼’라고 한다든지 말입니다.”

그러면서 당시 진행했던 그대로를 재현하는데 역시 아직도 녹슬지 않은 실력이 빛을 발한다.

“목소리가 표 나게 좋은 것 때문에 겪었던 웃지 못 할 일도 있었어요. 박중훈 씨가 데뷔작 ‘깜보’를 촬영할 때였죠. 당시는 동시 녹음이 안돼서 중훈 씨가 연기를 기막히게 했지만 더빙을 해야 했던 적이 있었어요. 까불기도 하고 별별 지랄 발광 하듯이 하는 역할이라 그런 것을 소화 할 수 있는 것은 저 밖에 없다고 생각하신 감독님이 저를 불러서 15분가량 녹음을 시켜보시더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뭘 잘못했느냐고 물었는데 박중훈 이 친구가 이 영화를 통해 떠야하는 데 눈감고 들으면 배한성이라는 게 문제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지금은 기자에게 인터뷰를 당하고 있지만 배 교수는 방송에서 ‘배한성의 특별한 인터뷰’라는 코너를 통해 생생한 인터뷰를 직접 진행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자수성가 한 사람인 만큼 그는 이 코너를 통해 성공 신화를 창조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는 당시 인터뷰 한 사람 중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현재 KTF부사장을 맡고 있는 조서한 씨를 꼽았다.

“그분이 ROTC장교를 했는데 수류탄 교육을 하다가 부하 중 한명이 수류탄을 떨어뜨려서 그걸 막으려고 자신이 되려 한 쪽 팔을 잃게 된 분이었죠. 핸디캡 때문에 취업이 계속 되지 않고 있다가 면접에서 자신의 핸디캡이 의로운 일을 하면서 생긴 것이라는 용감한 발언을 하고 애경그룹에 입사한 후 하나로 샴푸라는 아이디어를 내 대박을 냈던 분이예요. 모티베이터, 동기 부여자 그런 책도 쓰시고 현재 강의도 많이 다니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비단 그분뿐만 아니라 데미지가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한 썩세스 스토리를 가진 분들이 많았죠.”

늘 단짝으로 출연해 부부가 아니냐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는 송도순 씨의 인터뷰를 진행 한 적도 있었단다.

“늘상 방송을 하면서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뷰를 하니까 또 새로운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되더군요. 송도순 씨는 역시 그냥 주문만 하면 요술 램프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 같이 탁월한 재능이 있는 사람 이예요. 저는 성우 40년을 그냥 보낸 것 같은데 그 분은 늘 더 노력하려는 사람이었어요. 마음도 참 따듯해요. 제가 한번은 수술을 한 적이 있는데 300만원 되는 거금을 들여서 홍삼 제품을 사 왔더군요. 제가 늘 돌돌 거리면서 돌아 다녀야 하는 건데 선배가 기운이 없어 보이니까 안 되어 보였던 가 바요. 우리가 방송을 진행할 때는 남녀 진행자의 모습이 너무 천편일률 적이라는 점에 착안해 제가 송도순 씨를 구박하는 설정으로 스타일을 잡기도 했었죠. 그래서 제가 남자 분들에게 대리만족을 줬다고들 하더군요.”


막둥이 아들에 대한 호기심...앤틱 박물관장 꿈꿔

그의 열정과 끊임없는 도전을 운명이 시샘해서 일까. 그는 사랑했던 부인을 차 사고로 단번에 잃는 아픔까지 겪었다. 그러나 그는 배낭여행에서 운명처럼 만난 여인과 다시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됐다.

“아내가 참 괜찮은 여자예요. 전 아내의 제사까지 지내주는 사람이죠. 제가 티코를 타고 시베리아를 간다고 할 때 하니까 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도 그거 타고 설악산도 못 간다고들 말하며 말렸죠. 당시 제가 부인을 차 사고로 잃고 다시 결혼 한 후 안정기로 접어든 때 쯤 이어서 여행을 떠난다는 게 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아내가 선뜻 허락을 해줬어요. 여행이 에뜨랑제 라는데, 방랑자라는 이 말이 너무 멋있지 않나요?

그는 아직도 꿈을 꾼다. 아들의 진로를 궁금해 하는 소박한 꿈부터 어쩌면 곧 박물관장이 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꿈까지.

“앞으로의 꿈이요? 전 이제 궁금한 것이 별로 없지만 막둥이 아들 진로가 궁금하네요.(웃음) 그리고 앤틱과 관련된 일이죠. 저에겐 앤틱이 어떤 미적 오브제인 것 같아요. 앤틱에는 세계최고의 귀족 왕족 최상류층의 로망이 담겨 있지요. 부자나 가진 자들의 호화취미처럼 비춰 질수 있겠지만 그곳에 가장 품격 있는 미감이 응축되어 있죠. 솔로몬이라고 우수한 앤틱 유물을 10만점 정도 가지고 있는 회사에서 제가 아트디렉터로서 일을 돕고 있는데 잘 하면 내년쯤에는 박물관장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올해는 뛸 일이 아주 많습니다.”

인터뷰 서울문화투데이 이은영 기자/정리 편보경 기자/김형관 사진기자 press@s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