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어떻게 하면 은하수를 끌어와 무기를 씻을 수 있을까”…연극 <빵야>
[공연 리뷰]“어떻게 하면 은하수를 끌어와 무기를 씻을 수 있을까”…연극 <빵야>
  • 진보연 기자
  • 승인 2023.03.1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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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2.25 LG아트센터 공연

[서울문화투데이 진보연 기자]파주에 위치한 영화 소품창고. 낡은 영창 피아노 위, 세고비아 기타 옆 묵직한 나무 케이스에 담긴 장총 하나가 놓여있다. 1945년 인천 부평 조병창에서 태어난 99식 소총 ‘빵야’다. 당대 최고의 성능으로 300만 정이 생산된 아리사카 99식 소총은, 일제 제국주의 침략의 주력 화기였다. 작품은 이 99식 소총을 의인화해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연극 ‘빵야’ 공연사진
▲연극 ‘빵야’ 공연사진, (왼쪽부터) 빵야 役 문태유, 나나 役 이진희 (제공=㈜엠비제트컴퍼니)

연극 <빵야>는 한국 근현대사의 사건들을 통해 상실에 대한 트라우마, 남은 이의 부채의식 등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깊은 슬픔을 이야기하는 김은성 작가의 신작이다. 

작품은 40대 여성 드라마작가 ‘나나’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드라마 편성에 번번이 실패하는 한물간 작가는 시나리오 소재를 찾던 중 소품 창고에서 오래된 99식 소총 ‘빵야’를 발견하고, 빵야의 이야기는 곧 나나의 이야기가 된다. 빵야가 만나온 주인들과 그들이 겪은 시간은 극중극 형태로 나나의 시나리오 <트리거>에 한 자 한 자 기록된다.

▲연극 ‘빵야’ 공연사진, (왼쪽부터) 빵야 役 하성광, 나나 役 정운선 (제공=㈜엠비제트컴퍼니)

1945년 강제로 무기 제작에 동원된 어린 영이의 손을 거쳐 탄생한 빵야는 첫 주인인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기무라를 만나 수많은 조선인을 죽이는데 이용된다. 이후 순진무구한 조선인 병사 길남에게, 명포수의 딸 중국팔로군 선녀에게, 그리고 다시 배곯는 게 싫어 군에 입대한 형제 많은 집 장남 국방경비대 무근, 서북청년단 신출에게도 전해진다. 한국전쟁 중에는 학도병 원교와 북한군 의용대 아미의 손을 거쳐 빨치산 토벌대 보아라부대 병사 동식과 빨치산 소녀 설화의 손에 맡겨진다. 이후 빵야는 심마니, 사냥꾼, 포경꾼, 건설업자, 영화 제작자 등을 거쳐 소품 창고에 이른다.

17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작품은 ‘빵야의 삶’과 ‘나나의 삶’을 분주하게 오간다. 일제강점기, 제주 4ㆍ3사건, 한국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성별과 나이가 제각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와 더불어 군가, 클래식, 일레트릭 사운드 등이 다양하게 활용되는 민찬홍 감독의 음악은 작품의 몰입을 더한다. 여기에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선사하는 배우들의 열연은 지루할 틈 없이 공연의 완성도를 높인다. 빵야 역의 하성광과 문태유, 나나 역의 이진희와 정운선은 각각 더블캐스팅으로 전혀 다른 성격의 캐릭터를 표현해 객석에 색다른 감동을 안겼다. 더불어 오대석, 이상은, 김세환, 최정우, 김지혜, 진초록, 송영미는 원캐스트로 분하며 한 달 간 공연을 안정감 있게 이끌었다. 

▲연극 ‘빵야’ 공연 사진 (제공=㈜엠비제트컴퍼니)

<빵야>는 ‘빵야’와 ‘나나’를 통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유한다. 빵야와 주인들이 보내온 삶을 통해 근현대사를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지 묻는다. 또한 마침내 완성된 나나의 드라마 대본이 ‘대중성’을 이유로 편집되고 각색되는 모습을 통해, 이 시대에 ‘진짜 이야기’는 무엇인지 질문한다.

‘빵야’는 진짜 이야기에는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범람하는 콘텐츠의 바다 한 가운데, 연극은 그런 힘이 있다.